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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간의 그림자
작가 : 시냅스
작품등록일 : 201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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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간의 그림자 - 14화 나무의 정보망
작성일 : 18-11-14     조회 : 289     추천 : 1     분량 : 8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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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안내한 나무 옆에 섰다. 어깨 높이쯤에 옹이의 굴곡이 있는 그림자였다. 저곳에 손을 넣으면 되는 모양이다. 눈을 감았을 때 그 위치를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 팔을 들어 위치를 가늠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천천히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와의 일로 진탕된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수많은 마음의 소리가 나를 흔들었고 죄책감과 슬픔과 고통을 느끼게 했다. 그럴수록 ‘그녀를 위해서라도 이 일을 책임지려면 반드시 정보망에 접촉해야한다’라는 일념으로 숫자 세기에 집중했다. 오백 정도 세자 마음은 진정되기 시작했고 육백 정도를 세었을 때,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칠백 언저리에서 드디어 나는 숫자를 세고 있다는 것도 잊었고 손을 집어넣어야겠다는 생각도 없어 졌을 때, 나무로 부터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졌고 빨려 들어가듯 팔이 나무 그림자 속으로 한뼘쯤 들어갔다. ‘성공인가?’ 하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나는 이미 내 그림자와 멀어진 상태였고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백목과 설아가 내 그림자를 지켜보고 있는 장면이 점점 멀어졌다.

 

  한참을 그렇게 뒤에서 잡아끄는 듯한 힘에 의해서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동안 깜깜한 어둠 속에서 빛으로 선을 그은 것 같은 것들이 얼기설기 얽혀 있는 장면들이 빠르게 스쳐갔다. 이 정보의 망은 나무들의 집합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그 선들은 나무와 나무 사이의 교량인 모양이었다. 이 안의 공간은 평면이 아니었다. 바다에서 경험한 것 같은 깊이가 아래로 멀리 펼쳐져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위쪽으로도 그러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이것이 귀영이 말한 높이라는 것일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놀라고 있을 겨를도 없었다. 나의 신체가 되는 그림자는 지금 이 공간의 밖에서 나무에 손을 대고 있겠지. 정신만이 존재하는 이 공간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든, 그것은 놀랄 일도 아니기도 했다. 잠시 후 나를 잡아끌던 힘은 사라졌고 거대한 암흑의 공간속 중심에 나는 붕 떠 있었다. 그것이 거대한 공간인 것은 촘촘히 얽혀있는 빛의 선들이 보여주는 규모로 짐작할 수 있었다. 만일 암흑만이 있었다면, 어느 정도 크기인지 가늠조차 못했을 것이다.

 

  수많은 정보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내가 속한 세계의 정보 뿐 아니라, 다른 차원의 정보까지 수록되어 있었다. 물리, 화학, 수학, 생물학, 차원에 대한 이해, 철학, 역사, 종교, 심지어 우주의 기원에 대한 분류도 있었다. 이 수많은 지식을 한 존재의 머릿속에 집어 넣었다간 미쳐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머릿속을 비웠어도 만약 그것들을 온통 담으려는 욕심을 부렸다가는 수용의 한계를 넘을 것이 자명했다. 귀영의 말을 되새기며 시간에 관련된 분류와 빛에 대한 분류를 선택했다.

 

  선택하자마자 관련된 정보들이 눈앞에 확산되었다. 시간의 상대성부터 해서 물리적 특징 그리고 시간이라는 것은 ‘흐르는’어떤 것이 아니라는 철학적 이야기까지. 이런 식으로 익혀서는 평생을 보내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때였다.

 

  “너의 이름은 무엇인가? 무엇인가? 무엇인가?”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는 잔영을 남기며 거대한 암흑의 공간 구석까지 메아리쳤다. 미로의 숲에서처럼 웅웅대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나는 마음이 빚어낸 소리로 여기고 무시하기로 했다. 그런 것을 상대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초보적인 수식관이로군, 그런 걸로 우리를 떨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것은 네 마음에서 일어난 것들을 떨칠 때에만 효과가 있는 것이야. 실제로 있는 현상을 어쩌진 못하지.”

