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추리/스릴러
영혼치기
작가 : 골드보이
작품등록일 : 2018.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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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윤전
작성일 : 18-11-22     조회 : 278     추천 : 1     분량 : 6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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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전은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남의 몸을 탐냈기 때문에 벌을 받아 죽은 거라고. 그런데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죽은 사람도 두통을 느끼나?

 

 주위의 소음이 서서히 그녀의 청각을 자극했다. 사람들의 말소리, 바쁘게 걷는 소리, 수레 같은 게 끌리는 소리.

 

 냄새도 느낄 수 있었다. 공기 중의 소독약 냄새와 뱃속에서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쓰디쓴 항생제 냄새.

 

 조심조심 손가락을 움직여봤다. 살아있다. 그렇지만 눈을 뜨기가 두려웠다. 눈을 뜨면 투박한 자신의 손으로, 흉측한 자신의 몸으로 돌아와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 정신이 들어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마치 윤전의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그 목소리에 용기를 얻었다. 윤전의 몸을 하고 있다면, 어떤 남자라도 이렇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지는 않을 테니까.

 

 눈을 뜨자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어디서 봤더라...

 

 기억을 떠올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뷔페식당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남자였다.

 

 “걱정했는데, 별 일 없어서 다행이네요. 현정씨.”

 

 남자의 입에서 현정의 이름이 나왔다. 혹시 현정과 아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어서 도망가야 한다. 윤전은 당황하며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아, 놀라지 마요. 응급실 접수하느라 지갑에 있던 신분증 봤어요.”

 

 남자가 자기 무릎 위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슬쩍 들어보였다.

 

 “아, 네...”

 

 윤전이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현정씨, 어쩌자고 그랬어요?”

 

 남자가 책망하듯 물었다.

 

 “네?”

 “새우 말이에요. 그렇게 심한 알레르기가 있는데 여태 몰랐다면 말이 안 되고.

 

 새우 알레르기? 나한테 새우 알레르기가 있다고? 윤전은 잠시 동안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현정에게 새우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칵테일 새우를 먹었을 때 호흡 곤란이 왔던 거구나.

 

 “스물아홉 살 되도록 새우를 한 번도 안 먹어 본 건 아니겠죠? 아, 미안. 신분증을 보는 바람에 나이도 알게 됐네요.”

 “괘, 괜찮아요.”

 

 윤전은 남자를 뷔페식당에서 만나기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종편 채널에 자주 나오는 음식평론가 하상원이었다.

 

 “뭐, 어쨌든 무사하니 다행이에요.”

 “덕분에...”

 “참,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하상원이라고 합니다. 공평하게 나이도 밝히죠. 서른 넷입니다.”

 

 상원은 윤전이 누워있는 침대 옆에서 소개팅에 나온 사람처럼 자기소개를 했다. 그는 화면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멋있었다. 날렵한 콧날, 붉은 입술, 날카로운 턱선, 시원한 눈매. 음식평론가라기보다 화보에서 막 튀어나온 모델처럼 시크한 매력이 넘쳤다.

 

 윤전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에게서 시원하면서 달콤한 향기가 났다. 44년 동안, 남자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함께 있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다 보니 온신경이 그에게로 쏠려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병원에 있다가는 언제 정체가 탄로 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현정이 자신의 몸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신고를 해놓았을지도 모른다. 윤전은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러자 두통이 배로 심해졌다. 어지럼증도 났다.

 

 “왜요? 화장실 가고 싶어요?”

 

 상원이 물었다.

 

 “아뇨, 집에 가야해요.”

 “집에요? 뭐 급한 일이라도 있어요?”

 “네, 좀...”

 “그럼 지금 퇴원해도 될지 물어보고 올게요.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요.”

 

 상원이 응급실 밖으로 나갔다. 뒷모습까지 완벽한 남자였다. 저런 남자의 품에 안길 수 있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정말이지 환상적일 텐데... 생각만으로도 아랫배가 뻐근하게 당겼다.

