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추리/스릴러
영혼치기
작가 : 골드보이
작품등록일 : 2018.11.4
  첫회보기
 
13. 진우
작성일 : 18-11-20     조회 : 313     추천 : 1     분량 : 5056
뷰어설정열기
기본값으로 설정저장
글자체
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눈을 뜨려 했지만, 굳게 닫힌 눈꺼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을 움직여보려했지만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독한 가위에 눌린 기분이었다. 놀이공원의 회전찻잔을 탄 것처럼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온몸이 소용돌이치며 침대 밑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진우는 기억의 끈을 잡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검은 양복의 남자들, 검정색 세단, 차가운 주사바늘, 회장님... 영혼치기.

 

 기억났다. 길가에 쓰러진 노인을 도와주려다 영혼치기를 당한 것이.

 

 그가 영혼치기를 당했다고 자각한 순간 몸이 공중에 붕 뜨며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진우는 무중력상태의 우주비행사처럼 공중에 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진우의 영혼이 익호의 육체에서 빠져나온 것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떠 있다고 생각했다.

 

 진우는 병실 안을 둘러봤다. 침대에는 앙상하게 마른 노인이 산소마스크를 쓰고 수액을 주렁주렁 매달고 누워 있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전동침대, 벽에 걸린 평면 TV, 냉장고, 소파, 테이블, 개인 화장실... 넓이로 보나 인테리어로 보나 VIP병실임이 확실했다.

 

 진우는 다시 노인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저 노인이 대기업 회장이라면 어느 기사에선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을 감고 누워있는 노인은 지하철에서, 공원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노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병 때문인지 유난히 볼이 홀쭉하고 눈자위가 검었지만, 자기가 살겠다고 젊은이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탐욕덩어리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아까부터 노인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설마, 노인이 죽은 걸까? 그래서 그의 육체에서 빠져나오게 됐을까? 노인이 죽으면 내 영혼은 어디로 가는 거지? 안 돼, 죽지 마.

 

 반투명한 영혼 상태의 진우가 손을 뻗어 노인의 팔목을 잡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진우의 영혼이 노인의 몸 속으로 흡수되듯 빨려들어갔다. 흐읍, 숨을 몰아쉬며 노인의 몸이 깨어났다.

 

 가슴에 돌덩이를 얹어놓은 것처럼 무거운 중압감이 느껴졌다. 쉬익쉬익, 산소호흡기 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봤다.

 

 왜, 죽이지 않았지?

 

 한발 늦게 의문이 들었다. 차안으로 떠밀려 얼굴이 가려지고, 차가운 주사액이 목덜미를 파고드는 순간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다. 몸을 바꿔치기 하려는 목적을 이뤘으니 당연히 죽이려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를 살려 놓았다. 죽일 수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진우는 구 선생의 말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함바집에서의 대화가 머릿속을 빠르게 오고갔다.

 

 - 정확히 사흘이 지나고 제게 연락을 했더군요.

 - 사흘이 지났으니 무슨 짓을 하더라도 아내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사흘. 틀림없다. 사흘의 시간에 답이 있는 게 분명했다. 사흘이 지나면 돌아갈 방법이 없다는 말은 거꾸로 뒤집어보면 사흘 안에는 돌아갈 방법이 있다는 뜻이다.

 

 진우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봤다. 창을 덮은 블라인드 사이로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이 보였다. 노을이 지는 시간, 어젯밤 늦게 영혼치기를 당했으니 아직 만 하루가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이틀의 시간이 남아있다. 내 몸을 되찾을 이틀의 시간이.

 

 자꾸만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지는 바람에 생각을 집중하기 어려웠지만, 진우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앞으로의 행보를 그려나갔다.

 

 병든 노인의 몸속에 갇힌 제한적인 상황에서 믿을 거라곤 자신의 두뇌뿐이었다. 무엇보다 먼저 이곳, 병원에서 빠져나가야한다. 그리고 이 노인의 정체를 알아내야 한다.

