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에서 잠이 들었는데….”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자신을 살펴보았다. 옷이 그대로인 것을 보면 어제 그대로 침대로 옮겨진 것 같다. 그때, 때마침 노크소리가 들려왔고 아리아는 문을 열어 상대방을 확인했다.
“레오나르, 여긴 어디야?”
“잘 주무셨나요, 아리아 님? 이곳은 테이나르 가(家)의 저택입니다.”
“…저택?”
“일단 아침부터 드시겠습니까?”
그의 물음에 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는 고프니 말이다. 게다가 아침을 먹지 않는다면 이 이상의 부가 설명은 듣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으시죠. 세라.”
“네, 레오나르 님.”
어디선가 나온 시녀복의 여자는 그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아리아에게도 정중히 인사했다. 세라라고 불린 시녀의 손에는 편해 보이는 원피스 한 벌이 들려 있었다.
“아리아 님의 시중을 들어드리렴.”
“알겠습니다. 아리아 님, 들어가시죠.”
“시중이라니? 옷은 내가 갈아입을 수 있어.”
“불편하시다면 물러가겠습니다. 옷을 두고 나오렴.”
“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약간 긴장을 한 세라는 간의 옷걸이에 옷을 걸어두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레오나르는 다 갈아입으면 옆에 있는 줄을 당기라고 말하며 문을 닫았다. 아리아는 한쪽에 있는 전신 거울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옷은 좋지 않았다. 몇 년간 돌려 입었던 옷이니까.
반면에, 세라가 가져온 옷은 그 누가 보아도 비싸고 좋은 옷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플했지만 정교했으니 말이다. 옷을 벗고 걸어둔 옷을 빼어 입었다. 옷 안에서 긴 머리카락을 빼내고 화장대에 있는 빗을 들어 머리를 한 번 빗었다.
“줄을 당기라고 했지.”
빗을 내려놓은 아리아는 문 옆으로 다가가 줄을 쭉 잡아당겼다. 그리고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빠른 등장에 약간은 놀랐지만 그걸 외견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빠르네.”
“아리아 님께서 부르신 걸요. 가시죠, 식당까지 안내하겠습니다.”
“응.”
아리아는 입을 가리고 약간의 한숨을 내쉬며 레오나르를 따라갔다. 2층이었는지 계단을 내려갔고 약간의 긴 복도를 지나 큰 문 앞으로 도착했다. 그곳에는 집사처럼 보이는 남자가 두 명 있었는데 그와 그녀가 나타나자 꾸벅 인사를 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안은 넓었고 고전적으로 화려했다. 큰 샹들리에와 식탁에 아름답게 나열된 촛대, 나름 예쁘다고 표현할 수도 있었다. 그녀는 식탁의 상석에 앉았다. 식탁에는 이미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세팅되어 있었다.
“맛있게 드시길 바랍니다.”
늘 똑같은 스테이크였다. 아리아는 나이프와 포크를 들어 고기를 썰었다.
“……….”
외형은 비슷했지만 썰리는 느낌이 달랐다. 전의 저택에서의 스테이크는 써는 것조차 질기고 딱딱했지만 이곳의 스테이크는 써는 느낌이 부드럽고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한 입을 먹어보니 그녀의 눈이 살짝 동그래졌다.
“…맛있다. 원래 이게 이런 맛이었던가….”
“그렇습니다. 그 저택에서는 평민들도 먹지 않는 최하급의 고기를 사용했더군요. 하지만 그런 고기를 감히 아리아 님의 입에 댈 수야 있겠습니까. 이 음식들은 제국 내에서 손꼽히는 주방장이 만든 것입니다. 그런 하찮은 실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죠. 어쨌든, 입맛에 맞아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렇구나. 맛있네.”
아리아의 손과 입이 살짝 빨라졌다. 처음 맛보는 진정한 맛에 맛이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혹여 체할까 걱정이 된 레오나르는 컵에 물을 따라두었다.
그의 의도를 알아챈 아리아는 먹는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잠시 흥분했다. 음식을 다 먹고 난 후 티슈로 입가를 닦는 아리아에게 다른 것이 내어졌다.
“…이게 뭐야? 탱탱해.”
그녀는 작은 스푼으로 디저트로 나온 푸딩을 툭툭 건드렸다. 그 저택에서 그런 음식들을 먹고 자랐는데 이런 것을 먹어볼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본 적도 없었을 테고. 아리아는 한 스푼 떠먹었고 그녀는 마치 초콜릿을 처음 먹어보는(초콜릿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아이처럼 얼굴에 약간의 화색이 돌았다.
“달다….”
