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하의 마을을 떠날 때와 달리, 이번 마을을 떠나 북으로 가는 발걸음은 조금 무거웠다.
귀영을 만난 후 퓨리스에 대한 이야기와 앞으로 내가 해야 할 것들, 익혀야 할 것들을 생각하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미로의 숲 북쪽 입구에서 나를 찾아 나선 설아를 만났을 때, 너무나 반가웠지만 마냥 좋아라 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 여행은 이제 단순한 유람이 아니라, 분명하고도 위험할 수 있는 목적을 가진 여행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녀가 내 여행의 동행이 된 것은 우연이었지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재하의 마을을 떠날 때는 헤어질 생각에 아쉬움마저 느꼈었는데, 이제는 그녀를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야 했다.
여전히 그녀와 헤어진다고 생각하면 아쉽다. 그리고 왠지 나는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과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면서도, 뭔가 그녀와의 동행이 그 의미를 찾아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느낌도 든다. 하지만, 이 일은 무척이나 위험해 질 수 있고 그녀를 곤경에 빠트릴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밀에 부친 채, 동행을 계속해도 되는 걸까? 그녀와 함께 있으면 즐겁고 그것을 그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내 질문의 의미를 찾아내는데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은 이기적인 욕심이 아닐까?
재하의 마을에서는 무엇보다도 서로 가는 방향이 일치했다. 그리고 숲에서 귀영 일행을 만났을 때, 그들을 쫓아 노인들의 마을에 당도한 것 까지도 서로의 목적이 같았다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서쪽 끝까지 도착해서, 더 이상 서쪽으로는 갈 수 없게 된 지금, 표면적으로는 그림자 장인이 얘기해 준 ‘전설속의 북쪽 산’이라는 곳에 둘 다 관심을 갖게 돼서 백목의 산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동행의 이유지만, 나는 분명히 바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그녀에게 숨기고 있으니, 이게 옳은 일일까?
한편으론, 백목의 산 까지는 그다지 위험할 것은 없으니 동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속에는 그녀와 헤어지고 싶지 않은 강한 열망이 들어 있는 것이겠지. 편하게 생각하자, 애초에 귀영과의 대화 에서도 나는 아직 퓨리스의 일에 대해 수락한 것은 아니니까. 백목의 산에서 내가 알아야 할 것을 알고 난 이후, 나부터 결정을 내린 연후에 그녀와의 동행 문제를 생각해도 늦지 않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러고 보니, 꽤 많은 생각을 하는 동안 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뭔가 화가 난걸까? 내가 말도 없이 사라진 것에 대해서 기분이 얹짢은 걸까? 이 무거운 분위기를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설아야, 근데 너 이름 되게 예쁘다.”
이름이 예쁘다니, 사실이긴 했지만, 그걸 지금 분위기 전환이라고 얘길 꺼낸 거냐?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웠다. 평생 질문에 골똘하기만 했던 것이 이 정도로 재미없는 남자를 만들었나?
“푸힛, 그래? 사실 나도 이름을 지어준 분에게 그렇게 말했어 예쁜 이름을 지어줘서 고맙다고.”
다행스럽게도 설아는 내 이야기에 고마울 정도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줬다.
“도제의 마을에선 미안했어, 네가 곤히 잠든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했지, 깨어났을 때 날 찾을 생각은 못했네, 바본가 봐.”
뒤통수를 긁적이는 내게 설아는 한 걸음 바짝 붙더니 귀에다 대고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그것 보다 그녀의 그런 행동에 쿵쾅거리는 긴장이 가슴 내부에서 일어났다. 이 현상은 대체 뭐지?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그런 사정에 상관없이 나지막히 속삭였다.
“그래 너 바보 맞아.”
이런 젠장, 이 녀석은 장난 밖에 모르는 녀석인가? 순간 쿵쾅 거렸던 가슴 내부는 펑 하니 터져버린 듯 긴장감은 싹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이런 녀석을 걱정했다니’ 하는 생각이 들자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 졌다. 한 가지 도움이 된 것은 덕분에 조금 전까지의 심각한 고민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아가 치밀었다.
“야이! 장난해? 기껏 사과했더니.”