 

 **역주 : 수식관(數息觀)-오정삼관중의 하나로 산란한 마음을 집중시키기 위해 들숨과 날숨을 헤아리는 수행법<-원뜻

 

  작품내 수식관(數識觀)-산란한 마음을 집중시키기 위해 수를 헤아리는 수행법(그림자는 숨을 안쉬니까요^^;)

 

  눈앞에 빛의 선들이 얽혀 하나의 거대한 타원형 모양을 만든 것이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거울에서 봤던 것처럼 눈과 그 사이의 아래로 뻗은 기다란 선, 그리고 두 이파리를 포갠 듯한 기관은 말을 할 때마다 움직이고 있었다. 거울에서 봤던 모습과는 달랐던 점은 머리카락이 없고 세로로 뻗은 기다란 선은 내 쪽으로 불룩 튀어 나와 있었으며, 말할 때마다 움직이는 기관역시 그처럼 돌출되어 있었다는 점이 달랐다. 형태를 드러낸 후 부터는 목소리가 더 이상 메아리 치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악을 쓰지 않고서도 그 소리는 이곳의 모든 곳에 닿을듯한 크기였다.

 

  “현우라고 합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환각이 아니라면, 일단 대답을 해야 했다. 이곳은 나의 세계가 아니고, 그것은 적어도 나보다는 이곳을 잘 다룬다고 봐야 했다. 이곳에서 해야할 것을 가능한 빨리 끝내고 설아가 있는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조바심이 들었지만, 그를 자극해서 문제라도 생긴다면 오히려 더욱 늦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그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동시에 그를 파악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하하, 내가 누구냐고? 질문이 잘못되었다. 그것은 나라는 것이 있을 때 성립되는 이야기지. 나는 실존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이 거대한 정보망을 이룬 수많은 나무들의 의지의 집합이자 이 세계 그 자체인 셈이지. 자 다시 한번 묻겠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상대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다시 수를 세기 시작했다.

 

  “어리석은 녀석, 수식관은 통하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네 마음이 빚어낸 것이 아니다.”

 

  실존하지 않는 것이라면서, 실존하는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다니. 말이 안 되는 것이지만, 머릿속을 비우는 것으로 사라지지 않는 걸 보면 이 녀석의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름을 대야 할 텐데, 현우라는 이름을 댔을 때 그것은 나의 이름을 다시 물었다. 이유가 뭐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라도 한 번 더 말해보자.

 

  “현우라구요”

 

  “그 대답은 잘못 되었다. 그 이름은 어디로부터 온 이름이지? 그것이 지칭하는 것이 무엇인가? 현우라는 자는 어디에 있는 무엇인가? 자 한 번 더 묻겠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이것과, 아니 이자와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이곳에 대해 잘 다루는 것 같아, 이용해 볼 마음도 있었으나 이런 식이어서는 시간만 끌 뿐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겠으니까, 그만 방해하시죠. 난 할 일이 있어서 온 것이고 시간이 촉박합니다.”

 

  “시간이 촉박해? 이곳에서 시간이 흐른다고 생각하나? 아직도 스스로가 존재한다고 생각해? 이곳에 어떻게 들어 왔는지가 신기할 정도구만, 자, 마지막으로 묻겠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이번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너는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

 

  엄포까지 놓다니, 아무래도 이자를 회피해서 볼 일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엄포 따위에 흔들릴 일은 아니지만, 이 세계는 내가 모르는 세계 만에 하나 그 엄포가 사실이 되면 큰일이다.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내가 현우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아! 그러고 보니 이 질문은 내가 평생을 생각해온 ‘나란 무엇인가?’ 하고 같은 질문이잖아? 이자는 그걸 묻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때 한 번도 그림자로서의 나를 떼어놓고 생각 해 본적은 없었다. 그림자가 전부인가? 정도는 생각했었지만, 그림자 이상의 무언가가 나를 구분하고 정의하는 어떤 것이 있지 않을까? 를 생각했던 것이지 지금처럼 내 그림자는 바깥에 있고 정신만 이곳에 있는 경우는 없었지. 그가 뭐라고 했더라? 이곳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것은 다행이군, 그렇다면 천천히 생각해서 이번엔 꼭 맞춰야한다. 이곳이 시간이 흐르지는 않는다고는 하나 이곳에 갇혀 버린다면 큰일이니까.

