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규서 ↔
이웃집에서 문 수리 부탁을 받아 일을 해주곤 이웃이란 이유로 돈을 받지 못했다. 그리곤 가식적인 웃음을 떨어대며 손에 쥐어준 오렌지 주스병과 함께 집을 나섰다. 정비복이 두터운 탓인지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와도 사우나인 듯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나서 유난히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듯한 찻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오른쪽으로 길게 뻗은 인도를 따라 걸어가면 매일 지겹게 출근하는 정비소가 나온다. 목까지 잠겨져있던 지퍼를 가슴팍까지 끌어내리곤 아직 냉기가 서늘하게 올라오는 주스를 한 모금 들이켰다.
꿀꺽 -
연달아 세 번쯤 삼켰을까. 여자의 구두소리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뒤로 젖혔던 고개를 들자 지독한 향수 내음을 풍길 것만 같은 여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것도 어린 남자아이의 머리칼을 억세게 휘어잡은 채로.
또각 - 또각 -
여자의 구두소리가 쌩쌩 지나다니는 자동차들의 소리보다 더 크게 들려왔다. 아이는 고통을 참는 것인지.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멍한 얼굴로 여자 손에 끌려 질질 따라가고 있는 것 같았다. 여자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알 수 없는 서늘함을 느꼈다. 결국 용기도 없이 주스를 마저 들이키기 위해 고개를 젖혔다.
주스가 서서히 입에 흘러들어오는 순간, 눈앞이 새하얀 백지로 변했다. 그러나 곧 시야가 다시 밝아지기에 괜찮으려니 싶었지만 이내 머리를 짓이기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아,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어간다.
****
푸흡 -
젠장, 뭐야 이건? 좋아하지도 않는 오렌지 주스가 입안에 머금어져 있길래 일단 뱉고 봤다. 길거리에서 뭘 하던 거지. 대충 몸을 훑어 내리자 오른손엔 오렌지 주스병이 들려있다. 아, 더워. 덥다니? 가을인데. 다시 몸을 훑자 두툼한 정비복이 눈에 띄었다. 뭐야. 일 끝나고 가던 중이었나.
"어쩔 거예요?"
앞에서 신경질적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입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주스를 대충 닦아내며 고개를 들자 화장을 떡칠한 늙은 여자가 보인다. 그리고 그 여자의 손에 머리채를 잡힌 아이가 살려달라는 눈빛을 보내온다. 그래, 그렇구나. 너도 나랑 같은 처지구나.
순간 바람을 타고 들어와 여자의 억센 향수 냄새가 콧속을 헤집는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당장이라도 여자의 살갗을 뜯어버리고 싶었지만 마침 지나가는 행인이 있으니 참기로 했다. 억수로 운수 좋은 날이네.
"뭘요?"
여자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리곤 소리를 빽 내지른다.
"이 옷 말이에요!! 당신 때문에 엉망이 돼 버렸잖아요. 남편이랑 데이트 있는데 책임질 거예요?? "
여자의 고함이 신경을 긁어내린다. 어이, 늙은 여자. 그 이상 입을 털었다가는 남편을 저승에서 보는 수가 있어.
"이게 다 이 애새끼 때문이야. 아침에 너 때문에 늦게 나오지만 않았어도 이 길을 걸을 것도 없었는데!!! "
애새끼? 빌어먹을, 잊고 살았던 과거가 웬 여자로 인해 순식간에 자리를 찾아 돌아온다. 어쩔 거냐고 징징댔던 그 원피스, 다른 색으로 물들여주지.
아이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여자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간다. 아이가 아픈 듯 얼굴을 찡그린다. 그러나 그 뿐, 살려 달라 빌지도 울지도 않는다. 약자란 그렇게 힘없는 것이다. 별 볼일 없는 나약한 존재. 아이야. 넌 곧 나에게 고마워하게 될 거야. 평생 은혜를 갚아야할지도 모르지. 널 위해 선행을 베풀어줄게.
☆구미화☆
제가 ‘얼굴 없는 살인마’를 쫓기 시작한 건 3년 정도 된 거 같아요. 누군지 모른다고요? 그 있잖아요. 희대의 살인마.