그녀는 ‘킥킥’ 대며 재밌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화를 냈는데 상대가 그렇게 반응하면 더 화가 나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가 킥킥대자 순간 귀엽다고 느껴지면서 마음이 녹아버렸고, 결국 나도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아 미안, 근데 이제 좀 너 같다. 다행이야.”
설아는 마저 웃으며 내 옆에서 걸었다. 그 동안의 동행에서 숨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가까이에서 함께 걸었던 적은 없었다. 다른 그림자와 이름을 나누고, 그 의미를 나누고, 이렇게 나란히 걷는 다는 것은 꽤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어쩌면, 나는 무엇인가? 에 대한 해답은 나를 해부하고 나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거울이 우리 그림자 내부를 비추고 바다에서의 물이 나의 형상을 왜곡 시켰던 것처럼. 여기까지 생각하게 되자, 설아 역시 검은 그림자의 실루엣 안에 어떤 진짜 형상이 있을 거라는 상상을 했다. 물론, 내 마음대로의 상상이 사실일 리는 없지만.
“너, 뭔가 생각하고 있지? 조금 전 그 마을을 지나면서부터 어딘가 좀 달라졌어.”
눈치 빠른 그녀가, 내가 사라진 후에 뭔가 있었다는 걸 알아챘나? 그렇더라도 사실대로 말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당장 발걸음을 돌려 바다로 가보자고 할 테니까. 하지만 뭔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인 이상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으응, 우리가 만났던 마을에서 말이야, 비록 점지는 메피스토의 농간이었다고 해도 거울에 분명히 우리 그림자의 내부가 선명하게 나타났었잖아? 그걸 생각하고 있었어. 나도 그리고 너도 검은 실루엣 안에 그러한 모습이 있다는 얘기가 되니까.”
“하하, 내 모습을 상상 한 거야?”
평소 같았다면, 손사래를 치며 부정 했겠지만, 지금은 바다의 이야기를 비밀로 해야 했기에, 차라리 긍정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사실이기도 했고.
“응, 우리들의 내면의 진짜 모습 이잖아?”
“바보야. 그게 어떻게 내면의 진짜 모습이냐? 그 역시 외면의 모습이지. 내면이란, 너의 그 끝도 없는 생각과, 마음 아니야?”
“그렇네!”
정말 그랬다. 스스로에 대해 끝없이 파해쳐 왔다면서, 거울이 비춘 그림자의 내부 모습을 내면이라고 생각했다니 우스웠다. 그녀 말대로 그것은 우리의 모습의 실체가 어떤가를 나타낼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내면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가끔 그녀가 이렇게 툭 던지는 한마디에 아! 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었지. 결혼에 대해서 관념적인 말을 늘어놓는 나에게 그녀는 간단하면서도 그럴 듯 한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툭 꺼냈었어. 그러고 보면, 나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한 열쇠는 생각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한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또, 또 생각한다. 너의 그 의문들은 그렇게 중요한 거니?”
“정말 중요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우리들은 왜 태어나는 지도 모른 채 해가 질 때 까지 존재하다가 사라지잖아? 그렇다면 대체 우리는 무엇인지, 무슨 의미를 가지는 존재인지가 궁금했어. 그래서 여행을 오게 된 거고. 그걸 모른 채 사라져 버린다면, 살아온 시간들이 무엇을 위한 건지 알 수 없고 그건 너무 허무하잖아?”
“그럼 그걸 알게 되면 어쩔 셈인데?”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미로의 숲에서 들렸던 환청도 똑같은 질문을 했었지? 그리고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못했어. 그때는 그것이 미로에 빠트리려는 환각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무시하고 발걸음을 세는 데에만 집중했지만, 정작 설아에게서 같은 질문을 들으니 할 말이 없었다. 정확하게는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도. 그 답도 가지지 않고 있는 것이겠지.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나의 마음을 아는 건지 설아는 연이어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나하고는 반대구나. 난 과거의 기억이 없어서 그런지, 여기까지 오면서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이 전부 새로운 것이었어. 심지어 나를 발견했던 분이 나무그림자였기 때문에 사실 움직일 수가 없는 거였는데 내가 설산을 떠날 때 어째서 나를 계속 보고 있는지 의아했거든, 나중에 여행중에 나무그림자란 어떤 것인 줄 듣고, 그때 비로소 그분이 왜 그랬는지 알게 된거야. 내가 만일 이 세계에 대해 기억을 잃지 않고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나무그림자가 말을 하는 자체가 신기한 일 이었겠지만, 그 당시 나는 그게 당연한 것인 줄로만 알았어. 기억나지 않는 것을 기억 해 보려고도 했지만, 안 되는 그것에 매달리기보다 차라리 모른 채로 여행을 하니 모든 게 흥미롭더라구 그래서인지 나는 ‘이유나 의미를 먼저 알아야 한다.’ 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겪고 나야 비로소 그것이 뭔지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그 의미는 어떻게 남는지 새겨지는 거 아니야?”