 

 욕심 같아선 그를 기다렸다 같이 나가고 싶었지만 한시도 지체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침대에서 내려오려는데 칼로 관자놀이를 찌르는 듯한 두통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다시 침대에 걸터앉고 말았다.

 

 잠시 동안 숨을 고르며 두통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나 응급실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가 나타나 윤전의 손목을 낚아채고는 원래 주인에게 몸을 돌려주라고 소리칠 것만 같았다. 윤전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고 병원 복도에 어울리지 않는 하이힐 소리가 울렸다.

 

 바깥은 어두웠다. 정신을 잃고 응급실에 실려 온 후 서너 시간은 훌쩍 지난 것 같았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병원에서 나가고 보자는 생각뿐이었다.

 

 응급실을 나와 도로로 내려설 때였다. 너무 마음이 앞섰는지 중심을 잃고 발목을 삐끗했다. 앞으로 몸이 쏠리며 넘어지려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윤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괜찮아요?”

 

 중저음의 깨끗한 목소리.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상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게 바로 운명이라는 건가.

 

 윤전은 제 심장소리가 밖으로 들릴까 걱정하며 뒤를 돌아봤다.

 

 “네, 괜찮아요. 고마워요.”

 

 여전히 허리를 감싸고 있는 그의 손을 조심스레 걷어내며 그녀는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잠깐만 기다리면 된다니까 왜 도망가요?”

 “아, 도망가는 게 아니라...”

 “현정씨 퇴원해도 된대요.”

 “감사합니다. 그럼 저 이만...”

 “와, 너무하네.”

 

 상원이 그녀를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가 실수라도 한 걸까. 윤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상원은 금세 얼굴 표정을 풀었다.

 

 “저, 생명의 은인인데 이렇게 그냥 가라구요?”

 “아, 그럼 어떻게... 어떤 보답을... 맞다, 제 병원비 내주신 거죠? 얼마에요?”

 

 병원비 얘기에 상원이 시시하다는 얼굴로 손을 저었다.

 

 “정말 보답하고 싶어요?”

 “네...”

 “몸 상태 괜찮은 거 맞죠?”

 

 윤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원이 집요하게 눈을 맞추는 바람에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긴 했지만, 성별을 떠나 누군가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맞춰본 적은 처음이었다. 윤전의 얼굴이 타들어갈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럼 저랑 저녁이나 먹으러 갑시다. 제가 추천하는 식당은 믿어도 되거든요.”

 

 상원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윤전이 선뜻 손을 잡지 못하자 그가 그녀의 손을 끌어가서 꼭 잡았다. 절대로 놓고 싶지 않은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상원에게 이끌려 가다시피 한 지하주차장에는 BMW가 주차되어 있었다.

 

 “타요.”

 

 그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미소를 보자 윤전의 가슴이 다시 두근거렸다.

 

 내가 이런 완벽한 남자, 아니 왕자님과 데이트를 하게 될 줄이야.

 

 조수석에 앉아 상원의 옆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자꾸만 그의 입술에 눈이 갔다. 붉고 도톰한 입술은 얼마나 부드러울까. 그리고 그 안의 뜨거운 혀는 또 얼마나...

 

 윤전은 낯 뜨거운 상상을 하는 속마음을 들킬까봐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바라봤다.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은 언제나처럼 행복해 보였다.

 

 그런 광경들을 볼 때면 윤전은 언제나 자기 혼자 고립된 섬에 갇혀 있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러나 상원과 함께 있는 오늘만큼은 윤전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았다.

 

 상원이 데려간 곳은 남산 자락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잘 다듬어진 나무들로 둘러싸인 고성 같은 건물이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단골인 듯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지배인이 반갑게 맞으며 안쪽에 있는 룸으로 안내했다.

