체육관의 시계를 뒤로한 체 밖으로 나온 내가 본 것은 학교 중앙 꼭대기에 설치되어 있는 커다란 디지털 시계였다. 저렇게 어마무시하게 큰 것을 도대체 무슨 수로... 분명히 학교 어딘가에 관리하는 장소가 있을 테지만 내가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할 확률이 높다. 애초에 그곳을 찾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꽤나 걸릴 것이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선택지는 한 곳 밖에 없다. 나는 비디오를 되감는 것처럼 체육관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밑에서 멍하니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아...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아니야...”
저 정도의 높이는 내가 3명은 있어야 닿을락 말락한 높이다. 어떻게 저런 곳에 시계를 달 생각을 했을까? 올라가지도 않았지만 벌써부터 겁이 난다.
“그래도 해야겠지?”
꿀꺽-
나는 구석에 세워져 있는 긴 사다리를 가지러갔다. 높이를 본다면 시계를 잡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문제는 내가 저 높이에 올라갈 수 있을 지가 진짜 문제다. 나는 세워져 있는 사다리를 안아서 들어보려 했다.
“어? 어?!”
콰쾅-! 쾅-! 쾅쾅-!
사다리의 높이와 무거운 무게 때문에 나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사다리와 나는 함께 옆으로 쓰러졌다.
“아! 아!! 아!!! 귀 아파!!!”
철제로 만들어진 사다리의 소리가 커다란 굉음을 내며 쓰러졌다. 사다리가 쓰러지는 와중에도 나는 정말 둔한 건지 끝까지 사다리를 놓지 않은 바람에 사다리가 넘어지면서 전해지는 진동을 고스란히 다 받았다. 상처가 나진 않았지만 커다란 통증을 유발하기에는 충분했었다. 속에서 짜증과 울분이 마구 올라왔지만 심호흡을 하여, 속을 한 번 가다듬었다.
‘이거만 끝내면 조영에게 도움을 한 번 받을 수 있으니까, 조금만 더 버티자. 후...’
덜컹- 덜커덩- 쿠쿠쿵-
누워있던 사다리를 시계 밑까지 끌고 왔다. 이후에 안간 힘을 써서 누워있는 사다리를 세웠다. 방금 쓰러진 여파 때문일까? 몸 전체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탁-
높이를 가늠해보니 내가 사다리 제일 위에 올라가 서서 팔을 뻗으면 시계는 닿을 거 같다. 하지만 내가 저 높이에서 일어설 수 있을까? 겁이 난다. 그래도 할 수밖에 없다. 난 사다리를 잡고 조심스레 발을 올렸다.
탁- 탁- 탁- 탁-
한 칸씩 올라갈수록 내 두려움도 점점 커져갔다. 내 다리는 두려움의 강도를 표현해주는 것처럼 올라가면 갈수록 떨림이 더욱 커져갔다. 10칸 정도 올라갔다. 나는 고개를 들어서 위쪽을 확인하니, 지금 나는 사다리의 중간 정도의 위치까지 올라갔었다.
‘앞으로 조금만 더...’
탁- 탁- 탁- 탁-
마지막으로 몇 칸이 남지 않았을 때쯤, 내 손은 이미 사다리의 꼭대기를 만지고 있었다. 이 높이에선 손을 뻗어도 시계가 닿지 않는다.
“아흐흑... 엄마...”
손과 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참아야만 한다. 떨림은 전신을 흔들 정도로 커졌지만 침착하게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남은 4칸을 마저 올라가서 꼭대기에 앉았다.
“후...”
발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발에서부터 시작되는 진동이 나를 흔들었다. 나는 진동을 버티고 팔을 뻗었다.
“조금만 더...!”
아슬아슬한 차이로 시계에 손이 닿질 않자, 발의 뒤꿈치를 살짝 들어서 손을 뻗었다.
“닿아...ㅆ. 잡았다! 아!?”
내가 시계를 잡자, 사다리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흔들림에 균형을 서서히 잃어갔다.
“아아아... 안 돼... 안 돼!!!”
균형을 잃어 떨어질 것을 직감한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결국 사다리는 넘어가기 시작했고 내 몸은 공중에 붕 떠버렸다. 그리고 한참을 계속해서 눈을 감고만 있었다.
응?