그랬구나, 그녀와 나는 같은 여행자였지만, 여행의 목적도 방법도 반대였다. 설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녀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된 것 같아 즐겁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이야기는 일리가 있었다. 어찌 보면 ‘생각만으론 알 수 없어 행동해야 해’라고 생각한 것보다 한발 더 나아간 방식이지 않는가? 겪은 것과 주어진 것에 대해서 곱씹으며 그 이유나 의미를 생각해 봄으로서 스스로에 대해 깨닫고자 하는 방식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중요한 것은 설아처럼 ‘보고 듣고 느낀 것을 토대로’ 생각을 하던 나처럼 ‘생각을 토대로 보고 듣고 느끼던’ 그 깨달은 것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에 대해서 그동안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여전히 ‘그래서 어쩔 셈인가?’ 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설아의 이번 이야기는 그녀를 조금 달리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알 수 없는 떨림 외에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유익하고 즐거운 상대로 여겨진다’ 랄까? 여행을 함께 할수록 나타나는 새로운 그녀의 모습이 점점 좋아졌다.
“뭐야? 또 생각하는 거야? 내말에 기분 상한 거야?”
“아니! 그, 그런게 아니라 네 말을 듣고 보니 맞는 말이어서 곰곰이 생각했던 거야.”
이번엔 재빨리 대답했다. 왠지 설아는 전보다 나의 기분을 살피는 것 같았다. 고맙기도 하고 나 역시 그런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되도록 빨리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가 무엇인지 알게 되면 어쩔 것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나도 잘 몰라. 단지 그것을 모른 채 살아가고 사라지는 것이 뭔가 억울하게 느껴졌어. 그런데 네 말대로 사라지기 전까지 살아가는 동안 겪으면서 동시에 생각하고, 다가오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에서 오히려 그 대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 그런 방식이라면 그래서 어쩔 셈인가? 에 대해서도 그 때 그 때 마다 답이 생길 것 같고 말이야.”
“현우야, 네 방식도 틀린 것 같진 않아.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것 저것을 대한 다면, 그렇지 않은 것 보다 느끼는 게 다를 테니까. 나 역시 ‘난 이랬어’ 라고 말했지만, 네 말속에서 ‘그럴 수 도 있겠다’ 싶었는 걸? 그런 이유로 여행을 떠날 생각을 하다니. 조금은 부러운데?”
“고맙다 하하. 근데 난 오히려 니가 부러운걸?”
“웃으니까 좋네, 조금 전처럼 생각만 골똘해 있지 말고 이렇게 가끔 좀 웃으라구”
“그래 하하.”
그녀는 대답의 첫머리에 내 이름을 불렀다. 장난꾸러기로만 생각 했던 그녀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하자, 뭔가 편안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어지는 말들 역시 그러했다. 헌데, 내가 부럽다니? 자유분방한 그녀가 내가 부러운 이유가 뭘까? 아마도 그녀의 여행은 자발적 출발이 아니라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떠나야 했던 여행이었기에 그렇다는 건가? 생각하고 말하는 게 아니라 말하고서 생각하는 것도 꽤 괜찮았다. 그러고 보면 처음 이 여행의 시작에 어디로 떠날지를 정할 때도 말하면서 떠올랐었지. 이게 그녀가 말했던 ‘행동하면서 생각하기’ 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후, 우리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북쪽으로 걷는 사이 어느새 태양은 서쪽으로 약간 기울고 있었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라고 생각하는 사이 설아가 손가락으로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인가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