 

  생각하자, 생각하자, 처음 그가 질문했을 때 당신은 누구냐고 물었더니 실존하는 자가 아니라고 했어. 하지만 또 마음이 빚어낸 허상이 아니라 실제 현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곳의 나무들의 의식의 집합이자 이곳 자체라고 했어. 그리고 또 뭐랬더라? 아 그래!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했다. 그것은 나라는 것이 있을 때 성립하는 질문이라고 했어. 그리고 내가 다시 이름을 말했을 때도 대답이 잘못 되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혹시, 그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이곳에서는 나라는 것이 없다는 뜻인가? 맞아, 그는 아직도 스스로가 존재한다고 생각해? 라고 했지.

 

  이곳은 몸이 없는 세계니까 나라는 개념이 없다는 뜻인가 보다. 그렇다면, 이름도 없는 거지?

 하지만 이거 웃긴 걸? 지금 그에게 대답하려고 생각하고 있는 이건 뭐란 말인가? 내가 있잖아? 하지만 일단 대답해 보자 그가 원하는 답은 그것인 거 같으니까.

 

  “내가 없는데 무슨 이름이 있단 말입니까? 질문이 잘못 되었어요.”

 

  “그렇다면 지금 말하는 너는 무엇이란 말이냐?”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대답이 틀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재차 이름이 무어냐고 묻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대로 그 대답에는 허점이 있었는데 그것을 먼저 선수 쳐서 물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에게 질문하고 있는데 당신이란 것은 없는 것이니 이건 또 어떻게 된 거죠?”

 

  그의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었던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뭐라고 대답해 봤자, 또 연거푸 물을 것이고 횟수가 반복되면 또다시 엄포를 놓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질문이지 대답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는 없었지만 ‘대답이 틀렷다고 엄포를 놓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하고 역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그것은 올바른 질문이다. 이곳에는 나라는 것은 없고 우리라는 것 밖에 없으며 실제로 분명히 있지만, 또한 없는 것이지. 이 대답이 맞느냐?”

 

  이게 무슨 수수께끼 같은 이야긴가? 스스로 대답을 하고서는 그것이 맞느냐고 되묻다니, 하지만 같은 질문이 반복되지는 않고 있다. 게다가 먼저 번 질문에 대한 대답에 대해 추궁하지 않고 새로운 질문을 냈다. 게다가 양자택일. 맞다 또는 틀리다 중에 잘 고르면 된다.

 

  “맞아요.”

 

  “아니야 아니야, 다시 한 번 묻겠다. 이 질문이 맞느냐?”

 

  이건 무슨 상황인가? 양자택일의 질문을 하고선 하나는 틀렸다고 하면 당연히 나머지지 절반의 확률에 대한 도박이었는데 이렇게 다시 물어준다면 나에게는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자신 있게 말했다.

 

  “틀려요.”

 

  “아니야 아니야, 다시 한 번 묻겠다. 이 질문이 맞느냐?”

 

  뭐라고? 아니 맞는지 틀린지의 질문을 하고서 둘 다 아니라면, 대체 무슨 대답을 하라는 건가? 설마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 맞느냐고 물었으니 둘 다라는 뜻인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요.”

 

  “아니야 아니야, 마지막으로 묻겠다. 이 질문이 맞느냐?”

