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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간의 그림자
작가 : 시냅스
작품등록일 : 201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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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간의 그림자 - 19화 3차원의 현실
작성일 : 18-11-19     조회 : 271     추천 : 1     분량 : 9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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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떴다. 분명 석화 된 설아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이곳에는 나 홀로 덩그러이 놓여 있었다.

  앞서 차원을 넘어선 순영과 설아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차원의 문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지. 그렇다면 이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쓰러져 있던 주변에는 차원의 문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이곳은 다른 차원의 세계란 말인가? 그렇다면, 순영과 설아를 찾을 수가 있는 것일까? 일단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선 풍경, 낯선 바닥, 그리고 나의 눈앞에는 낮선 하늘이 있었다. 푸른색인 줄로만 알았던 천장은 베이지색의 사각형 이었다. 그림자 세계에서 하늘은 코앞에 있는 것 같았는데 이곳의 그것은 한참 떨어져 보였다. 마치 바다에서 본 이중의 발그림자가 아래가 아닌 하부였던 것처럼, 이곳의 하늘은 위가 아닌 상부에 있었다. 산의 정보망 중심에서 의식만으로 겪었던 어렴풋한 느낌이 실제로 펼쳐져 있는 이곳은 가로와 세로로만 이뤄진 세계가 아니었다. 바다에서 놀란 것 정도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내가 알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개념인 세계. 평면이 층층히 겹쳐져 높이 쌓아 올려지면 이와 같은 세계가 되는 걸까? 심지어 사방은 평면이 누워 있지 않고 꼿꼿이 서있기 까지 했다. 그리고 가로와 세로뿐 아니라 높이로 이루어진 기구들이, 기립한 평면 앞쪽에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던 시선이 발쪽으로 갔을 때, 발아래 누군가 있었다. 꼿꼿이 서있는 사방의 평면처럼 그도 내 발로부터 아래로가 아니라 상부로 꼿꼿이 서있었다. 우리 그림자들의 대지와는 완전히 다른 공간을 꿰뚫고 있는 그 처음 보는 존재에게 나는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이곳은 어디야? 그리고 내 발을 밟지 말아 줄래?”

 

 

  피곤한 하루였다. 오전에는 소설을 쓰다가, 생각이 답답해져 점심을 먹고 바다에 다녀온 탓일까? 집에 돌아와 해가 뉘엿뉘엿 지려고 서쪽에 누렇게 떠있는 것을 보기 위해, 따듯한 우유 한잔을 따라서 베란다에 가서 풍경을 감상했다. 지는 해는 끝이 아쉬운지 부풀어 있었다. 감정이 말랑말랑 해지는 걸까? 대기의 굴절률이 달라지고 빛의 산란량이 달라진 것이지, 해가 무엇이 아쉬워서 부푼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어디야? 그리고 내 발을 밟지 말아 줄래?’

 

  저녁의 감수성은 이제 환청까지 들리게 하는 건가? ‘피식’ 하고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럼 그렇지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다시 밖을 바라보려고 하는 찰나, 또다시 소리가 들렸다.

 

  “이봐, 안들려? 이곳의 존재들은 말을 할 줄 모르는 건가?”

 

  바닥이었다. 바닥에서 나는 소리. 바닥에는 나무 느낌의 장판과 카펫밖에 없는데? 그리고 베란다에서 내리 쬐는 빛이 만들어 낸 나의 그림자뿐인데?

 

  “누구냐? 어디서 말하고 있는 거야?”

 

  귀신이면 물렀거라 라고 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소름이 돋을 뻔 했다.

 

  “말할 줄 알잖아? 당신이 내 발을 밟고 있으니 좀 비켜 주시렵니까?”

 

  발을 밟고 있다고? 그렇다면 내 그림자가 내게 말을 걸고 있다고?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있을 수 없잖아? 한쪽 발을 들어 보았다. 그림자는 역시나 나와 똑같이 한쪽 발을 들었다. 봐, 환청이야. 그림자가 말을 하다니 그게 말이되? 라고 생각하는 데 또 소리가 들렸다.

 

  “기왕 비켜주는 김에 나머지 한쪽도 좀 그래 줄래?”

