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전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빌라를 힘겹게 올라갔다. 아무리 몸이 가벼워졌다고 해도 하이힐을 신고 턱이 높은 계단을 오르려니 발이 아팠다. 올해 초 이사 온 빌라는 신축이었지만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같은 조건의 다른 집보다 전세가격이 오천만원이나 저렴했다.
전에 살던 집은 바퀴벌레가 많고 하수도 냄새가 지독했는데도 전세만기가 되자 터무니없이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했다. 지하철에서 가깝다는 이점이 있긴 했지만 윤전은 미련 없이 이사하기로 했다. 새로 이사 온 집은 엘리베이터도 없고, 역까지 가려면 마을버스를 타야했지만 그 정도 불편함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보험금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었다.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며 윤전은 조금 전 마을버스에서 들었던 뉴스를 떠올렸다. 만약 이 몸의 주인이 윤전을 신고한다면 어떻게 될까? 가장 먼저 회사로 연락이 갈 것이다. 회사에는 이사 온 집의 주소를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여자는 윤전의 몸을 갖고 있다. 주민센터에 가서 지문조회만 해봐도 윤전이 어디 살고 있는지는 간단히 알 수 있지 않을까?
윤전은 현관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구두도 벗지 않고 거실 턱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여자의 숄더백을 열어 아까 꺼놨던 핸드폰의 전원을 켰다. 일단은 현정의 행동반경을 최소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윤전은 현정이 자신의 지갑 안에 들어있는 카드를 쓰지 못하도록 카드사에 전화를 걸어 분실신고를 내고 다시 핸드폰의 전원을 껐다. 미봉책이긴 했지만, 행동에 어느 정도는 제약이 있을 것이다.
급한 불을 껐다고 생각한 윤전은 힐을 벗고 화장대 앞으로 갔다. 거울을 보자 온갖 시름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윤전은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매끈하고 날렵한 턱을 쓰다듬었다.
아름답다.
이 얼굴은,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감상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윤전은 사뿐하게 일어나 옷장으로 향했다. 줄곧 상상만 했던 일,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윤전은 영화 ‘귀여운 여인’의 줄리아로버츠가 된 기분이었다. 평생 입어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원피스들을 한 벌 한 벌 입어보며 거울 앞에서 모델 같은 포즈를 취했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백화점 매장에 옷을 사러 갈 때마다 점원들은 윤전을 흘끔거리다가 그녀가 마음에 드는 원피스를 꺼내들면 마지못해 응대하러 오곤 했었다. 그런 매장에서는 윤전에게 맞는 사이즈 자체가 없으니 점원의 태도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대놓고 귀찮다는 표정을 짓는 점원에게 윤전은 ‘제가 입을 게 아니라 아는 동생한테 선물할 건데요’ 라고 말하곤 했다. 점원은 그제야 표정과 목소리를 바꾸며 선물 받을 사람의 사이즈를 물어왔다. 그렇게 수치심을 느끼며 정성껏 고른 원피스들은 메마른 논바닥처럼 갈라진 윤전의 퍼석한 인생을 지탱해주는 단 하나의 도피처였다.
윤전은 가장 아끼는 시폰 소재의 핑크색 디올 원피스를 입고 화장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스모키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섀도, 아이라이너, 마스카라, 브러시, 도구는 차고 넘치도록 있었다. 조심스러운 붓 터치 몇 번으로 커다란 눈이 더욱 깊고 신비해졌다. 입술에는 진홍색 립글로스를 발랐다. 화장을 마친 윤전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눈앞에서 마술이 일어난 것 같았다. 예쁘고 청순한 얼굴이 섹시하고 도도한 얼굴로 바뀌는 마술이었다.
한껏 멋을 부리고 밖으로 나온 윤전은 지나가던 빈 택시를 잡아탔다.
“하이고, 예쁜 아가씨가 타셨네. 어디로 모실까요?”
택시기사가 호들갑을 떨며 물었다.
“H호텔이요.”
윤전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떻게 이 여자는 목소리까지 아름다운지 내심 감탄하면서. 택시기사가 룸미러로 그녀를 슬쩍슬쩍 훔쳐보며 느끼한 미소를 지었다. 이 택시에 탄 사람이 윤전 자신이었다면 택시기사는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검은 그림자가 마음속에 드리워졌지만 애써 무시하며 룸미러에 비친 현정의 얼굴을 봤다. 이 얼굴이라면 자신이 해보고 싶었던 일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밤, 로맨스 소설에서나 보던 일이 실제로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주책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학창시절, 예쁜 아이들이야 당연히 인기가 있었지만 나름대로 평범한 아이들도 남자친구를 사귀며 마냥 설레어하던 때, 윤전은 남자친구를 사귀기는커녕 가만히 있어도 벌레 보듯 쳐다보는 시선들을 고스란히 감내해야했었다. 그런 난폭한 시선들은 때때로 거친 폭력으로 이어졌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같은 수학학원에 다니던 남자애가 있었다. 유난히 하얀 얼굴에 은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순정만화의 남자주인공처럼 생긴 아이였다. 수업 시간에 윤전은 그 남자애가 앉은 옆줄, 그러니까 대각선으로 마주한 뒷자리에 앉았다. 칠판을 보는 척 하면서 그 애의 옆모습을 살짝 훔쳐볼 수 있는 자리였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챙기는데 남자애가 윤전의 자리로 왔다. 무슨 일인지 영문도 모른 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윤전은 바짝 긴장한 채로 남자애를 올려다봤다. 그런데 다짜고짜 그 애의 주먹이 윤전의 얼굴에 박혔다. 재수 없는 돼지 년아, 한 번만 더 쳐다보면 단추만한 눈깔을 확 뽑아버릴 줄 알아.
