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재와 헤어진 나는 서쪽으로 향했다. 첫발의 방향을 생각나게 한 그와의 우정에 감사를 느꼈지만 그에게 표시하진 않은 채 서쪽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마냥 경쾌하지 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만큼 진중하게 내딛은 걸음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아마도 ‘각오’라는 힘이겠지.
얼마쯤 걸었을까. 한 마을에 당도했다.
가로 세로로 넓게 뻗어있는 그림자의 마을, 어디나 그렇듯이 온통 검은색의 풍경이었지만, 적색토로 인해 약간은 붉으스름한 느낌이 나는 마을이었다. 마을 어귀에서 조금 들어가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나의 어깨를 툭툭 스치고 지나쳤다. 여유가 없어 보이는 마을, 그림자들은 무엇 때문에 그리 바삐 어디론가 가는 걸까? 그들이 향하는 곳은 하나같이 마을 중앙 쪽 이었다. 번잡한 상황에서 나는 그림자 들과 스치기 싫어서 이리 저리 몸을 피했다. 그러다가 뒤로 두어 발 자국 물러나던 차에, 누군가 말을 걸어 왔다.
“이봐, 좀 비켜줄래?”
뒤를 돌아보니, 기다란 머리카락을 가진 그림자의 발을 밟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몸을 비켜 세우며 그녀 에게 말했다.
“아 미안해, 거기 있는 줄 몰랐어.”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훗, 괜찮아. 근데 멍하니 그렇게 서 있으면, 다른 이들은 다 나처럼 괜찮다고 하지 않을 걸?”
어쩔 줄을 몰라 쭈뼛거리고 있는 나를 보며, 그녀는 ‘킥킥’ 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여행자 같은데, 이 마을엔 왠일이야? 오늘 이 마을에서 결혼식이 있다던데, 너도 그걸 보러 가는 거야?”
“아, 아니. 나는 지금 막 도착했어.”
“그래? 그럼 이 마을에 대해서 잘 모르겠군, 일단 가보자구 이 마을에서 볼거리라곤 별로 없으니까 말이야, 좋은 기회잖아?”
스스럼없이 계속해서 말을 거는 낮선 그림자. 쾌활한 것인지 붙임성이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여행의 시작은 세상을 관찰함으로서 나는 무엇인가를 비춰보기 위함이었으니 그림자들의 결혼을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이봐, 원래 그렇게 말 수가 없는 거야? 신부가 될 그림자가 어떤지 궁금하지 않아?”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의 제안에 따라 나서긴 했지만, 솔직히 눈앞에 펼쳐질 광경에 대해서 응시할 마음 뿐 이었지 적극적으로 호기심을 가지진 않은 터였기 때문이다.
“으, 으응. 난 단지, 우리 그림자들은 무엇 때문에 결혼을 하는가? 정도만 생각했지 신부를 궁금해 하지는 않아서.”
“재미있는 녀석이네, 그래서 결론은?”
“응? 무슨 결론?”
“우리 그림자들은 무엇 때문에 결혼한다고 생각하냐구.”
“글쎄 아직 모르겠어......”
실제로 그랬다. 그림자들이 사랑해서 결혼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그림자가 포개지고 마음을 공유한들 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우리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낳을 뿐이지, 왜 결혼을 하는가? 에 대한 대답이 될 수 는 없다고 생각했다. 서로 함께하면 좋고 해가 질 때 까지 해로하는 것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또 서로를 위함으로서 사랑을 확인한다 한 들, 해가 질 무렵 길어진 그림자가 설령 최후의 순간에 포개어져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더라도 이내 사라지고 마는 것 아닌가? 그때 그녀가 말했다.
“싱거운 녀석이네, 세상사에 일일이 이유가 필요하다면 참 피곤할거야 그치? 난 그들이 주어진 시간동안 서로를 비추고 바라볼 수 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해. 그러려고 결혼하는 걸 테고, 해가지면 우리는 모두 사라지지만, 그때까지의 시간을 그렇게 보내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라고 말하며 그녀가 피식 웃었다. 난 내 생각을 읽힌 것 같아 살짝 놀랐다.
“그럴 수도 있지만.......”