경찰에서는 ‘얼굴 없는 살인마’의 피해자를 20명 정도로 발표했어요. 바보들.
아, 혹시 모르는 거예요? 외국 살다가 오셨나?
‘얼굴 없는 살인마’ 일명 얼.없.살은 요즘 한국에서 아주 핫이슈에요. ‘그녀’는 피해자의 얼굴을 다 갈아버려요. 증거 자체도 거의 안 남기는 것으로 유명하죠.
그런데 핫이슈가 되는 가장 큰 원인은, 그녀의 피해자들이 한결같이 천하의 나쁜 놈, 나쁜 년들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 경찰들도 수사를 열심히 못해요. 여론이 난리를 치니까!
요즘 아시죠? SNS가 왕이거든요. 논리나 이성 같은 거는 이미 물 건너갔고 감성의 시대! 킥킥킥.
제가 파악한 거로는 얼.없.살의 피해자는 서른 명도 넘는 것 같아요. 심지어, 경찰에서 파악한 20명 중에는 얼.없.살의 카피캣에 의해 당한 피해자들도 끼어 있단 말이죠. 에휴.
그런데 1년 전부터 묘한 움직임이 하나 포착이 되었거든요? 갑자기 등장한 연쇄살인마랄까?
대한민국에 이런 살인마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면 아마 기절할 걸요?
음, 어쨌든 제 목적은 경찰에 신고하는 건 아니라서 느긋하게 추적하고 있어요. 얼.없.사는 분명 아니고, 얼.없.사 카피캣도 절대 아니에요.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허술해. 난 이미 얘 이름까지 다 알아버렸다니까요? 킥킥.
더 웃긴 거 알려줘요? 얘는 아마도, 얼굴 없는 살인마를 찾고 있는 것 같아요. 뭘 하고 싶은 걸까요? 복수?
↔ 이규서 ↔
"저기요, 내 말 듣고 있어요? 어쩔 거냐고!!! "
여자를 무시하고 주위를 슥 훑었다. 쓰레기 동네라 그런지 CCTV가 두 개 뿐이다. 일단 여자를 정비소로 데려가야겠다. 거기서 해치운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정비소에서 일하는데 지갑을 두고 나와서요. 얼마 안 되는 거린데 따라오실래요? "
"...그래요? "
욕심 많은 년. 순순히 돈을 주겠다고 하자 날 보는 눈빛에 탐욕이 가득하다. 그 눈빛이 낯설지 않아 하마터면 사람을 착각할 뻔했다. 50m 쯤 되는 거리를 걸어 정비소 안으로 들어섰다. 사장은 오늘 아침 몸이 좋지 않다며 연락을 해왔기에 지금 정비소 안에는 여자와 아이, 그리고 나뿐이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탁자에 올려져있던 지갑을 든다. 그리고 바로 수리를 나갈 것처럼 다른 손엔 렌치를 든다. 그 순간,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너도 눈치가 빠르구나. 아니면 이렇게 죽이고 싶었나보지? 재밌는 놈이다.
여자는 멍청하게도 내 의도대로 넘어간 것인지 따로 묻거나 경계하는 태도는 없었다.
"30만원이면 돼요. "
만원도 안할 것 같은 싸구려 원피스. 돈만 밝히는 년이라. 남편이 꽤나 안쓰럽게 느껴진다. 아님 그 남자도 저 아이에게 관심 없는 쓰레기 일까.
30만원. 지갑에 딱 들어있는 가격이다. 순간 여자가 점쟁이인가 싶어 홱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떡하니 왼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 여자가 자꾸 명을 재촉한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들고 있던 렌치로 여자의 손을 내리쳤다.
콰득 -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릴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조용했다. 여자는 아이의 머리채를 손에서 놓고 바닥에 주저앉아 믿기지 않는 얼굴로 이리저리 뒤틀린 손을 바라본다.
분쇄골절이 된 여자의 손은 파르르 떨리다 이내 바닥으로 떨구어진다. 고통으로 인해 숨쉬기도 벅찬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숨으로 말한다.
