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윤전
자명종 소리에 눈을 떴다. 오늘도 지긋지긋한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소리. 윤전은 팔을 뻗어 스위치를 눌렀다. 그리고 침대에 누운 채로 망상에 빠졌다.
[우체국 문이 열린다. 윤전이 앉아있는 접수창구 앞으로 다가오는 키가 크고 세련된 남자. 그가 두툼한 편지 봉투를 그녀에게 내민다. 윤전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한다. 손님, 주소를 적지 않으셨는데요. 그러자 그가 중저음의 목소리로 대답한다. 주소는 필요 없습니다. 이 편지는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니까요. 윤전은 얼굴을 붉히며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남자는 윙크를 날리며 돌아서 가고 윤전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봉투를 뜯어본다.]
띠리리릭, 띠리리릭.
자명종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윤전의 달콤한 상상도 여기서 끝이다. 상상이 현실로 일어날 확률은 제로, 0%라는 건 본인도 잘 알고 있다.
윤전은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세면대 거울 앞에 비친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 푸석푸석해보였다. 기미가 하룻밤사이 더욱 검게 내려앉은 느낌이다.
양치질을 하던 윤전은 카악 소리를 내며 입안의 거품을 뱉어냈다. 그래봐야 목구멍 안쪽에 달라붙은 우울함은 떨어지지 않았다. 윤전이 기억하는 한 우울함은 항상 그녀의 곁에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을 함께 지냈는데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감정이었다.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기초화장을 마친 윤전은 옷장 문을 열었다. 그러자 빼곡하게 들어찬 원피스와 레이스 블라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죽을 때까지 입어볼 수 없는 옷들이라는 걸 알면서도 윤전은 예쁜 옷을 사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옷장 구석에 있는 흰 블라우스와 보라색 치마를 꺼내 입었다. 블라우스는 목 부분이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윤전은 정작 자신이 입을 수 있는 옷은 잘 사지 않았다. 낡아빠진 옷을 입고, 있는 듯 없는 듯 투명인간처럼 사는 것이 못생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처세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가서 지하철역에 내렸다. 좀비처럼 아무 생각 없이 역사 안으로 들어가는데 탁탁탁, 귀를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에 초점 없는 눈을 들었다. 멀리서 봐도 예쁘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는 여자가 하이힐을 신고 전력질주를 하고 있었다.
도자기처럼 흰 피부와 물결치듯 찰랑거리는 풍성한 갈색 머리.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가느다란 팔다리, 그에 비해 풍만한 가슴과 작지도 크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엉덩이 곡선까지. 윤전은 여자를 순식간에 스캔했다. 평소에 생각해왔던 완벽한 여자의 모습이었다. 여자의 뒤에서 후광이 비추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윤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자를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뒤늦게야 윤전을 발견한 여자는 부딪히지 않으려고 방향을 틀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퍽, 두 사람은 어깨를 세게 부딪쳤다. 아, 하는 비명을 내지를 겨를도 없이 눈앞이 핑 돌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픈 어깨를 매만졌을 때, 윤전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츠렸다. 손끝에 닿은 건 입고 있던 낡은 블라우스의 감촉이 아니었다. 실크같이 매끄럽고 부드러운 느낌. 깜짝 놀라 손을 내리던 윤전은 눈을 의심했다. 부러질 것처럼 가느다란 팔목, 매끈하고 뽀얀 손목 안쪽의 살결.
내 몸이 아니다.
윤전은 직감했다. 방금 전 부딪힌 여자와 몸이 바뀌었음을. 윤전은 여자를 부르려고 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내밀다가는 순간적으로 움츠리며 기둥 뒤로 숨었다. 여자는 정신없이 뛰느라 윤전과 몸이 바뀐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듯 정신없이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윤전은 기둥 뒤에서 자신의 몸이 지하철역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윤전의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에 윤전은 지하철역 계단으로 올라갔다. 윤전의 발걸음에서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윤전은 주위를 살펴보고 얼른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 속의 여자는 멀리서 봤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작고 갸름한 얼굴, 하얀 물감을 칠해놓은 듯 얼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피부, 순정만화의 주인공처럼 동그랗고 커다란 눈,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검은 눈동자, 얼굴의 중심을 잡아주는 반듯한 콧날, 그리고 귀여운 인상을 마무리해주는 도톰한 입술까지...
인공적인 느낌은 어디에도 묻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몸매는 또 어떤가. 예쁜 사람은 많이 봤지만 이렇게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예쁜 사람은 없었다. 윤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거울 속 미녀를 감상했다.
단 하루를 살아도 예쁜 여자로 살 수 있다면.