“다행이군요. 그럼 여기서 약간의 설명을 하겠습니다. 천천히 드시며 들어주세요. 다시 말하지만 이곳은 하크레타 제국이고 수도인 헤나에 있습니다. 이 저택은 헤나에 있고 이곳의 사용인이자 주인님은 아리아 님뿐입니다. 그리고 전의 저택과는 전혀 다른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곳의 모든 사람은 아리아 님의 사람이고, 아리아 님의 편이니까요.”
“전에도 말했다시피 상관 쓰지 않아. 인생은 어차피 혼자야. 옆에 누가 있으면 불편할 뿐이야.”
“…그런 말씀 마세요.”
“뭘.”
“크흠, 내일부터 등교를 하실 것이고, 등하교는 마차를 이용하실 겁니다. 과목은 검술, 마법, 교양, 역사로 네 가지가 있습니다. 오전 9시에 출발하셔서 1시에 끝날 예정입니다. 점심은 이 저택에서 드실 겁니다. 그리고 그 나중의 시간은 전부 아리아 님의 몫입니다.”
아리아의 시선과 손은 푸딩으로 향해 있었지만 귀만은 레오나르의 말을 잘 듣고 있었다.
“오후의 시간은 아리아 님께서 직접 결정하시면 됩니다. 수도인 헤나는 치안이 좋은 편이기는 하지만 간간히 좋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 위험한 곳만 가시지 말아주세요.”
“알았어. 내일부터 등교라니 거지?”
“네, 아리아 님께선 하헤타 아카데미에 입학하실 겁니다. 하헤타 아카데미는 귀족과 평민, 모두가 다닐 수 있는 곳이기는 하다만 암묵적인 질서가 있답니다. 하지만 아리아 님께선 대공의 작위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테이나르 대공 가문의 가주인 것이죠. 하지만, 공표가 되지 않아서 아마 다들 모르실 겁니다.”
“…대공이라고? 내가 왜? 보통 가주는…. 나는 아직 나이도 안 됐고.”
“…그것은 아직 아실 때가 아닙니다. 운명의 발자국이 한 걸음 내딛을 때, 아리아 님이 현실에 익숙해질 때 쯤.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아리아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레오나르의 눈에 아리아가 비쳐졌다. 아리아는 그를 바라보다가도 한숨을 내쉬고 스푼을 내려놓았다. 푸딩이 담겨 있던 접시는 말끔해져 있었다.
“잘 먹었어. 그리고 내 앞에서는 운명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끔찍한 단어 따위.”
“허허, 알겠습니다. 주의하도록 하죠. 그리고 대부분 돈의 관리는 제가 합니다만 원하신다면 아리아 님께 넘겨드리겠습니다.”
“아니야, 그냥 네가 관리 해줘, 돈 개념을 잘 몰라. 돈을 써 본적이 있어야지.”
“알겠습니다. 혹여 돈이 필요하시다면 제게 꼭 말씀드리길 바랍니다.”
“알았어.”
그 후로 아리아는 약 5분 동안 이 저택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꽤나 넓어 보이는 이 저택에는 본관이 크게 한 건물, 별관이 두 건물이 있다고 한다. 별관 두 곳 중에 한 곳은 시녀와 집사들이 쓰는 방이 있고 남은 한 곳은 서재나 기사들의 연습장 같은 곳에 있다고 한다.
“들어가서 쉴래.”
“알겠습니다. 아리아 님께서 가져오신 짐은 아리아 님의 방으로 올려두었습니다. 혹여 불쾌하실까봐 손을 대지 않고 그대고 두었습니다.”
“아, 그래, 고마워. 그럼 먼저 올라갈게.”
방금 내려왔던 길을 기억했기에 그 길을 따라 가니 아까 있었던 방이 나왔다. 문을 열고 가니 가운데에는 올 때 챙겨온 가방이 있었다. 보드라운 카펫에 털썩 앉아 가방을 철컥 열었다. 책을 꺼내어 책장에 고이 넣어두었다.
또 몇 벌 가져온 옷을 꺼내 옷장에 넣어두었다. 옷장은 아직 무엇이 없었기에 편하게 넣을 수 있었다. 짐을 정리하니 할 것이 없어서 그냥 창가에 기대고 있었는데 창가에는 담장이 보였다.
“어….”
그리고 새에 쪼이고 있는 애기 고양이도 보였다. 아리아는 무시하려고 했지만 발에 난 붉은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결국 한숨을 쉰 아리아가 고양이를 쳐다보았다.
“[바람은 흩날리는 꽃잎. 공기는 가벼운 힘. 너는 내게로 오라.]”
아리아는 주문을 외웠다. 마법의 주문은 보통 마법에 능숙해졌을 때 무의식적으로 깨닫게 된다. 기척에 예민한 새는 아리아가 쓴 마법을 느끼고 하늘로 날아갔고 아리아는 마법을 이용해 고양이를 자신에게로 끌어올렸다. 자신의 품에 안겨 덜덜 떠는 고양이를 보자 아직 치료마법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했다. 무언가 생각이 난 아리아는 문 옆에 있는 줄을 당겼다. 줄을 당기는 시점으로 몇 초가 지나지 않아 방금 본 시녀, 세라가 문을 두드렸다.
