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다.
어느 아침과 다름없는 아침. 부스스한 머리를 쓸며 반쯤 이불을 걷어 낸 다리 한쪽을 멍하니 바라본다. 꿈 이었을까?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다가가 플라스틱 병에 담긴 물을 크게 한 모금 들이킨다. 싱크대 사이의 작은 채광창으로 들어온 아침 햇빛이 등을 비추며 발밑에 기다란 그림자를 만든다.
그림자. 그것은 분명 자유 의지를 갖지 못한 나의 이차원의 피사체에 불과했다. 어제의 그와는 분명히 다른 그저 그림자.
“현우야.”
나는 나의 그림자에게 말을 걸어 보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래, 같은 그림자이지만, 어제의 그 일이 실제 라고 해도 이 그림자는 다르지. 그는 이제 없다.
아침식사를 간단히 마쳤다. 장자의 ‘나비의 꿈’이 떠올랐다. 그러자 ‘피식’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새어 나왔다. 설거지를 마치고 서재에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컴퓨터가 켜지는 동안 CD플레이어의 재생 버튼을 누르고 앨범의 맨 마지막 곡을 틀었다 컴퓨터가 켜지는 데는 한 곡이면 충분하니까. [N.EX.T] 라는 그룹의 두 번 째 앨범이 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상태창에는 그룹명과 곡의 제목 [The Ocean] 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의자를 약간 기울여 상체를 기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귓가에는 노래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제 저녁의 일들이 다시 떠올랐다. 그림자, 2차원의 세계,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찾아 덧없이 사라지고 싶지 않았던 현우와 주어진 영생 속에서 사라지고 싶어 했던 백목과 귀영, 그리고 그 세계를 넘어 보다 근본적인 존재로 탈바꿈 하고 싶어 했던 메피스토. 같은 상황에서 가정에 집중했던 퓨리스 그리고 원래의 세계를 선택했던 현우.
우리들은 어떠한가? 이세계의 사람들은 ‘생활고’ 라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탈피하고 싶어 한다. 의료를 비롯한 기술의 발달과 과학, 문명, 경제 그리고 종교, 철학, 질서 등의 이데아들조차 사라져 가는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영원한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하는 목표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자손을 남기거나 사후를 그림으로서, 안식과 평안을 얻고자 하는 존재의 몸부림은 어쩌면 그의 말처럼 최후의 순간까지 순순히 응하지 않고 존재하는 순간들을 사랑하여 열심히 부여잡아야 한다는 모든 존재의 자연스러운 과정 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최선을 다하고 마지막 순간이 되었을 때, 사랑했던 것들에 집착하지 않고 비로소 주어진 시간의 끝을 받아들일 자격이 생기는 것이 ‘진인사대천명’의 도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 사이 컴퓨터가 켜지고 문서 프로그램을 연 나는 소설의 제목을 적었다. ‘12시간의 그림자’라고. 노래가 끝날 무렵 음악 대신 타이핑하는 소리가 딱따구리처럼 시작됐다.
한 달 정도 흘렀을까? 나는 완성된 초고를 들고 집을 나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문이 닫히려는 순간 누군가 손을 내밀어 문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감사합니다.”
긴 흑발에 파란 눈을 가진 아가씨가 한쪽 겨드랑이에 책과 서류들을 끼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복도식의 아파트 같은 층에 몇 호인지 모를 곳에 사는 이웃인 모양이었다.
“한국말을 잘 하시네요”
“아 네, 어머니가 한국인이라서.”
간단한 대화가 마쳐짐과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소설가라는 직업병 때문일까? 그녀의 겨드랑이에 끼워져 있던 책 제목을 봤다. 괴테의 파우스트였다.
“파우스트 좋아하시나 봐요?”
“네, 그쪽은 글 쓰시는 분인가 봐요? 원고 같은데. 제목이 뭐죠?”
“12시간의 그림자입니다.”
말을 마치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그녀는 간단한 인사와 함께 한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그녀와 반대 방향의 주차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