무언가가 이상했다. 한참을 눈을 감고 있었지만 몸에서 어떠한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푹신한 쿠션 위에 누워있는 것처럼 포근한 느낌만 들었다. 나는 슬며시 감았던 눈을 떴다.
눈앞에는 피사의 사탑처럼 기운 상태로 멈춰있는 긴 사다리가 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파악했다.
고개 옆으로 바로 보이는 건 분홍색의 털 뭉치였다. 아니 그보다도 나는 지금 분홍색의 커다란 쿠션 위에 누워있었다. 방금 느꼈었던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히 올라가기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눈에 띄는 쿠션은 없었는데...
“얘~ 나 아니었으면 어쩔 뻔 했어?”
머리 위쪽에서 재수 없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턱을 들고 고개를 넘긴 상태로 위쪽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조영이 특유의 재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구해줘서 감사합니다...”
“괜찮아~ 내 입장에서도 배우가 다쳐서 연극을 못 본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니까. 게다가 공짜도 아니고~ 호호.”
“누구 때문에 이 사단이 난건데요!!! 그리고 공짜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하고 지금은 그게 더 급하지 않아?”
조영은 손가락으로 내 손을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서 시선을 옮겨보니 내 품 안에는 체육관의 시계가 있었다. 사다리에서 떨어질 때 시계를 놓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계속 잡고 있었던 거 같다.
“아...!!! 끝났다!!!”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시계를 돌려서 시간을 맞추었다. 나는 다시 턱을 들어서 조영을 보았다.
“여자 목욕탕에도 남자 목욕탕처럼 수건하고 옷들을 많이 만들어주세요!!!”
“응~ 네가 다 끝내면 들어줄게~”
다 끝내면 이라니...? 이게 마지막일 텐데?
“그 표정은 뭘까~? 설마 그게 마지막인 줄 알았던 거야?”
“아니... 에요?”
“네가 놓친 게 뭔지 잘 생각해봐~ 이번에만 특별히 힌트를 주자면 넌 아직 절반 정도밖에 안한 거야. 그럼 조금 더 발버둥 쳐서 나를 재미있게 만들어줘~ 안녕~”
조영은 알 수 없는 말만을 늘어놓고 또 다시 사라졌다.
‘이렇게나 고생했는데 아직 절반? 시계가 또 어디에 있다고!!! 그건 알려주고 가야지!!!’
속에서 쌓여있던 울분이 목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부정이 너무 쌓이면 긍정이 아니라 체념하게 된다고 금방 진정되었다.
“아... 몰라. 안 해. 못 해!”
시계를 바닥에 두고 나는 팔다리를 피고 편하게 누웠다. 정말 편안했다.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조영이 준 과제를 한지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다리와 사투를 하는 동안에 이미 내 정신은 피로감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나는 쿠션의 포근함에 긴장된 몸을 맡겼고, 나도 모르게 눈이 스르르 감기고 있었다.
그때 머릿속에서 수호의 얼굴이 스쳐갔다. 나는 완전히 감을 뻔했던 눈을 급하게 다시 뜨고, 상체를 세웠다.
“아! 안 돼!”
지금 이 상태로 눈을 감아버리면 안 된다. 순간의 달콤한 휴식에 눈이 멀어서 주어진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조금 더 독하게 마음을 먹어야겠다.
그나저나 내가 놓친 건 뭘까? 학교에서 시계가 있는 장소라는 장소는 전부 다녀왔다. 일반적으로 벽에 걸려있는 시계뿐만이 아니라 컴퓨터의 시간, 디지털시계들의 시간까지 전부 바꾸었다. 그런데도 이번엔 뭐가... 일단 처음부터 다시 둘러보며 찾아보는 게 나을 거 같다.
꼬르륵-
아... 일단 허기가 졌으니 뭐든 먹고 나서 탐색해야겠다. 나는 체육관에서 나와서 양호실로 이동했다. 봉지를 뒤져서 초코우유를 하나 꺼내서 마셨다.
“하... 도대체 뭘 빼먹은 걸까?”
혹시 모르니 양호실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하지만 구석구석 둘러봐도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나는 양호선생님 앞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았다.
“선생님, 제가 뭘 빼먹은 걸까요?”
내가 말을 건다고 해서 양호선생님이 대답할리는 없었다. 그저 이 답답함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하...”