 

  헐, 이게 무슨 상황인가. 들어 올린 발의 그림자와 내 발은 떨어져 있었다. 그걸 두고 하는 말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두발을 들어 올릴 수는 없지 않는가? 나더러 점프를 하라는 건가? 설령 점프를 한다 해도 이곳이 우주가 아닌 이상 중력에 이끌려 나는 1초도 안 되서 착지하게 될 것이다. 아니 그보다 내가 지금 그림자의 말을 듣고 점프를 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지. 하지만 똑똑히 들려오는 소리에 반응을 해보기로 했다. 단순한 환청인지도 알아볼 겸.

 

  “두 발을 동시에 뗄 수는 없어. 그건 불가능해 바닥에서 떠 있을 수는 없거든.”

 

  “아 그래. 그럼 뭐 신경 쓰지 마. 밟고 있다고 해서 무슨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여기는 어디야?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차원의 문을 지나고 나서 쓰러진 건데, 눈을 떠보니 여기던데.”

 

  대답을 했다. 그것도 복수의 문장으로 논리를 갖춰서. 헐 그림자 따위가 말을 걸다니 그것도 대화로. 환청이라고 해도 이건 뭐, 너무 리얼했다. 게다가 차원의 문을 지나왔다고? 설정까지 하는 그림자라, 이거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환청이든 뭐든 한번 이야기를 나눠볼까? 라고 생각한 나는 이 상황이 우스웠지만, 그림자 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는 내 집이야. 손님이 바닥에 있으니 좀 그렇네, 일단 여기 앉지.”

 

  속으로 ‘킥킥’ 웃었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쇼파에 앉으니 당연히 그림자의 윗부분은 내 옆쪽으로 쇼파 위에 드리워졌다.

 

  “앗! 이곳에서는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없네, 당신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여질 수밖에 없겠어. 게다가 그림자가 이렇게 ‘ㄱ’자 모양으로 꺾일 수가 있다니. 이 세계는 정말 신비롭군. 내가 있던 이차원의 세계는 가로와 세로밖에 없었거든.”

 

  “이곳은 삼차원이야. 가로와 세로 그리고 높이가 있지.”

 

  “아, 이곳은 어디야? 에 대한 질문은 이 세계는 어디냐고 물으려고 한 것인데 집이라고 대답해서 다시 물으려고 했어. 이런 걸 삼차원이라고 하는 구나, 내가 있던 세계에서는 놀랄 일이 이곳에서는 당연시 되는 걸 보니 이 순간만큼은 여행을 떠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 난 평생 내가 속한 세계가 전부가 아닐 거라고 믿고 ‘우리 그림자들이란 대체 그 본질이 무엇일까? 또 나는 무슨 의미를 가진 존재 일까?’를 생각하고 그것을 찾기 위해 여행 했거든.”

 

  재밌다고만 여겼던 나는 그의 그 이야기를 듣고서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이것이 허상이든 실상이든 그것이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이 녀석이 하고 있는 이야기는 평생 내가 생각하던 의문이 아닌가? 시공간의 물리학에 대한 서적을 읽거나, 종교, 철학서를 읽을 때 마다 나는 이 세계가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리고 사차원 이상의 상위 차원에 대한 이해를 정확히 할 수 있다면, 아니 직접 경험할 수 있다면, 하는 동경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현시대의 과학적 방법으로는 불가능 한 것이라고 포기하고 소설가가 되었다. 헌데, 이 녀석은 그 질문의 끈을 놓지 않고 행동에 나섰다는 점에서 순간 조금은 부끄러워졌다. 이 말도 안 되는 현상에 너무 깊이 감정이 개입하는 것은 정신이상자로 가는 지름길이겠지만, 환청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구분해 두더라도 그의 이야기는 나에게 깊은 메시지를 준 것만은 틀림없었다. 나는 그가 떠나온 곳에서 그가 어떤 것을 겪었는지 그리고 그의 말을 믿는다는 가정 하에 차원은 어떻게 넘어오게 된 것인지 궁금해졌다.

 

  “너의 여행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어?”

 

  “좋아, 하지만 조금 길어.”