 

  미칠 노릇이었다. 대답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모두 말했는데, 어쩌란 말인가? 게다가 너무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나머지 마지막으로 묻겠다는 얘길 또 했다. 이 녀석은 네 번 이상은 기회를 주지 않는가 보군, 이번에 실수하면 끝이다. 이 끝없는 문답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주도권을 쥔 녀석은 저 녀석이니 어쩔 수 없지.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했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지 않는 다는 이 공간에서 그는 재촉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있었을까? 이곳에서는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고 했으니 한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아 그래! 시간이 흐르지 않는데 어떻게 질문과 답변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는 스스로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대답하고 나서 그것이 맞는 대답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면, 그 판단 자체가 말이 안된다. 질문을 했다는 사실도 말이 안되지. 뿐만 아니라 내가 아직도 존재한다고 생각 하느냐고 물었었지? 그리고 그 자신도 우리라는 것이 있을 뿐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이곳이 곧 우리라고 했어. 그러면 누가 누구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되잖아? 하지만, 지금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그럼 뭐란 말이지? 질문에 대답을 하려고만 했지, 정말로 이 세계에 대해서 궁금해 하진 않았구나. 저 녀석은 그걸 요구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면 좀 더 생각해 보자. 잠깐! 조금 전에 여기까지의 해답이 떠오르게 된 계기가 뭐였더라? 맞아! 시간이 넉넉하니까 마음부터 가라앉히려고 머릿속을 비웠었지? 그리고 생각이 떠올랐어. 그럼 생각이 떠오르기 전에 머릿속을 비웠을 때는? 그거다!

 

  “질문이 없는데 대답이 있을 수 없고, 현우가 없는데 당신이 있을 수 없으니 이곳은 텅 빈 곳이면서 가득 찬 곳이에요. 대답이 있다면 가득 찬 가운데 있고 없다면 텅 빈 가운데겠죠.”

 

  “으하하하, 정답은 아니지만 아주 바보는 아니구나. 우리는 네가 이곳에 들어온 목적과 이유를 알고 있다. 그리고 네가 필요한 것을 가르쳐 줄 수 있지. 그러기 전에 시험을 해야 했다. 잘 들어라, 방금 말한 대로 ‘너라는 것이 있다’라고 생각 한다면 이곳의 방대한 정보를 담을 수 없다. 네게 필요한 것만 담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그릇이 작아서 담을 수 없다면 어찌해야 되겠느냐?”

 

  “그릇을 깨야죠.”

 

  이제 그의 질문놀음이 무얼 의미하는지 대충 감을 잡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그는 더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정보를 담을 수 없다면 담을 수 없는 그 ‘너’ 라는 의식을 깨버리고 정보망의 일부가 되어라. 그러면 이곳의 모든 정보를 습득 할 수 있지. 하지만 명심해라 한번 깨버린 의식은 특별한 인연이나 동기가 없이는 다시 재구성되지 않는다. 어떤가 하겠느냐?”

 

  위험한 제안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필요한 정보뿐 아니라 이곳의 모든 정보에 접촉할 수 있게 되겠지만, 그것은 곧 나의 의식이 분해되어 버린다는 이야긴데, 질문놀음에 장단을 맞춰주긴 했지만 정말로 그리 되었다간 설아와 퓨리스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바깥의 세계는 또 어떡하고? 그는 특별한 인연이나 동기가 없으면 다시 재구성되지 않는다고 했으니 바꿔 말하면 특별한 동기가 있으면 재구성이 가능하다는 소리 아닌가? 그는 내가 이곳에 온 목적과 이유를 알고 있다고 했어. 그렇다면 그걸 돕겠다는 뜻일까? 아니면 막겠다는 뜻일까? 그것을 알 방법은 없지만, 확실한 것은 동기가 분명하면 재구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차피 이곳의 정보들을 습득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수락하는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하겠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분해되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의 형체를 그리고 있던 빛의 선들이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신체가 없이 정신만 있는 상황이었으니 그것들이 나의 어딘가에 들러붙는 다는 느낌은 가능한 것이 아니었지만, 내 의식은 분명히 그것을 느꼈다. 그것들이 하나씩 들러붙을 때 마다. 엄청난 지식들이 펼쳐지기 시작했지만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나의 의식이 점차 희미해져 갔다. 공포심이 일었지만, 그것도 잠시 아무런 느낌도 인식도, 그리고 그렇다고 말하고 있는 지금의 이 의식도.......

