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어느 순간]
동쪽의 설산에서는 공간의 균열이 생겼고 설산의 산지기인 흑목의 앞에 균열의 저편에서 백목은 한 아이를 흑목에게 건넸다.
“흑목, 이 아이는 이 세계에서는 있어서는 안 될 존재네. 이 아이는 죽지 않는 그림자 일세 자네가 맡아 아이가 이 설산을 벗어 나지 못하게 해주게 그리고 가능하다면 제거 해주게.”
“백목, 자네는 여전히 고지식하군, 질서에 집착한 나머지 억누를수록 더욱 악화된다는 도리를 모르고 있어.”
“흑목, 자네와 이럴 시간이 없네 부탁하네.”
“알겠네.”
공간의 균열은 이내 닫히고 아이를 건네 받은 흑목은 혼잣말을 읖조렸다.
“백목, 자네는 우주의 모든 차원을 이해하지는 못하는 군, 3차원은 2차원을 위협하는 세계가 아닐세, 이 세계의 위협을 만드는 것은 어쩌면 자네 자신일지도 몰라. 상황이 급해 이 아이를 맡긴 했지만, 이 아이를 영원히 이곳에 가두라니. 그럴 순 없네. 미안하네 백목, 하지만 아이가 밤이 되면 낮 동안의 기억을 잃게 만들겠네. 그러면 이 세계의 위협이 되지는 못 할거야.”
[설아의 회상]
‘끄응’
눈밭에 쓰러져 있던 나는 정신을 차렸다.
“깨어났는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기억해 보려고 해도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눈앞에는 유난히 검은 나무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죠?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에요? 기억이, 기억이 나질 않아요.”
“그런가? 나도 잘 모르겠네. 우연히 자넬 발견한 것 뿐이야. 쓰러져 있길래 잠시 멈추고 깨어날 때 까지 조금 기다렸네. 자네가 누군지는 나도 궁금한 걸?”
그의 질문에 잠시 집중해서 기억을 더듬어 보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이지 전혀 기억이 없었다. 나는 누구고 왜 여기에 쓰러져 있었던 거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여기 쓰러져 있던 건지도. 내 이름이 뭔지도 기억나지 않는 걸요?”
“그래? 그렇다면 내가 이름을 지어줘도 괜찮겠나? 설산에서 발견되었으니 ‘설아’는 어떤가?”
설아, 설아라 어감이 좋은 예쁜 이름이었다. 기억을 더듬으려고 할수록 혼란스럽기만 할 뿐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예쁜 이름을 듣고 나니 기억도 나지 않는 이름을 찾으려 하기 보다는 그 이름을 내 것으로 하고 싶어졌다.
“설아, 예쁜 이름이네요. 좋아요. 설아로 하겠어요. 그런데 어디로 가는 중이에요?”
왜 이곳에 쓰러져있는지 역시 기억나지 않는 나로서는 우선은 그가 가는 쪽으로 가볼 생각에 그의 갈 곳을 물었다.
“이 설산이 내 집일세. 나는 내 집을 둘러보고 있었을 뿐이지. 이곳을 떠날 생각은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네.”
기대한 것과 다른 그의 대답에 조금 실망했지만, 기억은 나지 않더라도 여기가 어딘지는 알아야 했다.
“그렇군요. 기억이 없어져서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겠는데, 여기는 어디 쯤 인가요?”
“동쪽 끝이라네, 어디론가 갈 거라면 동쪽으로는 갈 수 없으니 서쪽은 어떻겠나?”
“음 그렇군요. 예쁜 이름을 지어준 당신의 추천이니 서쪽으로 가볼게요. 고마웠어요!”
그렇게 말하고 곧 나는 서쪽으로 향했다. 한참을 가다 뒤를 잠깐 돌아보니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의아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다시 앞을 보고 걸으며 생각했다.
‘설아라 정말 예쁜 이름이네 마음에 쏙 드는걸? 언젠가 다시 돌아와서 그에게 세상 이야기를 해야겟어. 설산을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던 모양이니 무척 즐거워 할 거야.’
얼마쯤 서쪽으로 정처 없이 여행을 계속했다. 가끔씩 잃어버린 기억에 대해서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한 가지 기억을 제외하고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생각나지 않을 것 같은 기억에 매달리기 보다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기억이 없으니까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한 일 투성 이었으니까.
여러 곳을 지나며 여행을 하다 보니 설산에서의 검은 그림자가 나무그림자였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를 계속해서 바라본 의아함은 풀렸지만, 동시에 나무그림자가 말을 했다는 사실은 새로운 의아함으로 남았다. 세상은 위험한 일도, 거짓말로 사기를 치는 자들도 많았지만 신기한 일들도 많았다. 그렇게 여행을 계속하던 중, 한 무리의 그림자들이 지나치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얼마 후, 그 마을에 결혼식이 있대.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마을에서 결혼하는 신부들은 거울에 비친 모습과 일치하는 그림자로 선별한다더군.”
호기심이 생긴 나는 그들을 불러 세웠다.
“저기요, 그 거울이라는 게 뭐에요?”
“아 그것은 우리 그림자들의 내부의 모습을 비추는 기구야.”
눈이 반짝 떠지는 얘기였다. 그림자 내부를 비추다니, 꼭 보고 싶어졌다.
“그 마을이 어딘데요?”
“저쪽으로 쭉 가면 오래 걸리지 않고 도착할거야”
손을 들어 서북쪽을 가리키는 그에게 궁금한 점이 생겨 물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왜 그걸 구경하러 가지 않아요?”
“호기심 많은 아가씨로군, 우리는 이미 그 마을에서 오고 있는 중이야. 신기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우린 동쪽에서 볼 일이 있다구. 일을 제껴 두고 구경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런 신기한 일을 두고 일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초면인 사람들에게 그것도 친절하게 길을 알려준 사람들에게 꼬치꼬치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행 중에 만났던 다양한 그림자들 중에는 교활한 자들도 있었지만, 이들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내게 거짓을 말할 동기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 번 더 감사 인사를 하고 그들과 헤어진 나는 서북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림자의 내부를 비추는 거울이라니. 무척 흥미진진할 것 같아서 마음이 부풀고 발걸음이 빨라졌다.
마을에 도착한 나는 잠시 후 벌어질 ‘점지결혼식’이 어디에서 하는지 물어야 했다. 마을 어귀에서 여기 저기 구경하며 물어보니 마을의 중앙에서 할 거라고 했다. 마을 어귀로부터 중앙으로 향하는 그림자들에 섞여 ‘거울’을 보려고 가려는 데, 한 녀석이 길을 막고 있었다. 그는 그림자들을 피해 이리 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퍽이나 우스꽝스러워서 그를 잠시 쳐다봤다. 그런데 이 녀석이 뒷걸음질을 치더니 내 발을 밟는 것이 아닌가? 아프거나 할 리는 없었지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이봐 좀 비켜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