윤전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맞은 곳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남자애와 친구들은 못생긴 년이 주제를 알아야지, 라며 바닥에 침을 퉤 뱉고 나갔다. 누구도 폭력을 행사한 남자애를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뒤에서 수군거리며 윤전을 조롱했다.
여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삼삼오오 모여 키득거리며 그녀를 흘끔거릴 뿐이었다. 윤전은 울면서 강의실을 나왔다. 이후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에 가상의 삼각형을 만든 후, 그 삼각형의 꼭짓점만 쳐다보고 다니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런 윤전에게 엄마는 앞을 보고 다니라며 잔소리를 했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이게 다 엄마아빠 때문이잖아. 누가 못생기게 낳아놓으래? 윤전은 엄마에게 악을 썼다. 윤전이 패악을 떨 수 있는 사람은 엄마뿐이었다.
엄마는 그럴 때마다 누가 못생겼다 그래? 우리 딸이 얼마나 예쁜데, 라며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했다. 평균 수준의 외모를 가진 엄마가 윤전의 심정을 알 리 없었다. 아이들에게 무시를 당할 때마다 못생긴 딸을 낳은 부모 같은 건 죽어버리라고 저주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에 거짓말처럼 엄마, 아빠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원망할 대상이 영영 사라진 것이다. 윤전은 울고 또 울었다. 더 이상 저주를 퍼부을 사람이 없다는 게 서러웠다. 소중하고 든든한 자신의 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었다.
“아가씨, 다 왔어요.”
택시기사의 목소리에 윤전은 단말기에 카드를 대고 내렸다. 본인의 카드는 사용정지 시켜놓고, 현정의 카드를 쓴다는데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지만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에 취해 다시 당당한 기분이 되었다.
윤전은 난생 처음 와보는 호텔의 화려함에 압도되었다. 태양보다 더 빛나는 샹들리에와 매끈하게 펼쳐진 대리석 바닥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선 클럽으로 직행하고 싶었지만, 아직 오후 세시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있었다. 윤전은 클럽에 가기 전 뷔페식당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뷔페식당에 간 적이 없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서였다. 음식을 올린 뷔페 접시를 들고 다니면 저렇게 처먹으니 살이 찌지, 라며 사람들이 흉을 볼 것만 같았다.
“실례지만, 뷔페식당이 어딘가요?”
윤전은 제복을 차려입은 호텔 직원에게 물었다.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친절한 직원은 식당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아름다운 사람에게 세상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식당에 들어와 자리를 안내받은 윤전은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의 몸을 하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평일인데다가 식사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테이블은 거의 비어 있었다. 늦은 점심을 먹는 여자 둘과, 손자인 듯한 아이 둘을 데리고 온 노부부, 그리고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짙은 회색 양복을 입은 남자는 어쩐지 낯이 익었다. 남자는 식사를 마친 듯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저렇게 잘생긴 남자라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너무 뚫어지게 봤는지 남자가 윤전을 돌아봤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는데, 곁눈으로 남자의 미소가 보였다.
맞다. 나 지금 예쁘지.
자신감을 되찾은 윤전은 자리에서 일어나 중간 크기의 접시를 들고 식당을 여유롭게 누볐다. 그리고 애피타이저로 칵테일 새우와 연어샐러드를 담아 자리로 돌아왔다.
포크로 신선한 새우를 찍어 입에 넣었다. 탱글탱글한 식감과 함께 새우의 단맛이 입에 퍼졌다. 윤전은 새우를 좋아해 집에서 라면을 끓일 때도 항상 냉동 새우를 넣곤 했다. 그렇게 새우 한 마리를 먹어치우고 두 마리째에 포크를 가져가는데 입술이 간지럽고 입안이 까끌까끌한 느낌이 들었다.
헛기침을 몇 번 해봐도 나아지지 않았다. 입술에서 시작된 가려움은 얼굴과 목으로 내려갔다. 곧 목구멍이 따갑고 아프기 시작했다. 눈이 부어오르는 듯 시야가 좁아졌다.
왜 이러지? 왜 이러는 거야? 내 몸이 아닌데 욕심을 내서 벌을 받는 건가?
목에서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났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쉬기 불편했다. 이러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커피를 마시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 윤전에게 다가왔다. 그것이 그녀가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