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억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현정은 쉽게 그치지 않는 흐느낌을 누르기 위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때 현관 벨이 울렸다.
“배달 왔습니다.”
“잠깐만요.”
현정은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책상 서랍에 있던 비상금 봉투에서 만원 한 장을 꺼낸 다음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누나.”
밝게 인사하며 볶음밥을 들고 들어오던 배달원이 현정을 보고 흠칫 놀랐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중국집에 시켜먹을 때마다 현정을 보면 예쁜 누나 잘 있었어요? 라며 넉살좋게 말을 붙여오던 남자애였다. 현정은 남자애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성은 모르지만 수창이였다. 몇 번 낯이 익자 묻지도 않았는데 제 이름은 수창이에요. 누나는요? 라며 뒤통수를 긁적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야구 모자를 거꾸로 눌러쓴 얼굴은 고등학생 정도로 앳되게 보였지만, 키나 덩치로만 보면 농구선수처럼 보였다. 수창은 오피스텔 안을 슬쩍 들여다보더니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요.”
현정이 만 원짜리 지폐를 건네주자 수창은 거스름돈 삼천 원을 내어주고는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현정은 2인용 식탁 위에 볶음밥을 올리고 랩을 반만 뜯은 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너무 급하게 먹었는지 반쯤 먹고 나자 배가 팽팽하게 당겼다. 남은 음식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고 빈 그릇을 헹궈 문 앞에 내놓았다. 그리고는 그득한 배를 부여잡고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그래도 밥을 먹었더니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소파에 계속 있다가는 잠이 들어버릴 것 같아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카페에 접속했다. 혹시 제보자가 있으면 좋겠지만, 아니라면 오늘 오전 몸이 바뀐 사람 중에 현정처럼 상대방이 사라진 경우가 있는지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정의 게시글에 댓글이 14개나 달려있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클릭하고 댓글을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슈렉인 줄.]
[아니 이 아줌마 완전 로또 당첨 아님?]
[아줌마 빨리 도망쳐여 ㅎ ㅎ]
[이거 넘 비교체험 극과 극인데?]
[예쁜 여자분 저 외모면 얼굴부심 쩔었을 텐데 몸 못 찾으면 자살각?]
나머지 댓글도 비슷했다. 전부 윤전의 외모를 조롱하거나 현정을 비아냥거리는 내용뿐, 어디에서 봤다거나 아는 사람이라는 내용의 댓글은 없었다. 현정은 다시 윤전의 폴더폰을 집어 들었다.
윤전씨 제발, 연락 좀 받아요.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전원이 꺼져 있었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한 번 더 통화 버튼을 누르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 현정은 깜짝 놀라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 했다.
“누구세요.”
“그릇 찾으러 왔습니다.”
수창의 목소리였다.
“문 앞에 내놨는데요.”
“여기 없어서요.”
그럴 리가 없는데, 현정은 중얼거리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 순간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집안으로 휙, 뛰어 들어왔다. 현정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수창이었다.
“미, 미안해요. 놀래킬 생각은 없었는데.”
수창이 벌게진 얼굴로 사과했다.
“뭐, 뭐하는 거야? 이거 무단 침입인 거 몰라?”
놀라는 바람에 평소처럼 반말이 튀어나왔다.
“죄송해요, 누나.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뭔데?”
“혹시 여기 살던 누나 이사 갔어요? 가구들이랑 그대로인거 봐서 이사 간 거 같진 않은데, 어디 여행이라도 간 거예요? 누나는 여기 살던 현정 누나랑 무슨 관계에요?”
수창의 입에서 미리 준비한 것처럼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예상치 못했던 물음에 현정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수창아...”
현정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수창이 눈을 크게 떴다.
“현정이 누나?”
현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어요, 누나. 누나도 몸이 바뀐 거예요?”
“응. 오늘 아침에...”
“누나, 어쩌다 그렇게 된 거예요? 저한테... 말해 줄 수 있어요? 어쩌면 제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래, 잠깐 들어와서 앉아.”