이뤄질 수 없는 소원이라는 걸 알면서도 윤전은 매일 밤, 그리고 매일 아침, 동화 속 공주처럼 예뻐진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자신은 마녀의 저주에 걸려서 이렇게 추한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언젠가 멋진 왕자님이 나타가 마법을 풀어주면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신할 거라고.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마녀보다 못생긴 자신이 있을 뿐이었다. 탄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퉁퉁한 몸과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얼굴은 거울을 보기 싫을 정도로 역겨웠다. 그 간극을 채우기 위해 윤전은 많지 않은 월급으로 명품 원피스를 사고,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발랐던 화려한 립스틱을 샀다. 쓸데없는 낭비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소원이 이뤄졌다. 아름다움과 젊음, 상상만으로 그려왔던 외모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44년을 살아오는 동안 좋은 일이라고는 없었다. 남들 다 해보는 연애는커녕 키스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그 흔한 소개팅에도 나간 적이 없었다. 윤전에게 소개팅이나 미팅을 권유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누군가를 소개시켜 달라고 말을 꺼낼 자신감도 없었다.
이건 신이 주신 선물이다.
윤전은 여자의 몸에서 풍기는 고급스럽고 달콤한 향을 맡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행운에 불안감도 들었다. 여자는 분명 자신의 몸을 찾으려 할 것이다.
윤전은 여자의 프라다 숄더백을 열어봤다. 스마트폰과 남색 프라다 반지갑이 들어있었다. 조심스레 지갑을 열어보니 카드 몇 개와 약간의 현금, 그리고 운전면허증이 보였다.
윤전은 여자의 운전면허증을 꺼내보았다. 1990년생, 이현정. 우리 나이로 스물아홉이다. 2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보기보다는 나이가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어떡하지?
여자의 정체를 파악하고 나자 더욱 불안해진 윤전은 요의를 느끼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어깨에 걸려있던 가방을 화장실 문에 걸고 미니스커트를 엉덩이 위로 끌어올렸다. 순간 남의 몸을 만지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지만, 지금 이 몸의 주인은 윤전이었다. 윤전은 스타킹과 팬티를 끌어내렸다. 그리고 여자의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탄력에 새삼 놀라며 소변을 봤다.
볼일을 끝내고 치마를 단정히 매만지는데 가방속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윤전은 발신인을 확인했다. 010-7319-5838. 자신의 번호였다. 여자다. 다시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토할 것 같았다. 윤전은 화장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헛구역질을 했다. 진동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끈질기게 울렸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는 대신 전원을 꺼버렸다.
내가 훔치려고 한 게 아니야. 어디까지나 사고였어.
윤전은 비틀거리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여자가 이곳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어서 집에 가야 한다.
역 밖으로 나오자 눈부신 가을 햇살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택시를 타야 하나 고민하는데 마을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 올라타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윤전에게 쏠렸다. 그 눈빛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을 담고 있었다.
유미무죄, 무미유죄(有美無罪, 無美有罪). 아름다우면 뭐든지 용서되는 사회.
윤전은 그동안 못생겼다는 이유로 당했던 적대와 멸시들을 생각하며 자신에게 쏠리는 눈빛들을 경멸하듯 쳐냈다.
버스 안에서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왔다. 평소에는 짜증스럽다고 느껴지던 트로트였지만 오늘따라 경쾌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익숙한 리듬이라 마음속으로 박자를 맞추는데 갑자기 노래가 끊겼다.
- 뉴스속봅니다. 오늘 오전 출근길에 몇몇 시민들의 몸이 바뀌었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제보를 한 시민들의 공통점은 급히 가다가 몸을 세게 부딪쳤다는 것인데요. 이들은 충돌시 가볍게 현기증을 느꼈고...
나만 바뀐 게 아니었어? 순간 윤전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뚝, 하고 부러지는 것 같았다.
다음 정류장은 삼원물산, 삼원물산 앞입니다.
버스 안내방송 탓에 뉴스를 끝까지 들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내려야할 정류장이기도 했다. 신의 선물이 아니었다. 윤전은 휘청거리며 뒷문으로 내렸다.
신의 선물? 애당초 너에게만 찾아온 행운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잘 알면서 왜 그래?
윤전의 마음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윤전이 조금이라도 희망을 품을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조롱하는 검은 그림자.
“괜찮으세요?”
정류장에 서 있던 윤전에게 누군가 다가와 물었다. 윤전은 고개를 들었다.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준수한 남자였다.
“힘드시면, 제가 좀 부축해드릴까요?”
남자가 말했다. 난생처음 받아보는 호의였다. 이 몸으로 살면 항상 받을 수 있는 값싼 호의겠지.
윤전은 결심했다. 비록 불완전한 행운이라고 해도 누릴 수 있는 만큼 누리겠다고.
“아니요, 괜찮아요.”
윤전은 드라마의 여자주인공처럼 미소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리고 검은 그림자를 몰아내기 위해 당당히 가슴을 펴고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