 

 경찰에 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구선생이 경찰을 찾아갔을 때는 미친 사람 취급만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건 십년 전의 얘기다. 십년 전에야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겠지만, 어제 출근길에 그런 난리가 있었으니 믿어줄 확률이 높다.

 

 몸을 훔쳐간 노인이 도주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당장 여권 없이 해외로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직 국내에 있다면, 진우의 몸을 되찾을 가능성이 조금은 있는 것이다. 일단 여기를 빠져나가서 그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주도면밀한 놈들이니 분명 진우 혼자 이곳에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병실밖에 누군가가 지키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한두 명쯤, 그 이상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힘없는 노인인데 너무 많은 경호원을 붙여놓는다면 다른 사람들 눈에 이상하게 보일 테니까.

 

 진우는 문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산소 호흡기의 거친 소리에 묻혀 주변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우는 조심스레 산소 호흡기를 들어올렸다. 숨을 쉬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두려웠지만 숨을 쉬는 데 커다란 문제는 없었다.

 

 왼팔에 꽂혀있던 주사바늘도 빼버렸다. 그렇지만 누가 급작스럽게 들어올지 몰라 섣불리 일어날 수는 없었다. 호흡기를 빼고 나니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때였다. 병실문밖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전무님. 회장님께서는 여전히 혼수상태십니다. 네, 그럼 정 과장을 이쪽으로 불러 교대하고 전무님 계신 별장으로 가겠습니다. 사십 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단편적인 대화였지만, 몇 가지 정보를 얻어내는데는 무리가 없었다.

 

 지금 병실 밖에는 한 명의 남자가 있다. 그 남자는 내가 혼수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금 후에 교대가 이뤄질 것이다.

 

 정과장, 어디야? 당장 병원으로 좀 와야겠어. 응, 전무님 호출. 빨리 오라고.

 

 다시 남자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서 지킨다면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진우 자신의 몸일 때 얘기였다. 진우의 몸이라면 밖에 상대가 어떤 놈이든 넘어뜨리고 도망칠 자신이 있었지만, 이 노인의 몸으로는 불가능했다. 누군가를 제압하기 전에 제압당하고 말 것이다. 아니, 제대로 움직일 수는 있는 걸까. 진우는 팔다리를 들어올려 보았다. 힘이 넘치는 정도는 아니지만 움직일 수는 있었다.

 

 으읍!

 

 갑자기 찌르는 듯한 두통과 가슴을 압박하는 묵직한 통증이 진우를 덮쳤다. 목덜미에서 금세 진땀이 배어나왔다.

 

 조금 더 세밀한 계획이 필요한데.

 

 문밖의 남자가 화장실에 간 틈을 노리는 건 어떨까? 하지만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에서 남자가 화장실에 간 것까지 알아차릴 수 있을까?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진우 스스로 빠져나갈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중환자실로 옮겨진다면 어떨까. 중환자실이나 집중치료실로 간다면 도망칠 틈이 생길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의사도 한통속이라면? 그럴 것이다. 그래도 이곳에 갇혀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무엇이든 해 봐야 한다. 그것도 밤이 오기 전에 말이다. 회장님’은 이 일을 은밀하게 처리하기를 원할 테니까, 진우가 탈출하는 데는 한밤중보다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시간이 조금 더 유리할 것이다.

 

 진우는 신중하게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다. 자신이 발작하는 연기를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임팔라를 잡아먹기 위해 때를 기다리는 굶주린 치타처럼 실패하지 않을 단 한 번의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기회는 예상외로 빠르게 찾아왔다.

 

 문밖의 남자가 통화한 후 십분 남짓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밖에서 무거운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문 앞에서 딱 멈췄다.

 

 “실장님, 부르셨습니까?”

 “어, 왔나. 전무님 호출로 별장에 가봐야겠다. 회장님 잘 지켜.”

 

 실장이라 불린 남자가 전무님과 회장님이라는 단어에 유난히 힘을 주며 말했다. 회장님은 진우를, 전무님은 아마도 이 몸의 워래 주인을 말하는 거겠지.

 

 “걱정 마십시오.”

 “그럼 난 내일 아침에 올 테니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네, 고생하십시오.”