 

 미리 주문해놓은 것처럼 테이블에는 애피타이저와 와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윤전은 벌어지는 입을 다물기 위해 입술에 힘을 주었다. 잠시 후 웨이터가 들어와 와인을 따라주었다.

 

 “시음하시겠습니까?”

 

 웨이터가 와인을 잔에 따르려 하자 상원이 그를 살짝 저지하며 말했다.

 

 “됐습니다. 제가 직접 할게요.”

 

 웨이터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 룸을 나갔다. 상원이 자신과 윤전의 와인 잔에 레드와인을 채우고 건배를 제의했다. 이런 곳에 난생 처음 와 본 윤전은 어색하게 잔을 들어올렸다.

 

 “우리의 만남을 위하여.”

 

 상원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의 운명을 위하여. 윤전은 속으로만 되뇌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포도 주스처럼 달콤한 맛일 줄 알았던 와인은 시금털털했다.

 

 “와인 어때요? 현정씨가 너무 스윗해서 일부러 드라이한 걸로 주문했는데.”

 “좋아요.”

 

 윤전은 드라마의 여주인공처럼 손으로 풍성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물론 가볍게 미소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현정씨처럼 아름다운 사람하고 같이 있으니 아무리 저라도 음식 맛을 모르겠네요.”

 

 상원이 메인 디시로 나온 스테이크를 썰며 말했다.

 

 윤전이에요, 고윤전. 윤전은 다시 속으로만 말했다. 이게 다 탈을 뒤집어쓴 인형극에 불과하다고 해도, 적어도 이름만이라도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신분증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하면 그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무난하게 감사인사를 했다.

 

 “그럼 키스해 주시겠습니까?”

 “네?”

 “들었잖아요. 키스해 달라고 했습니다.”

 

 상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윤전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과 불과일 센티미터 거리에 있었다.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온몸의 신경세포가 어쩔 줄 모르고 날뛰었다. 하지만 촌스럽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윤전은 애써 자연스러운 척 입술을 내밀었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입술 위에 내려앉았고,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뒷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입술을 겹쳐왔다.

 

 당황한 윤전이 숨을 내쉬자 입술 사이에 틈이 생겼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혀가 그녀의 입안 깊이 파고 들어왔다.

 

 생애 첫 키스, 마흔 넷의 첫 키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입술에 그리고 혀끝에 전해지는 강렬한 느낌이 온몸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배가 당기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소원이, 이 몸으로 하고 싶었던 단 한 가지 일이 이뤄지는 것일까.

 

 윤전이 아름다운 몸으로 하고 싶었던 일은,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 안겨보는 것이었다. 오늘 이 사람과 잔다면 흔하디흔한 원나잇이 되겠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아무리 망상을 좋아하는 윤전이라도 그 정도의 현실 감각은 갖고 있었다.

 

 “먹어요.”

 

 상원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제 자리로 돌아가 앉은 그는 태연한 얼굴로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고 있었다. 뭔가를 전혀 먹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윤전은 자기 몫의 스테이크를 잘랐다.

 

 고기에서 붉은 피가 배어나와 하얀 접시를 물들였다. 그걸 보니 더더욱 식욕이 떨어졌지만, 네모난 고기조각을 억지로 입에 밀어 넣었다. 조금 전 황홀했던 키스의 감각은 사라지고 피 묻은 지우개를 씹는 기분이었다.

 

 와인을 마시며 디저트까지 먹고 나니 거의 열시가 가까웠다. 어느 정도 술이 오른 상원은 하얀 볼이 복숭아 빛으로 물들어있었다.

 

 “현정씨, 피곤하지 않아요?”

 

 올 것이 왔구나. 상원의 갑작스런 질문에 발바닥에 가라앉아있던 취기가 단숨에 머리끝으로 올라왔다. 뜨거워진 볼을 식히려 손등을 가져다댔다.

 

 이제 밖으로 나가 함께 밤을 보내게 되는 걸까. 이렇게 완벽한 남자의 벗은 몸은 어떤 모습...