 

  그는 자신이 처음 여행을 시작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와 그가 느꼇던 감정과 생각들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간혹, 그는 높이라는 개념이 없던 세계에서 놀랐었던 장면들을 얘기할 때, 그 스스로도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곁들였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빠져 들었고, 나 역시 중간 중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퓨리스와 설아의 마지막을 들었을 때에는 안타까움 마저 일었다.

 

  “그렇게 해서 이쪽 세계의 차원의 문을 파괴한 후 쓰러졌던 거야. 그리고 눈을 떠보니 네 집이었던 거지. 그런데 혹시 나 말고 다른 그림자들을 보지 못했어?”

 

  그는 설아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들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세계로 넘어온 이상 그림자가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는 없겠지. 아마도 사라졌거나,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의 그림자로 귀속되었을 것이다. 이런 추측을 그에게 말하자 그는 잠시 동안 슬픔에 쌓여 말을 잇지 못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처연함을 삼킨 채 말하는 듯 단어마다 쉬어가며 말을 이었다.

 

  “내가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걸 보면 이 세계에서 우리는 너희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 보구나. 설아나 순영도 마찬가지겠지. 하아...... 나와 연관이 있는 넌 혹시 이름이 있어?”

 

  그가 내게 물었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그가 현우라는 이름을 가진 그림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이름은 나의 이름이다. 하지만 그가 혼란을 겪을까봐 이야기가 끝날 때 까지 말하지 않았던 것은 그의 마음과 여정이 덧없는 것으로 느껴지게 될까봐 굳이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내게 지금 이름을 묻고 있다. 그와 나의 이름이 같은 것을 듣게 되면 그의 마음은 어떻게 될까? 나는 그를 위해서 거짓 이름을 말해야 할까? 하지만, 이 녀석은 모든 것을 걸고 자기가 속한 세계와 스스로에 대한 본질을 알기 위해 여기까지 온 녀석이다. 그렇다면, 충격을 받더라도 사실을 이야기 해 주는 편이 옳다고 생각했다.

 

  “나의 이름도 현우야.”

 

  그는 예상대로 놀랐는지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군, 그래서 우리 그림자 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부여 되었던 거였어. 그렇다면, 삼차원의 존재가 본체가 되는 거고 우리는 그 투영에 지나지 않는 존재였던 거군. 이곳에서 나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말 뿐인 것도 이제야 납득이 가. 하지만, 한편으론 다행이기도 하다. 적어도 설아 역시 그대로 석화된 것으로 끝나지 않고 본체에 귀속되었을 테니까.”

 

  어렵게 뗀 첫마디가 너무나 측은했다. 이것이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환각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여정과 탐구가 무의미한 것으로 결론지어지는 것은 싫었다. 뭐라도 말을 해주고 싶었던 나는 이렇게 말했다.

 

  “현우야, 우리의 이름이 같고 이 세계 에서 그림자는 본체에 예속되어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네가 겪어온 일은 내가 겪은 것과는 달라.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네가 그렇게 한 가지를 알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때, 오늘 내가 한 것을 돌아보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까지 할 수 있어. 이렇게 의미가 다른 시간을 보냈는데, 단지 이 몸이 삼차원의 본체이고 너의 몸이 그 투영물로 이뤄 졌다고 해서, 그리고 ‘이름이 같다는 것’ 만으로는 네가 겪고 생각해 온 것들의 의미가 퇴색하지 않는 다고 생각해.

 

  더구나 이 세계는 너의 세계 보다 훨씬 복잡하게 구성 되어 있지만, 반드시 복잡 하다고 해서 너의 세계 보다 낫다고 할 수도 없을 뿐 더러, 네가 그랬듯 우리 역시 더 높은 차원의 투영물일 수도 있잖아? 그렇게 본다면 내가 살아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뿐일까? 이곳은 너의 세계와 달리 높이라는 개념이 있을 뿐, 우리 역시 모든 것을 자유 의지대로 하는 것도 아니야. 아까도 보았듯이 땅에서 두발을 동시에 뗄 수도 없고 뜻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자주 있지. 그런 부분이 어떤 상위 차원의 본체의 의지에 예속되어서 벌어지는 일이라 해도, 스스로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고 탐구하는 일은 삼차원 세계에 사는 ‘사람들’ 에게도 필요 하고, 그것은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의미를 주는 게 아닐까?