"사, 살려주세요. “
☆구미화☆
저는 얘네들한테 번호를 붙여봤어요. 1번, 얼굴 없는 살인마. 2번, 카피캣...아니 추종자라고 하는 게 낫겠다. 그리고 3번 추격자.
1번은 역시 강적! 아직까지 누군지 잘 모르겠어요. ‘여자’라는 것만 파악했어요. 프로파일이라는 거 알아요? 그게 사람의 행동 양식이나 이런 것으로 그 사람을 특정 하는 기술인데...내가 그거 되게 잘해요. 아니, 그런데 설명하라면 못 한다니까요? 당신들이 내 머리를 못 쫓아오니까...설명을 해봐야 의미가 없어요. 아니 이건 무시하는 게 아니고. 진짜로요.
여튼, 2번은 약간 애매한데 얘도 여자. 뭐, 좀 더 조사해봐야 할 것 같아요. 나이는 좀 어린 것 같던데.
그리고 3번! 우리 이규서 양. 푸훗. 이렇게 증거를 질질 흘리고 다니는데 경찰은 잡을 생각도 못 하네요. 정말 갑갑해.
분노조절장애로 인한 살인처럼 보이는데, 막상 생활 영역에서 뒤져보니까 멀쩡하더란 말이죠. 이상하죠? 이 양반이 얼굴 없는 살인마에 대해서 막 뒤져보고 다니니까 내 입장에서는 얘를 프리하게 풀어주는 게 더 이익이 것 같아서 놔두고 있어요.
이름 알고, 주민번호 알면 그 사람에 인생을 다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킥킥.
보자, 음 친부모는 죽었네요? 와, 이거 엄마가 완전 장난 아니었네요. 아주 화려한 남성의존증 아줌마.
아, 이규서는 친부모가 죽기 전부터 복지사들의 관리를 받고 있었네요. 아동학대 관련한 신고가 여러 번 있었던 모양이에요.
이거 봐요.
<우리가 방문했을 때 어머니, 그리고 내연남과 함께 있었음. 내연남에게 지속적인 폭행을 당한 흔적 발견. 성적 학대의 흔적은 없음>
이 때 이규서네 아버지도 살아 계실 때에요. 열에 아홉은 이규서 앞에서 그녀의 엄마와 내연남이 난잡하게 놀았겠죠? 내연남은 이규서를 ‘학대’했다고 하네요. 등에 담배빵, 칼자국, 멍자국, 주사바늘 자국, 뭐 자국이라는 자국은 다 내놨네요. 여기 사진 보이죠?
그녀의 엄마는 이 사실을 알았을 거예요. 하지만 말린다거나 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죠. 이런 사람들은 전형적인 ‘나쁜 년’이라고 한답니다.
↔ 이규서 ↔
닮았다. 미치도록 닮았다. 이미 여잘 죽일 이유는 충분하다. 날 믿은 죄. 그게 이유다.
"잘 가요. "
여자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짧은 찰나에 내 눈을 마주쳐온다. 그 눈빛에 전율이 온몸을 휘감는다. 아, 아아. 그림이 곱게도 물든다. 너무 열심히 그림을 그린 건지 주변에 붉은 물감이 튀었다. 그 물감을 다량 맞은 아이가 날 보며 씨익 웃는다. 꽤 마음에 드는 놈이다.
"고마워요. "
"별로. "
아이가 탁자에 있던 휴지와 걸레로 피를 닦아낸다. 훗날 네가 내 자리에 서 있진 않을까. 짜릿한 희열이 밀려온다.
☆구미화☆
오늘도 한 건 했네요. 저렇게 순식간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도 능력이죠.
아, 운이 좋았어요. 이런 좋은 곳에 방이 나올 줄이야! 이규서를 관찰하기에 아주 훌륭한 곳이죠. 아휴, 짐정리는 또 언제 하지?
여기 모니터 보이시죠? 제가 돈이 많아요. 킥킥킥. 그래서 디지털 망원경을 딱! 살치 했죠.
아주 깔끔하게 잘 보이죠?