현정이 먼저 테이블에 앉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누구에게든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고 싶었다.
현정은 오늘 아침 출근길에 있었던 일을 수창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지각을 면하려고 지하철역에서 뛰다가 맞은편에서 오던 아주머니와 세게 부딪혔다. 어지럼증을 참고 계속 달려가 역과 연결되어 있는 회사에 도착했을 때 몸이 바뀐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제야 전화를 걸어봤지만 그 아주머니는 전화도 받지 않았다. 지갑 속에 들어있던 주민등록증의 주소지로도 찾아가봤지만 다른 곳으로 이사 갔다는 말만 들었다. 몸이 바뀐 사람이 사라져버렸으니 어떻게 몸을 되찾아야 할지 난감하다, 경찰에 신고하려 해도 병상에 있는 엄마가 걱정되어 아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는 얘기였다.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현정을 말을 듣던 수창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해해요. 이 몸의 주인은 당연히 누나의 몸이 탐났을 거고, 그래서 지금 연락도 받지 않고 잠적해버린 거죠?”
현정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마른 입술을 핥던 수창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누나, 제가 누나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네가? 어떻게?”
“제가 친하게 지내는 누나가 있는데요. 이렇게 남의 몸을 갖고 도망간 사람을 찾아주는 일을 하거든요.”
“뭐? 사람을 찾아준다고? 사설탐정 같은 거야?”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누나의 몸을 되찾아줄 사람이에요. 되받이라고.”
“되받이?”
“네, 그 누나는 리터너(Returner)라는 말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요.”
되받이든, 리터너든, 호칭은 아무래도 좋았다. 몸을 되찾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현정의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왔다. 손바닥을 허벅지에 무심코 문지르다가 서랍장의 비상금 말고는 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 비용이... 얼마나 될까?”
“비용이요? 삼십 만원이요.”
“삼십 만원?”
금액을 들은 현정은 약간 놀랐다. 몸을 찾아주는 대가라고 하기엔 적은 금액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에 둔 비상금이라고 해 봐야 십만 원 정도밖에 없었다.
“수창아, 내가 가방까지 다 바뀌는 바람에 당장은 돈이 없는데...”
“걱정 마요, 누나. 돈은 나중에 몸을 찾고 나서 줘도 되니까요. 어차피 그 누나 돈 벌려고 하는 일 아니에요. 사명감 때문이지. 가희 누나네 집안이 특히 사명감이 투철하거든요. 그래도 돈을 받는 건 사람들한테 신뢰감을 주기 위해서라고 했어요. 공짜로 도와준다고 하면 요즘 사람들이 도통 믿지를 못하니까.”
듣고 보니 그랬다. 이런 일을 해 주면서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 좀처럼 믿음이 가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현정은 머릿속에서 빙빙 돌던 질문을 했다.
“근데 넌, 그분 어떻게 알게 된 건데?”
“가희 누나요? 제 직장동료라고 할 수 있죠.”
“아... 그분도 중국집에서 같이 일하시는 거야?”
“그 직장 말고.”
“응? 너도 그럼 그분처럼... 리터너?”
수창이 어울리지 않게 멋쩍은 표정으로 턱을 당겼다.
“어? 정말?”
“네, 뭐. 어쩌다 보니 그런 능력이 있더라구요.”
“그럼 수창이 네가 찾아주면 안 돼?”
“아, 그게 같은 성별끼리만 바뀌거든요.”
“어? 아... 그렇구나.”
“네. 그래서 누나는 가희 누나가 도와줘야 해요.”
“그래, 그럼 부탁할게.”
“누나, 지금 연락 가능한 번호 알려주세요. 가희 누나한테 연락하라고 할게요.”
“응, 나도 이 핸드폰 번호는 모르는데...”
현정이 폴더폰을 열어 기기정보를 확인하려는데, 수창이 그녀의 폰을 휙 가져갔다.
“번거롭게 뭘 찾아봐요. 저한테 전화 걸어보면 되죠.”
