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의 종막
차원의 문이 무너져 내리고 문에 이르지 못한 귀영은 문이 파괴되면서 소멸했다. 차원을 건너진 못했으나, 어쩌면 그녀의 소원이 이뤄진 지도 모르겠다. 귀영의 수하들은 몸을 돌려 돌아갔고, 나 역시 이곳에서 더는 할 일이 없었다. 도시를 빠져나오자 차원의 문 부근에서부터 도시는 점점 무너져 내렸다. 밤에도 빛으로 물들어 그림자들에게 있어 영생의 천국과도 같은 도시는 그렇게 사라져갔다. 재하가 지키고 있는 산으로 걸어가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과연 옳은 일을 해왔 던 것일까?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옳은 일 같은 건 없겠지. 저마다의 정의를 옳다고 여기고 살아갈 뿐. 하지만, 스스로의 정의에 지나치게 집착할 때, 그것은 씻을 수 없는 파국을 빚어낼 수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기억을 저장하고 다시 꺼냄으로서 산지기의 역할을 이어가는 것의 허점도 알았다. 어쩌면, 존재란 것은 살아가면서 겪은 상호작용 사이에서 서로에게 의미가 된 기억들이 그 존재를 규정할 때, 기억이 곧 존재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 같다. 나는 오래전 세계에서부터 이번 세계까지 산을 맡아오면서 그 영원한 삶을 끝내고 싶어 계승자를 찾았지만, 어쩌면 영원한 삶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실히 산을 맡아주었던 나의 이번 세계의 제자 재하를 만나 이런 생각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사과했으며, 해가 지기 전에 마을로 돌아가 이현과 함께 하라고 했다. 그는 나의 달라진 태도에 크게 감격 하고서 마을로 돌아갔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산의 정보망에서 나의 기억을 전부 지우고 노을을 바라봤다. 이제 곧 이번 세계도 끝나겠지. 바닥에 글귀를 하나 적었다.
구름이 가려도 달은 항상 그 달이요
한 세상 끝나도 다른 세상 비추도다.
세상에 많은 유무정의 존재가 있으나
이름만 다를 뿐 그 의미 다르지 않구나.
멸과 불멸에 무슨 집착을 하겠느냐
덧 없는 삶에서 소중한 것은 지금이네
충재의 종막
해가 저물고 있었다. 현우가 길을 나서던 순간이 생각난다. 그는 꼭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곧 나의 시간이 다해간다. 평생을 눈앞의 행복을 소중히 하며 주변을 아끼고 살았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에 그가 가졌던 의문이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의문을 풀었을까? 내가 사라지는 때, 그도 어디선가 사라져 가겠지. 만약 그가 돌아 왔다면, 내게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후훗, 그라면 아마 의문을 풀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겠지.
‘충재야, 진실은 눈앞에 있더라. 어디선가 찾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볼 수 있느냐의 문제였어. 네가 옳았다.’ 라고.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