 “그래.”

 

 발자국 소리가 멀어졌다. 시간을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병실 안에는 벽시계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빛으로 시간을 가늠해야 했다. 노을이 사라진 하늘은 어두운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여덟시가 조금 넘었겠다고 짐작하는데,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재빨리 산소마스크를 쓰고 눈을 감았다.

 

 “아씨, 똥 매려 죽는 줄 알았네.”

 

 남자가 침대로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주사바늘을 뺀 걸 눈치 채면 어쩌지, 그때 남자가 진우의 허벅지를 툭 쳤다.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어이, 영감탱이. 조용히 자고 있으라고.”

 

 남자가 화장실 문을 미는 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실눈을 뜨고 남자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씨름선수처럼 덩치가 크고 체격이 단단해 보이는 남자였다.

 

 화장실 문이 닫혔다. 변기 뚜껑을 올리는 소리가 났고, 곧이어 요란하게 배설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이다. 진우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침대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열고 복도를 달렸다. 달린다고는 해도 보통 사람이 빨리 걷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등 뒤로 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 안에 있는 덩치도 들었을까. 몇 미터 가지도 않았는데 위가 뒤틀리며 구역질이 올라왔다. 엘리베이터까지만 가연 될 텐데. 구역질을 억지로 참으며 간호사실을 지나 엘리베이터가 있는 모퉁이를 돌았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단발머리를 한 키 작은 여자가 서 있었다. 손목에 찬 빨간 실 팔찌가 눈에 띄었다. 맨 오른 쪽 엘리베이터가 12층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여자가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만요, 같이 갑시다.”

 

 진우가 쉰 목소리로 말하는데 덩치가 병실 문을 부술 듯 열어젖히고 쫓아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놀란 얼굴로 진우를 봤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하고 있었다.

 

 “제발 도와줘요.”

 

 진우가 목구멍에서 소리를 짜냈다. 그 순간 여자가 열림 버튼을 누르고 밖으로 나와 진우의 손손목을 끌어당겼다.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 들어간 순간, 복도를 돌아 나오는 덩치가 보였고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여자가 재빨리 1층을 눌렀다.

 

 진우는 숨이 넘어갈 것처럼 기침을 했다. 피가 섞인 침이 엘리베이터 바닥에 흩뿌려졌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여자가 진우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손으로는 분주하게 바지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손수건이 없는데... 우선 이걸로라도.”

 

 여자가 티셔츠의 손목을 잡아당겨 늘이더니 진우의 입 주변을 꼼꼼히 닦아주기 시작했다. 따뜻한 손길이었다. 도움을 요청하자. 이런 사람이라면 도와줄지도 모른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데, 여자의 동그란 눈이 두 배로 커졌다.

 

 “회장님? 혹시 김익호 회장님 아니세요?”

 

 
 

맨위로맨아래로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36 36. 가희 1/12 303 0
35 35. 현정 1/2 299 0
34 34. 진우 12/28 286 1
33 33. 은영 12/27 280 1
32 32. 익호 12/24 273 1
31 31. 현정 12/19 271 1
30 30. 진우 12/18 284 1
29 29. 익호 12/15 268 1
28 28. 현정 12/12 283 1
27 27. 가희 12/11 265 1
26 26. 진우 12/10 290 1
25 25. 은영 12/9 315 1
24 24. 익호 12/7 294 1
23 23. 현정 12/5 291 1
22 22. 가희 12/3 285 1
21 21. 진우 12/1 289 1
20 20. 현정 11/29 288 1
19 19. 윤전 11/28 275 1
18 18. 가희 11/27 290 1
17 17. 현정 11/26 282 1
16 16. 가희 11/23 289 1
15 15. 윤전 11/22 278 1
14 14. 가희 11/21 294 1
13 13. 진우 11/20 314 1
12 12. 익호 11/19 277 1
11 11. 은영 11/17 266 2
10 10. 익호 11/15 333 1
9 09. 진우 11/14 286 1
8 08. 은영 11/13 301 2
7 07. 익호 11/12 306 1
 
 1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