 

  우리 세계와 너의 세계의 시간은 다르지만, 우리 역시 불멸의 존재가 아니며 제약 없는 존재가 아니야. 어떤 의미 에서는 네가 부러울 정도인 걸? 나 역시 평생을 너와 같은 의문을 품었지만, 너처럼 그 답을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모든 것을 걸어본 적은 없거든. 너의 세계와 달리 이 세계는 먹지 않으면, 존재를 유지할 수 없고 경쟁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서 훨씬 복잡하고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은 나머지 대부분 그런 생활에 매몰되어 살아가. 그런 우리들 보다 너의 삶이 어떻게 보면, 훨씬 값지다고 본다.”

 

  그는 오래 생각했다. 우유 잔의 우유가 식어갈 때 까지. 그리고 나서야 그는 천천히 내게 말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내 본체가 너라고 해서 나의 여정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라. 그래 그럴 수 있겠어. 내 본체가 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너 역시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존재라서 기쁘다. 이 세계에 대해서 잘 몰랐었기에 너 역시 유한한 존재로서 그 위 차원의 투영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은 못했다. 나에게는 신세계지만, 너에게는 너를 가두고 있는 어떤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구나. 그래, 나는 한 순간은 세계의 본질에 대해서 알았다고 생각해 버렸지만, 이 세계가 끝이 아니라면 너나 나나 아직 본질에 대한 질문에 해답을 얻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누가 본체이고 누가 그림자인지는 현상의 문제지 근본적인 의미와는 별개인거 같네. 그런데 이 세계에는 태양이 없니? 내가 알던 파란 하늘과 달리 하늘도 베이지색이고......”

 

  그랬다, 그는 아직 내 거실밖에 보질 못했으니까. 그에게 실제 세상을 보여 줘야 했다. 그가 이 세계에 대해서 최대한 느낄 수 있게 도와야 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여정이 끝나기 전에 가능한 모든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것은 하늘이 아니야 여긴 내 집안이고, 위에 있는 것은 천장이라고 하는 집의 구조물이야. 바깥의 진짜 하늘과 세상을 보여줄게, 물론 그곳에는 태양도 있어.”

 

  나는 일어서서 베란다 문을 열고 난간에 섰다. 누렇고 붉은 태양이 거의 저물고 있었다. 해가 떨어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정말 아름답구나. 높이가 있는 세계에서 바라보는 하늘과 태양은 색만 같을 뿐 내가 알고 있던 하늘과 태양과는 완전히 다르네. 훨씬 멀게 느껴져.”

 

  그가 그렇게 처음 만나는 삼차원의 세상을 대하고 그 아름다움을 말했을 때, 무언가 북받쳐 올라올 것만 같았다. 그 때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베란다의 화분을 스치고 화분들은 바르르 떨기 시작했다. 화분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본 그는 유심히 그것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지금 바람이 불고 있어?”

 

  “응 바람이 불고 있어”

 

  “그렇구나, 삼차원의 세계에 왔지만, 바람은 느낄 수가 없네. 하지만 저 화분의 그림자가 움직일 때 그 본체가 되는 화분도 함께 움직이는 걸 보니 너는 바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바람의 느낌은 어때?”

 

  “응 약하게 불 땐 시원하지만, 강하게 불 땐 차갑기도 하고 저 화분을 부러트리기도 해”

 

  “차갑다라,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시원하다는 건 마음이 후련한 것과 비슷한 느낌인 모양이구나, 강하게 불면 나뭇가지가 부러진다는 얘길 들으니 부러진 나뭇가지의 그림자로 무언가를 만들 던 이가 생각나네.”

 

  쓸쓸함. 누군가와 헤어지거나 무엇을 상실했을 때의 쓸쓸함보다 더한 쓸쓸함이 느껴졌다. 해가 넘어가려고 반쯤 걸린 하늘은 지금의 쓸쓸함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곧 지려고 하네, 이제 나의 시간이 끝나 간다.”