무언가 덧붙여 대답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야기하는 사이 우리는 어느새 결혼식에 당도했고 머리에 기괴한 장식을 붙인 그림자가 등장했다. 그것은 마치 동그란 그물 같기도 하고 삐죽삐죽 삐져나온 형상은 마치 톱니바퀴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자가 이 마을의 제사장이야. 이 마을은 이 마을만의 독특한 풍습이 있는데 ‘거울’이라는 것이 운명의 상대를 점지해준다고 믿고, 제사장이 그 ‘거울’에 비친 형상과 일치하는 그림자를 찾아내서 맺어준대. 결혼식은 있는데 신부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풍습이었다. 사랑하는 자들 끼리 남은 시간을 함께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결혼 아닌가? 나의 생각이 너무 단촐한 걸까? 세상에는 내 예상 밖의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는 걸까? 아니, 그보다 그 거울이라는 것이 대체 뭐길래, 결혼의 상대까지 정한다는 건지 궁금해졌다.
“거울이라구? 그게 뭔데?”
“그것은 여러 가지 형상이 나타나는 도구래. 근데 우리 그림자의 형상도 종종 나타난다나봐.”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나타난 형상이 운명의 상대라고 믿는다구? 그건 좀 우스운 걸?”
말 그대로 우스웠다. 주어진 삶에 대해서조차 그것이 왜 부여되었고 그 삶을 살아가는 주체가 뭔지 그리고 그 삶의 배경이 되는 세계가 뭔지를 알고서 살아야, 비로소 ‘스스로가 살았노라’ 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해서 떠난 여행이었기에 아무리 ‘거울’ 이라는 것이 영험하거나 신기한 것이라고 쳐도, 그런 식으로 함께할 사람을 피동에 의해서 정한다는 것은 내게는 납득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건 그렇게 생각해. 참 희한한 방식이지. 하지만 거울에 비친 형상이라니, 세상 어디에 가도 그런 현상은 볼 수 없을 걸? 신부가 누군지는 아무래도 좋지만, 거울에 나타난 형상은 궁금하지 않아? 우리 그림자는 실루엣을 가질 뿐 그 내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경우는 없잖아. 오직 이 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 진귀한 경험이라구.”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거울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검은 실루엣으로만 이뤄진 우리에게 내부를 볼 수 있는 장치라니. 그 이야기는 ‘나는 무엇인가?’ 에 골똘해 있던 나에게는 신선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럼 이 많은 그림자들이 그런 구경을 하기 위해 모인 거네? 또 여자 그림자들은 누가 시집가게 될지 모른다는 기대로 모인 거고?”
“빙고.”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이런 걸 알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말투로 봐서는 그녀 역시 이곳 그림자가 아닌 것 같은데, 주절대는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여행자라기엔 또 이상했다.
“너 이 마을의 그림자니?”
“아니야 나도 이 마을에서 얼마 머물지 않았어.”
나보다 먼저 이 마을에 도착해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이해하기 쉬웠다. 아니면 거울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서 이 마을에 찾아 온 걸까? 아무렴 어때, 어차피 의심이 꼬리를 물기도 전에 제사장의 앞에 거울이 등장했기 때문에 생각을 멈추고 그것을 구경했다. 엄숙하면서도 뭔가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손짓과 행동을 몇 가지 보이던 제사장은 곧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거울에 정말로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의 실루엣과 함께 점점 명확해지는 형상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검은색의 짙은 털이 좌우에 생기고 각각의 아래에는 하얀 구슬 위에 푸른색의 원을 그려 넣은듯한 형상이 생겼고 그 한 가운데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검은색보다도 더욱 검은 점이 찍혀 있었다. 구슬의 사이에는 길쭉한 라인이 그려졌고 그 아래에는 붉은색의 것이 마치 얇고 작은 잎사귀 두 장을 포개놓은 듯 놓여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일었다. 저것이, 저것이 우리의 얼굴에 가려져 있던 내면의 실체란 말인가. 너무나 아름다운 현상에 넋을 잃고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알고 있던 우리의 모습은 저렇게 아름다운 실체를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해 지면서, 거울에 비친 모습에 대한 동경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모습에 대해서도 상상해 보는 일이 벅찬 감흥을 자아냈다.
“봐, 저 그림자 인가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나를 흔들어 깨운 것은 그녀의 목소리 였다.
제사장의 손가락은 한 여자 그림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강풍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재빠른 속도로 그림자들 사이를 헤집고 형체를 분간하기 힘든 음영이 나타나 그 여자 그림자의 허리를 낚아챘다. 그 음영은 나타났을 때처럼 순식간에 여자 그림자를 안고 사라졌고, 축제 분위기였던 식장은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