 

 윤전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알레르기 쇼크도 있었으니 힘들겠어요. 여기서 내가 더 욕심 부리면 안 될 것 같아서.”

 “네?”

 “대리운전 불렀어요. 집에 데려다줄게요.”

 

 상원의 담백한 말에 술이 확 깼다. 동시에 야릇한 상상에서도 깨어났다. 복잡한 감정이 그녀를 쪼아댔다. 한쪽은 그와 같이 밤을 보내고 싶다고 조르라고 했고, 한쪽은 그에게 안겨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던 자신을 질책했다.

 

 키스까지 해서 사람을 그렇게 흔들어놓고 그냥 집에 보내려는 상원에게 원망 비슷한 감정도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엇보다 안도감을 느꼈다.

 

 윤전에게 기적처럼 나타난 왕자님은 적어도 처음 보는 여자와 원나잇을 하는 저질스런 족속은 아니라는 뜻이니까.

 

 대리기사를 기다리는 동안 레스토랑 정원에서 상원과 키스를 했다. 온몸이 그의 품안에서 녹아버릴까봐 걱정이 될 정도로 뜨거운 키스가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여기 내려주시면 돼요.”

 

 윤전의 말에 대리기사가 길가에 차를 세웠다. 상원이 얼른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주며 물었다.

 

 “또 만날 수 있을까요?”

 

 또 만나고 싶어요. 윤전의 마음속에서 쩌렁쩌렁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녀는 그 외침을 억지로 무시하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고 우리 내일 만나죠.”

 “내일...이요?”

 “그래요, 내일 만나자구요.”

 

 조금 전까지 윤전의 입술에 닿았던 아름다운 입술에서 나오는 부탁을 그녀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네...”

 

 만나겠다고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상원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말인가? 윤전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올려다봤다.

 

 “핸드폰 줘 봐요. 내 번호 찍어줄 테니.”

 

 윤전이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내밀었다. 현정의 핸드폰이었다. 윤전은 얼른 전원을 켜며 변명했다.

 

 “저, 배터리가 얼마 없어서 꺼놨었거든요.”

 

 핸드폰을 받아든 상원이 키패드에 자신의 번호를 찍은 다음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도로 건네며 윤전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0.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접촉이었는데, 윤전에게는 벼락처럼 강렬하게 느껴졌다.

 

 “잘 자요.”

 

 뒷좌석에 탄 상원이 차창을 내리고 윤전에게 손을 흔들었다. 윤전은 그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박힌 듯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상원과 함께 있을 때는 몰랐지만, 극도의 긴장 탓에 쓰러질 듯 피로가 밀려왔다. 언제까지 자신의 정체를 감출 수 있을까. 잠깐의 행복을 맛보고 나니 바닷물을 마신 것처럼 더욱 갈증이 났다.

 

 윤전은 생각에 잠긴 채로 바닥을 보며 걸었다. 성대가 눌릴 정도로 고개를 끌어내려 바닥을 보고 걷는 일. 그건 윤전에게 가장 익숙한 일 중 하나였다.

 

 집 앞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고윤전씨, 잠깐 얘기 좀 해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목소리. 자신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빌라 주차장에 자신의 몸이 서 있었다. 윤전은 입을 떡 벌렸다. 자신의 몸은, 전혀 어울리지 않게 요즘 유행하는 화장을 하고 흰색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너무나도 추하고 너무나도 슬픈 몰골이었다. 그 슬픈 형상이 차츰 가까이 다가왔다.

 

 싫어. 사실 난 널 한 번도 좋아했던 적이 없어.

 

 “오,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윤전은 뒷걸음질을 치며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요. 그냥 얘기만 하자는 거예요.”

 

 안 돼. 내게서 이 몸을 빼앗아 가지마. 하루만, 내일 하루만이라도. 난 이 몸이 필요해. 누구보다 절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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