“부르셨어요?”
싱글벙글 웃는 세라는 참으로 실없었다.
“반창고…는 안 되겠고, 붕대랑 소독할 것 좀 줄래?”
“어머, 어디 다치셨어요?!”
“아니, 괜찮아. 그냥 그것만 가져다 줘.”
마음을 전혀 열지 않은 제 주인이 안타깝고 아쉬운 지 그녀는 얼른 구급상자를 가져왔다. 아리아는 ‘고마워.’라고만 말한 뒤 아무런 말도 듣지 않고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아리아는 구급상자를 열어 소독약과 거즈, 붕대를 꺼내었다. 솜에 소독약을 살짝 묻혀 집게를 들어 상처에 톡톡 두드렸다. 아기 고양이가 야옹아용 울어댔기에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후….”
소독을 다 끝낸 아리아는 거즈를 적당한 크기로 잘랐다. 그리고 상처 위에 올려두고 그곳을 붕대로 칭칭 감아 매듭을 지었다. 치료가 다 끝난 아기고양이는 아리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리아도 고양이를 응시했다. 다른 고양이들과는 달리 더 작고 아담했다. 크게 봐 봤자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
이 아기 고양이는 체구가 작아 자신의 무리에서 버려진 아이였다. 그렇기에 지켜줄 이가 없었고, 이로 인해 새에게 쪼이고 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책에서 읽었던 적이 있던 아리아는 대리 짐작했다.
“…너도 버려졌니?”
아리아가 고양이의 얼굴을 쓰다듬는데 고양이가 얼굴을 움직여 아리아의 손에 제 얼굴을 비볐다.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지 아주 좋아했다.
“하지만 안 돼. 나는 누군 키울 성품이 되질 않거든. 다친 거 나으면 밖으로 보낼 거야. 알았어?”
“야옹….”
그럴 리는 없겠지만 고양이는 마치 아리아의 말을 알아먹은 듯이 힘없는 말투로 말했다. 아침이고 할 일도 없기에 아리아는 길도 외울 겸 밖에 나갈 채비를 하기 위해 줄을 당겨 세라를 불렀다. 세라에게 설명을 하자 그녀는 어디선가 가벼운 외출복을 가져왔다.
아리아가 화장은 싫다고 하여 간단히 옷만 단정히 하고 머리를 반으로 묵었다.
“머리카락 긴 거, 불편하지 않으세요? 더 길면 바닥에 끌릴 것 같은데. 끝도 좀 상했고요.”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어.”
“그럼 다녀와서 조금 칠까요? 허리 정도까지요.”
“그러던지.”
“네, 그나저나 역시 아리아 님은 외모도 예쁘시니까 화장을 하지 않아도 청순하니 예쁘시네요! 왠지 음, 엄한 느낌도 나고. 근데 아리아 님 저기에 웬 아기고양이에요? 아리아 님은 아침을 드시고 방을 나가시지 않았는데….”
그걸 어떻게 다 알지?
은연중에 생각한 생각은 말로 꺼내지 않았고 그냥 대답을 해 주었다.
“새에 쪼이고 있는 걸 주웠어.”
“네? 주웠다니, 어떻게….”
“이렇게 마법으로.”
말로만 하면 받지 않을 것 같아 그녀는 간단히 예시를 들 겸 마법을 이용해 자신의 앞에 있는 빗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마법을 처음본 세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머! 아리아 님! 마법은 배우신 거예요?! 세상에!”
“책으로 배웠어.”
“독학이신건가요?! 정말 대단하세요!! 아리아 님은 재능이 있는 걸까요?!”
“몰라, 아, 세라. 너도 같이 나가자. 아직 길을 몰라.”
‘앗! 그래도 되나요?!”
세라는 처음 인상과는 많이 다른 아이였다. 처음에는 과묵하고 차분한 아이인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낙천적인 성격이었다. 활발하고 말이 많은.
“응. 혼자 다니면 길 잃어버릴 것 같기도 하고.”
“아, 알았어요! 그럼 10분, 아니 5분만 기다려주세요!! 얼른 옷 갈아입고 올게요!”
“그래.”
그녀는 환호에 젖은 얼굴로 방을 뛰쳐나갔다. 아리아는 뛰어 나가는 세라를 보다가 눈을 돌려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고양이는 침대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나갈 때는 혹시 모르니 레오나르에게 맡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라는 정말로 5분 안에 돌아왔고 아리아와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니 레오나르가 이미 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아리아를 본 레오나르는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말은 전해 들었습니다. 외출을 하신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