 

  “현우야! 현우야!”

 

  희미한 의식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점점 명확하게 들리더니 이내 사라졌다. 어떻게 된 걸까? 의식이 재구성되어 있었다. 분명 마지막 의식이 사라지고 광대한 정보의 망의 일부가 되면서 나의 의식이라는 것은 사라지고 말았는데 의식이 돌아와 있었다. 의식이 없던 동안 접했던 그 수많은 지식. 그것은 정말 대단했다. 그곳에선 내가 무엇이며 이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답도 있었다. 그런데 뭐였더라? 어? 정보망에 접했을 때 받아들인 정보들이 의식에서 하나 둘씩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방대한 정보를 접하기 위해서 너를 해체해야 했듯이 이제 다시 네가 구성된 이상 그것들이 네게 전부 담겨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빠져 나가는 것이다.”

 

  눈앞에 다시 그가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망에 접촉한 것이란 말인가? 이렇게 다시 의식이 재구성되면 원점으로 돌아올 것을.

 

  “그렇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그런 경험을 한 것과 안한 것은 조금 달라. 의식과 의지를 내는 바탕에는 무의식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야. 비록 지식은 모두 빠져 나갔더라도 그 경험을 했다는 기억은 남을 것이고 자네에게 필요한 기술과 자네가 알아아 할 기억들은 남을 것이네.”

 

  조금 전의 경험은 분명 경이로운 것이긴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결과적으로 나를 도운 것이다. 하지만 분해되는 과정은 실로 두려웠으며 내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해답이 나를 잊는 것이라면 그것이 쫓을 만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죽었다 살아난 느낌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었다.

 

  “필요한 것들을 담는 것도 불가능해서 그릇을 깨야 된다더니 순 사기꾼이잖아요?”

 

  “하하하. 하지만 그릇을 깨지 않았다면 속성으로 담을 수 있었겠나?”

 

  그의 말이 옳았다. 그가 나타나기 전 까지만 해도 나는 그 방대한 정보들을 어떻게 습득해야 할지 몰랐으니까.

 

  “자 이제 선택할 시각이야. 정보망에 연결 되었을 때 아무런 느낌도 의지도 남지 않았겠지만, 이 거대한 정보망 그 자체가 되었을 것이야. 거기에는 온갖 지식과 지혜가 담겨 사실 그것에 비춰보면 각종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 따위는 사소한 것이지. 자네는 그러한 무한의 세계에 머물 텐가? 아니면 유한하고 한계가 있는 ‘나’라는 것을 가질 텐가? 대답해 보게 자네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는 괴팍했지만, 그 제안은 합리적이다 못해 친절하기 까지 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정보망에 접했을 때의 경험이 왠지 모르게 아쉬운 마음이 조금은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의해 다시 내가 되었고, 이런 나에게 있어서 답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현우입니다!”

 

  그는 아니 그것은 대답 대신 눈앞에서 해체되어 사라져갔다. 그리고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앞에서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서 온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백목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고 점점 선명해졌다고 느끼는 순간 ‘파핫’ 하고 나는 뒤로 넘어졌다. 정신이 아닌 그림자의 몸을 가지고.

 

작가의 말
 

 이번회차는 좀 많이 복잡합니다. 더 쉽게 풀었으면 좋았겠지만, 작가의 지성의 한계가 느껴지네요 ^^; 독자여러분들의 골치를 아프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과하객 18-11-14 20:23
 
* 비밀글 입니다.
  ┖
시냅스 18-11-15 10:44
 
와, 정말 감사합니다. 특히 다음작품때 작품보다 작가가 기대된다는 말슴은 깊은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 과하객님은 대단하신 분이군요. 따봉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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