수창이 문자판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
두 시간 후, 현정은 집 앞 카페에서 낯선 여자와 마주앉아 있었다. 여자는 하늘색 바이크를 타고 왔다. 검은 단발머리, 눈초리가 약간 치켜 올라가 고양이 같은 인상을 주는 동그란 눈, 작고 오똑한 코, 꼭 다문 입술.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소녀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정도로 동안인데다가 체구도 작았다.
“안녕하세요, 오가희입니다.”
“이현정이예요.”
서로 통성명을 하고나서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현정은 오늘 오전에 일어난 일을 수창에게 얘기했던 것보다 자세하고 정확하게 가희에게 설명했다. 가희는 줄곤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들었다.
“아, 이건 제 사진이요.”
현정은 앨범에서 꺼내온 자신의 사진 몇 장을 가희에게 건넸다. 가희는 현정이 건네 준 사진을 두 손으로 잡고 잔뜩 고개를 숙인 채 유심히 봤다. 그 모습이 호기심 많은 소녀 같아 보이기만 해서 현정은 조바심이 났다.
“정말 제 몸을 찾아주실 수 있어요?”
현정이 물었다.
“네.”
가희가 담담하게 답했다. 그리고 곧 현정을 안심시키려는 듯 덧붙였다.
“이래봬도 저, 꽤 오랫동안 이 일을 해 왔거든요.”
“오랫동안이요? 이런 일이 그럼 예전에도 있었다는 말씀?”
질문과 동시에 수창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분명 가희네 집안은 사명감이 투철하다는 얘기를 했었다. 집안이라면 예전부터 일을 해왔다는 의미다.
“맞아요. 사람들이 부딪혔을 때 몸이 바뀌는 일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이에요. 부딪힌다고 아무나 바뀌는 건 아니고, 파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바뀌는데... 오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바뀐 건, 저도 추측이지만, 사람들이 비슷한 패턴의 생활을 하면서 발산하는 파장도 비슷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파장? 비슷한 패턴? 현정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설명이었다.
“그럼 저랑 이 분이 파장이 비슷하다는... 거죠?”
“아마도, 그럴 거예요.”
“설마...”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몸의 주인과는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데.
“아마 두 분 다 외모에 대해 관심이 많기 때문인 것 같아요. 열등감이든 우월감이든. 자세한 건 나중에, 몸을 찾고 나서 설명해드릴게요.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제 말은, 그러니까, 정말 시간이 없어요. 몸이 바뀌고 사흘이 지나면 영영 자신의 몸으로 돌아갈 수 없거든요.”
“네?”
가희가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검색하더니 현정에게 내보였다. 기사에 첨부된 사진에는 CCTV찍힌 가희의 모습이 있었다. 검정 모자에 검정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가희임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오늘 병원에 가서 몸을 되찾는 법을 알려준 사람, 저에요. 그러니까 일단은 절 믿어주세요.”
현정은 가희의 눈을, 흔들림 없는 큰 눈동자를 똑바로 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가시죠.”
카페 문을 열고 나간 가희는 거침없이 앞장섰다. 현정은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카페 옆 주차장으로 들어간 가희가 현정에게 말했다.
“거기 서 계세요.”
가희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현정을 향해 달려왔다. 퍽, 부딪히는 힘이 생각보다 커서 현정은 뒤로 주저앉았다. 명치끝에서 매캐한 느낌이 올라오며 현기증이 났다. 현정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가희를 올려다봤다. 희미했던 시야가 점차 또렷해졌다. 현정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단발머리에 키가 작은 가희가 아니라, 조금 전까지 자신의 영혼이 들어가 있던 윤전이었다.
“힘들겠지만 너무 걱정 마세요. 늦어도 내일 저녁까지는 현정씨의 몸을 돌려받을 수 있을 테니까. 몸을 찾으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가희씨, 고마워요.”
가희는 현정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서둘러 바이크에 올라탔다. 바이크는 작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박력 있는 엔진소리를 내며 흐린 도시를 질주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