이때 양호선생님의 손목에 시선이 갔다.
“어?!”
그렇다. 아직 빼먹은 것이 있었다. 사람들이 손목에 차고 있는 손목시계였다. 모든 사람들이 착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상당수가 착용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알아내자마자 바로 양호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
생각과는 달리 손목시계를 착용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최근 스마트폰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시계 때문에 학생들은 전원 착용 금지가 된 게 큰 이유였다.
“하아... 이걸로 진짜 마지막!”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손목시계의 시간을 맞추자 등 뒤에서 눈부실 정도로 밝은 빛이 쏟아졌다. 몸을 돌리니 그곳엔 조영이 있었다.
“축하해~ 소원은 아까 말한 것처럼 수건을 여자 목욕탕에 많이 쌓아두면 되는 거지?”
“갈아입을 옷하고 같이 주세요!”
“한 번에 한 개씩만 주문해줄래?”
“너무해...”
“얘도 참! 공짜로 해주는 게 어디야~ 바라는 것도 많아!”
“그럼 수건이라도 주세요...”
“이미 옮겨놨으니까 지금 바로 가도 괜찮아~”
“네. 감사합니다.”
조영은 또 다시 할 말만 하고 사라졌다. 나는 그래도 씻을 수 있다는 안도감에 만족했다. 갈아입을 옷은 당장에는 없으니 빌려야할 거 같다. 나는 교실에 가서 연지의 사물함을 열어서 체육복을 꺼냈다. 그리고 본인의 자리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연지에게 다가갔다.
“연지야. 이것 좀 빌릴게.”
왠지 환하게 웃고 있는 연지를 보니 속에서 온갖 서러움이 올라올 거 같았다. 시간이 멈춘 지 아직 이틀밖에 안 되었는데도 서글펐다.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혼자라는 것에 외로움을 느꼈다. 나는 연지에게 조금씩 손을 뻗었다. 떨리는 손을 최대한 진정시키며 연지를 둘러쌌다. 연지를 쌔게 안았다. 울었다.
“흑... 아흑...”
참아보려 했지만 버틸 수가 없었다. 애써보려고 했었지만 그래도 혼자는 너무 힘들다. 이전의 행복했던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
“은지야? 왜 울어?!”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나는 몸을 급하게 뒤로 뺐다.
“방금... 그건 뭐야?”
목소리가 들린 건 바로 내 옆이었다. 방금까지 안고 있었던 연지의 자세가 아까와는 달랐다. 표정도 아까 보았던 해맑은 표정이 아니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설렘과 기대감을 안고 연지에게 다시 다가갔다. 연지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손을 조심히 뻗어 연지의 손을 잡아보았다. 내 손과 연지의 손이 닿은 순간, 연지의 눈동자는 움직였다.
“어? 은지야? 왜 울어! 누가 그랬어?!”
“연지야... 흑...”
“누구야! 희건이야? 아니면 수호야? 내가 이것들을 진짜!!!”
나는 한 손으로는 연지의 손을 잡은 상태로 연지를 다시 안았다. 눈물이 쏟아졌다. 안심이 되었다.
“연지야...! 연지야!!!”
“어? 으응...! 나 여기 있어. 괜찮아.”
연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을 텐데도 나를 같이 안아주면서 등을 토닥여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힘들었구나?”
“흑... 응...”
“어이구. 우리 은지 울면 안 되는데. 예쁜 얼굴 상하겠어.”
연지는 계속해서 나를 꽉 안고 울고 있는 나를 보듬어 주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저기, 은지야?”
“... 응.”
“나 다리에 쥐났어.”
연지의 시선을 따라서 나도 밑을 보니 오른쪽 무릎으로 연지의 허벅지를 누르고 있었다.
“아...! 미안해!”
나는 바로 연지에게서 떨어졌다. 연지의 시간은 다시 멈추었다.
“참, 떨어지면 안 되지?”
연지의 손을 다시 잡았다.
“어?!”
연지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눈을 비볐다.
“저... 은지야? 내 눈이 이상한가봐. 네가 계속 끊기게 보여.”
연지의 말이 무슨 말인지 나는 단번에 이해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일들을 말해야할지, 그게 아니면 휘말리게 해선 안 될지 큰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연지야, 사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