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나노로봇>
염호권을 포함해 다른 따까리들 전부 실컷 쥐어 패 놓은 다음에 염호권을 불러보았다.
“염호권.”
나는 바닥에 엎어진 염호권을 발로 툭툭 쳤다.
“야, 염호권!”
“…………”
하지만 염호권은 바닥에 얼굴을 박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손가락이 약간 까닥였다.
“이 새끼야 내가 무슨 곰이냐!”
나는 그렇게 말하며 염호권의 배를 걷어찼다.
“꾸헥!?”
염호권이 내게 맞자마자 헛기침을 하며 바로 상체를 들었다.
“콜록, 콜록!”
“새끼가… 어디서 죽은 척을 하고 있어?”
나는 다시 으름장을 놓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히, 히익!?”
염호권이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 찍은 채로 뒷걸음을 쳤다.
유나한테 된통 맞고, 나한테도 맞아서 그런지 얼굴이 장난이 아니었다.
“뒤지려면 말은 다 해주고 뒤져야지, 안 그래?”
“나, 난 아무 것도 몰라…!”
염호권이 몸서리치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직 아무 것도 안 물어봤는데 왜 혼자 난리야. 뭐 찔리는 거라도 있냐?”
“히이이익!?”
내가 다시 한 번 더 주먹을 쥐어 올리자 염호권이 부들부들 떨었다.
이게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를 쥐어 패놓았던 염호권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째졌다.
아이쿠, 그렇다고 괴롭혀선 안 되지.
진정하자, 진정해.
“아이, 왜 그러시나. 난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건데.”
나는 마치 아이를 어르듯이 활짝 미소 지어보았다.
“히기이이익!!”
염호권이 한 층 더 뒤로 물러나며 더욱 공포에 떨었다.
무슨 엉덩이로 걷는 줄 알았다.
뭐야. 사람이 기껏 친절하게 대해줬는데.
“빨리 불기나 해. 왜 나를 끌고 왔는지. 그리고 뭘 하려 했는지도.”
나는 이내 장난을 그만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러니까 그게…”
“어. 말해봐.”
“그래, 그 녀석 때문이었어! 원래 맨날 돈을 갖다 바치는 녀석이 있었는데, 얘가 휴교를 틈타 아예 잠적해 버려가지고… 그, 그래서 똑같이 무능력자인 너한테…”
“갖다 바치긴 무슨 니가 뺏은 거겠지.”
나는 주먹을 확 하고 위로 올리며 때리는 시늉을 했다.
“힉, 어, 어쨌든 이제 걔가 없으니 그래서 너한테 간 거야…”
“오호라, 즉 요약하자면 그동안 돈 뺏고 때리던 애가 사라졌으니까, 그 대체품을 찾다가 결국 나한테 왔다?”
“어, 어. 그렇지.”
나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럼 유나는 뭔데.”
“유, 유나?”
“니가 나한테 유나 사진 보여주면서 협박했잖아.”
“그, 그건 말 그대로 협박이었는데. 너를 따라오게 하기 위해서…”
염호권은 여전히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하… 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어, 어? 마, 말 되지. 왜 안 돼.”
염호권이 말을 더듬었다.
“뭣도 없는 니들이 아무 것도 없이 그냥 유나를 건드릴 리가 없잖아. 있는 거지?”
“뭐, 뭐가.”
“뒷배 말이야 뒷배.”
없을 리가 없었다.
누구보다도 약육강식에 따라 살아가는 녀석들이 바로 염호권과 같은 날라리들이다..
그러나 유나에게 그렇게 쳐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유나 이야기를 꺼냈다는 건 분명 뒤가 있다는 뜻이었다.
“니 친족이 됐든 뭐가 됐든, 니가 형님 형님 하고 부르면서 빨아대는 백이 있을 거 아니야.”
“윽… 그, 그런 건 없―”
나는 염호권의 멱살을 잡고 그대로 박치기를 날렸다.
염호권이 자기 이마를 쥐어 잡고 아파했다.
그런 염호권의 멱살을 더욱 쥐어 올리며 나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야. 말로 할 때 제대로 말해라. 안 그러면 나 퇴학당할 거 각오하고 너 죽기 직전까지 팬다.”
x x x
염호권의 말은 이러했다.
염호권 패거리가 따르는 어떤 형님이 있는데, 그가 그들을 대신해서 유나에게 복수를 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그 형님이 유나를 자기 아지트까지 데려오라고 했는데 자신보다 훨씬 강한 유나를 억지로 데려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내길, 자신들을 죽이 되도록 팰 정도로 나를 끔찍이 생각하는 유나의 마음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즉, 나를 인질로 삼아 유나를 끌어들이려 했던 것.
나는 염호권의 설명을 끝까지 듣고 입을 열었다.
“흠… 일이 너무 큰데. 능제관에 신고나 해야겠다.”
“그, 그건 안 돼! 나, 나중에 도대체 무슨 짓을 당할지…”
“그건 너네 사정이고.”
“제, 제발! 아…!”