나도 정상은 아닌데 이규서는 더 정상이 아니에요. 평소에 사는 모습을 봤을 때는 연쇄살인범이라고 아무도 믿지 못 할 거예요. 그냥 좀 우울해 보이는 가녀린 여성?
그런데 킥킥, 스위치가 들어오니까 완전 무시무시하네요.
자! 여기 벽에 보시면 ‘3’이라고 쓰여 있는 곳이 이규서에 관한 내용들이에요. 예쁘죠? 콜라주로 만들어 붙였는데 이왕이면 예쁜 게 좋을 것 같아서 다 칼라로 뽑아서 붙였죠.
이규서가 원피스 아줌마를 죽인 이유는? 아니, 두 번째 인격이 튀어나오는 이유가 더 중요하죠. 두 번째가 나오면 늘 사람이 죽거든요.
두 번째 인격은 이규서의 친부모가 지속적으로 가한 학대의 반대급부라고 봐요. 회피를 위해서 스스로 만들어 낸 인격.
너무 크게 만들었나...내용을 찾느라 눈알이 빠질 것 같네요. 보자...찾았다. 여기 스크랩 아래쪽이요.
‘이윤’. ‘김설’. 이규서의 친부모 이름으로 둘 다 외자에요. 둘의 공통점은 ‘외자’라는 것 이외에도 ‘쓰레기’라는 것도 있어요. 하다못해 재활용도 못하는 정말 상쓰레기.
친부는 술도 안 먹은 맨 정신으로 매일같이 그녀를 때리고 짓밟은 것 같더라고요. 경찰도 가다가다 안 되니까 이제 안 가는 지경까지 갔었다죠?
엄마라는 사람은 옆에서 방관하고요. 희한하게 이윤은 김설을 때리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원래 자식을 학대하는 사람들은 아내도 학대하는 것이 일반적이거든요?
아이에게 부모란 어려움과 고난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이자 조력자로 인식을 합니다. 그런데 그래야할 부모에 의해 학대가 계속 되니까, 이규서는 피할 곳이 없었죠. 심지어 친모는 내연남‘들’까지 데리고 와서 이규서를 폭행합니다.
아마, 제가 볼 때는 엄마가 이규서를 질투한 건 아닐까 싶어요. 원래 저런 여자들은 자기가 받던 사랑이 빼앗길까봐 불안해하거든요. 특히 ‘어린여자’에 대한 질투가 무시무시하죠.
여튼 그런 학대가 계속되다 보니까 이규서의 방어기재는 ‘인격의 분열’을 선택한 것 같아요. 그 결과가 지금 저기 벌어진 살인사건이죠.
알고 보면 불쌍한 녀석이에요. 방금도 여자 손에 붙들려 있던 아이가 자기랑 비슷하다고 느꼈을 거예요. ‘투사’라고 하죠. 감정이입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그렇게 그 아이가 자라 이규서처럼 될지도 몰라요. 저 아이의 속은 꽤나 시원했을테니...
나도 저렇게 멋.있.게 살아야지!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규서는 인격이 바뀌었을 때, 신체적인 변화도 좀 있는 것 같아요. 렌치는 무거워요. 엄청. 그런 도구를 저런 속도로 휘두른다고요? 말도 안 되는 일이죠. 특히나 이규서의 저 근육량으로는 더요.
지금까지 이규서의 살인을 몇 번 목격했는데, 아니 관찰이라고 해야 하려나. 사건현장의 정리가 완전하게 끝나기 전까지는 원래 인격이 나오지 않아요. 자기 인격들끼리는 전혀 모르지만 무의식 영역에서 업무분담이 이뤄지고 있을거라고 봐요.
그런데, 살해 빈도가 점점 잦아지는 것이 좀 신경쓰여요. 원래는 몇 달에 한 번이더니 이제는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사람을 죽이네요.
↔ 이규서 ↔
또, 기억이 날아갔다. 내 앞에 서 있는 이 꼬마는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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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 길 건너 빌라 꼭대기 층.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내 본능이 경고한다. 일단은...나도 지켜본다. 일단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