 

  침묵을 깨고 그는 담담히 말했다. 아차, 그림자는 빛이 없으면 사라지지. 하지만 그는 시간과 빛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는데? 아, 이 삼차원의 세계로 넘어오면서 그는 모든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본체인 내가 있기 때문에 몸 하나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지. 하지만, 그를 이대로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보여 주고 싶은 것이 많은데, 이렇게 끝나버리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잠깐 기다려, 전등을 켤게”

 

  “전등? 그게 뭐야?”

 

  “응 태양이 사라지면 빛이 없어지지만, 전등을 켜면 빛이 없는 시간에도 빛이 생겨. 사람이 만든 빛이지, 빛이 있으면 너도 사라지지 않을 거야. 아침이 와서 해가 뜰 때까지 켜둘게.”

 

  처음에 그를 만났을 땐, 제정신이 아닌 현상이라고 부정했지만, 이제는 내가 그를 붙잡고 싶었다. 이것이 꿈이나 망상이라 해도, 그래서 언젠가 깨어나야 할 어떤 것이라고 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 와의 대화는 나에게 살면서 꼭 생각해야 할 어떤 것을 되새겼고, 그런 그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눠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메피스토와 퓨리스가 꿈꿨던 것이 어떤 것 이었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네. 미안하지만, 그 ‘전등’이라는 것 오늘은 켜지 말아줄 수 있겠어? 저 석양을 넘어서는 태양과 함께, 나는 나의 시간이 끝나는 것을 받아 들이고 싶어.”

 

  안될 일이었다. 그를 이렇게 보내서는 내게 남겨진 것이 너무 무겁다. 이기적인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를 설득해야만 했다.

 

  “넌 평생을 주어진 세상 밖의 어떤 것을 생각하고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해 왔잖아. 지금까지 네가 본 이 세계는 아주 일부분에 불과해, 시간을 연장하면 내일이 돼서, 아니 오늘 밤이라도 빛이 찬란한 도시의 야경을 보여줄 게 어째서 여기서 끝내려는 거야?”

 

  “아니야, 나는 이차원의 세계가 다가 아니며, 우리 그림자들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한 채 사라지기 싫어서 여행을 했어. 그리고 너를 만나서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그 안에서 존재 했던 12시간 속 그림자들이 가지는 생애의 본질이 무엇 인지도 이젠 알겠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하는 동안 그 부여 받은 시간과 스스로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기에 최후의 순간까지 순순히 응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가며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밝혀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하지만 그렇게 살아온 나의 자연적인 시간은 이제 다했고, 세계가 2차원만이 아니며, 그림자는 그림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답을 찾은 지금은, 나의 최후의 시간을 기쁘게 받아들 수 있고 그러고 싶네. 이 그림자가 사라진다고 해서 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새로 해가 뜨면, 너의 그림자는 다시 이차원에 드리워져 12시간을 살아가게 될 테니까 두렵지 않아. 그 의미를 발굴하기 위해 살아온 내 삶에 이제는 한 점의 후회도 없어, 그리고 최후를 맞이하는 데 있어서 당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어서 감사할 따름이야. 물론 네게도. 그러니 아쉬워 할 것 없어. 그렇게 해줘.”

 

  그가 그렇게 말하는 사이 태양은 완전히 넘어갔다. 하지만 어수룩한 저녁은 아직 그를 존재하게 하고 있었다. 나는 불을 켜고 싶었지만, 그의 마지막 부탁을 외면하고 나의 이기심으로 그를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점점 밤이 다가오고, 그는 천천히 그렇게 희미해지더니 이내 사라져 갔다. 멍해진 머릿속은 곧 복잡해졌다.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 세계는 무엇인가?’ 이 질문으로부터 도망친 적이 없다고 생각 해 왔지만, 그의 12시간의 일생을 반추해 보면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았다. 이대로 라면 그 감정에 매몰되어 시간이 정지해 버릴 것 만 같았다. 그런 감정들을 주체할 수 없을 것만 같아 생각을 멈추고 어두워진 세상을 뒤로 한 채 캄캄한 거실을 조심스럽게 지나 침대에 몸을 뉘었다.

 

작가의 말
 

 이제 한 화가 남았네요. 에필로그격인 종막이 있지만, 이틀에 걸쳐서 연재하지 않고 내일 마지막화와 종막을 함께 올리겠습니다. 항상 사랑해주시는 독자여러분께 감사의 말슴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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