염호권이 불현듯 뭔가 떠오른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 너도 이대로 경찰서 가긴 좀 그럴 거 아니야? 지, 지금 우리 상태를 보면…”
“너희가 먼저 끌고 나와 놓고 뭔 소리야.”
“그렇지만 지금 우리 상황을 보면 누가 봐도 네가 가해자일걸. 여긴 cctv도 없어!”
“새끼가 뭔 말 하나 봤더니 나한테 누명을 씌우겠다고? 너 덜 맞았구나?”
나는 표정을 확 일그리며 다시 한 번 더 주먹을 뒤로 당겼다.
“히긱!? 더, 더 때려봐! 우린 다 너가 잘못했다고만 진술할 테니까…!”
염호권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꽉 감았다.
이전까지 잔뜩 비굴한 모습을 보여 놓고 마지막에 가서 갑자기 뚝심을 발휘하는 녀석이었다.
하, 이건 좀 골치 아픈데.
그렇지만 이대로 유나에게 피해가 가도록 놔둘 수도 없고.
결국 나는 작전을 변경했다.
“야. 니 핸드폰 줘봐.”
“어, 어? 가, 갑자기 왜…”
“걱정마. 신고는 안 해.”
“어, 응…”
“비밀번호 풀고.”
나는 그렇게 염호권의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나서 전화번호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야. 여기 ‘강호권 형님’이라고 돼 있는 게, 모든 원흉 맞지?”
“그, 그런데?”
“좋아.”
나는 바로 전화 버튼을 눌렀다.
발신 신호음이 너덧 번 들리자 딸깍하고 연결되는 소리가 들렸다.
[호권이냐?]
이미 변성기가 지난 것 같은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강호권의 물음에 역으로 물었다.
“그건 너고. 니가 강호권이라는 새끼 맞지?”
[…누구야.]
“알 거 없고. 지금 너 있는 곳 불어.”
[염호권! 지금 이 녀석 뭐야!]
강호권이 수화기 너머의 염호권에게도 들리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혀, 형님! 사, 살려주세요! 지금 이 녀석이… ―꾸헉!”
나는 물 만난 듯 멋대로 외쳐대는 염호권의 배를 그리 강하지 않게 찼다.
“전화하는데 갑자기 끼어들고 지랄이여…”
그리고 핸드폰을 다시 귀에 댔다.
“지금 니 따까리들 내가 죄다 족쳐놨거든? 너 있는 곳 안 불면 지금 얘네들 반병신 만들 테니까, 빨리 이실직고해라.”
[뭐? 이 새끼들이 여자 하나 데려오라 했더니, 왜 또 얻어터지고 있어…!]
강호권이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는지 크게 소리쳤다.
“아씨, 고막 나가겠네. 나랑 대화를 하라고, 나랑.”
[너… 뭐하는 녀석이냐.]
강호권이 아까 했던 질문을 재차했다.
“그러니까 알 거 없다고.”
[그 여자랑 관계있는 녀석이지?]
수화기 너머에서 강호권이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는 게 여기까지 느껴졌다.
나는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알 거 없다니까, 아저씨.”
[그거 잘 됐네! 너, 지금 우리 애들 데리고 내가 있는 곳으로 와라. 위치는 걔네들이 알 테니.]
강호권이 마치 자기 부하에게 하듯이 내게 명령했다.
나는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오란다고 가겠냐.”
[와야 될 걸? 니가 그 여자의 뭔지는 모르겠지만, 너 때문이다. 무슨 짓을 쓰든 그 여자의 인생을 망쳐주지. 덤으로 너도 마찬가지다.]
“능제관에 신고할 건데? 참고로 지금 이거 다 녹음되고 있다.”
참고로 거짓말이다.
단순한 위협이었다.
[하하! 뭐 마음대로 해. 그딴 하잖은 수작이 먹히는지, 아니면 니 잔수작이 먹히는지, 한 번 보자고.]
“…………”
[그래도 일단 와서 빌면 그 여자한텐 손 떼 주도록 하지. 생각 있걸랑 빨리 와서 넙죽 엎드려. 쪼금은 안 아프게 때려줄 테―]
나는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어 그대로 통화 종료버튼을 눌렀다.
이어서 염호권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려고 했을 때.
“아.”
불현 듯 재밌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그리고 염호권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지금 당장 뒤로 발라당 누워봐. 나한테 쳐 맞고 뻗은 것처럼.”
“어, 어?”
“빨리.”
염호권을 뒤로 눕히고, 나는 지금까지 닥치고 지켜보고만 있었던 염호권 패거리에게도 똑같이 시켰다.
그러고 나서 내 가운데 손가락이 핸드폰 렌즈 안에 잘 들어가도록 손을 비치한 다음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을 방금 전에 통화했던 강호권에게 그대로 보냈다.
그것은 사실상 선전포고였다.
“야. 받아라.”
나는 혹시 몰라 사진을 삭제한 다음에 염호권에게 핸드폰을 휙 하고 던졌다.
꼴에 민첩함은 있는지 떨어뜨리지 않고 잘 받았던 그였다.
그래.
니가 이길지.
아니면 내가 이길지.
어디 한 번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