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희는 윤전의 집으로 가기 전에 서둘러 백화점으로 갔다. 현정의 몸에 들어간 윤전 앞에 사이즈도 안 맞는 옷을 입은 추레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거부감이 더 클 것이다.
여성복 매장에서 윤전의 몸에 맞는 흰색 레이스 원피스를 사서 갈아입은 가희는 근처 헤어숍에 가서 머리도 손질하고 메이크업도 받았다.
“어머, 이렇게 꾸미시니까 정말 딴 사람 같은데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다소 과장된 말투로 칭찬을 했다. 가희는 거울을 보며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어보았다. 훨씬 보기 좋았다. 어쩐지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제 기다리는 일뿐이다. 가희는 윤전의 집으로 향했다.
건물 밖에서 본 5층 창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굳이 5층까지 올라가 확인해 보지 않아도 그녀가 집에 없다는 것쯤을 알고 있었다. 가희는 상대의 몸에 들어가 있는 동안 기억뿐만 아니라 약간의 텔레파시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조한 마음으로 빌라 주차장 뒤 화단에 걸터앉아 윤전을 기다렸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어두운 곳에 앉아있는 가희를 보고 놀랐는지 손을 맞잡고 빠르게 지나갔다. 가희는 정신을 집중하려 애썼다. 그러자 윤전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숨을 크게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연, 젊은 여자가 골목 끝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현정의 몸속에 있는 윤전이었다. 가희는 핑크색 원피스를 입은 현정의 외모에 압도되었다. 현정이 보여준 사진보다 훨씬 아름다운 아우라가 풍겼다.
윤전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이고 오느라 주차장 뒤편에 서 있는 가희를 보지 못했다. 아름다운 얼굴 뒤에 깊은 우울함 때문에 가희는 더 마음이 아팠다.
“고윤전씨, 잠깐 얘기 좀 해요.”
그제야 고개를 든 윤전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자신의 몸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윤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희가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오,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윤전이 고개를 흔들며 뒷걸음질을 쳤다.
“잠깐만요. 그냥 얘기만 하자는 거예요.”
가희는 내심 당황했다. 다른 사람들의 리터너 역할을 할 때는 어느 정도 교감이 되면서 상대방을 진정시킬 수 있었는데, 윤전은 전혀 교감이 되지 않았다. 워낙 자기 자신에 대한 반감이 심해서일까.
“진정해요, 윤전씨. 전 윤전씨 마음 이해할 수 있어요.”
“진정? 이해? 당신 같이 예쁜 사람이 뭘 이해해?”
윤전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 현정씨 아니에요. 전 가희라고 해요. 윤전씨에게 몸을 돌려주러 온 사람이에요.”
“나한테 몸을 돌려준다구요? 이 몸을 빼앗아가려는 거겠죠!”
“아니에요. 저를 믿어주세요. 저 다 봤어요. 윤전씨 힘들었던 기억이요. 그래서 얼마나 아픈지도 알아요. 그건 윤전씨 잘못이 아니에요. 윤전씨를 상처 준 사람들이 나쁜 거예요.”
가희를 바라보는 윤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견고한 얼음벽 같았던 윤전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진 듯, 약하게 교감할 수 있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러니까 제발...”
“도와줘요? 이렇게 추한데 어떻게? 다시 태어나게라도 해 주나요?”
“윤전씨, 자신을 똑바로 봐요. 당신도 충분히 아름다운 면이 있어요. 그렇게 스스로 비하할 필요가 없다구요.”
“그런 말에 속을 줄 알아요? 웃기지 마. 내 주제는 내가 제일 잘 알거든!”
“그러지 마요. 일단 몸을 되찾으면 제 말이 맞았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윤전씨, 저를 믿어주세요.”
가희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듯 조심스럽게 윤전에게 다가갔다.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윤전의 손목을 잡을 수 있을 거리에 왔을 때, 윤전이 몸을 홱 틀었다. 거미줄처럼 가늘게 이어지던 교감이 완전히 끊어졌고, 윤전이 큰길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윤전씨. 기다려요!”
가희도 전력을 다해 달렸다. 하지만 늘씬한 현정의 몸으로 도망쳐버린 윤전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골목을 벗어나는데, 앞서가던 윤전의 발이 도로의 파인 부분에 걸리며 그대로 넘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가희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윤전에게 다가갔다. 윤전은 발목의 통증이 심한지 주저앉은 채로 점점 가까워지는 가희를 막으려는 듯 손바닥을 쫙 펴서 앞으로 내밀었다.
“이러지 마. 하루만 더, 하루만 더 빌릴게요. 제발요.”
윤전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이미 윤전은 욕망이라는 악마에 사로잡혀 버렸다. 대화로 설득해서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가희는 최종판단을 내렸다.
이정도 거리면 충분하다.
가희는 윤전에게 몸을 부딪치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윤전이 벌떡 일어났다. 가희가 부딪혀 오리라고 예상한 듯 구두가 벗겨진 채 맨발로 절뚝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눈물을 가득 담은 눈은 윤전이 고개를 가로저을 때마다 창백한 볼로 흘러내렸다. 몸 안에서 채찍을 휘두르는 것처럼 윤전의 심적 고통이 가희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가희의 눈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그렇지만 강행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다. 가희가 윤전을 향해 몸을 날리려는 순간, 트럭이 그들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운전기사는 통화중이었다. 윤전은 그런 줄도 모르고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안 돼!”
트럭이 윤전을 덮치려는 찰나, 가희는 온몸으로 윤전을, 현정의 몸을 밀쳐냈다. 두 사람의 어깨와 어깨가 맞부딪혔고, 다음 순간 현기증, 공포, 충격 등이 무거운 담요처럼 가희를 덮쳤다.
길가로 밀려나 쓰러진 가희의 망막에 이제는 자기 자신의 몸으로 돌아간 윤전이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로 떠오르는 영상이 맺혔다. 하얀 레이스 원피스를 입은 윤전은, 으스러지기 쉬운 꽃잎처럼 보였다.
지나가던 여자의 길게 이어지는 비명소리, 누가 119좀 불러줘요, 하는 소리들이 가희의 귓가에서 윙윙 울리다가는 금세 메아리처럼 흩어져버렸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윤전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팔다리는 기이하게 뒤틀린 채였다. 윤전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도로를 새빨갛게 물들여놓았다.
트럭 운전사는 쓰러진 윤전의 옆에 황망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사고 현장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가희는 몸을 일으키려 오른손을 바닥에 짚다가 자기로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팔을 보니 피를 뒤집어쓴 하얀 뼈가 뾰족한 창처럼 피부를 뚫고 나와 있었다. 숨을 들이쉬자 폐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시폰 원피스 자락이 말려 올라가 하얀 두 다리가 드러나 있었다.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왼손으로 치맛자락을 끌어내렸다.
현정의 몸을 찾긴 했다. 하지만 얼마나 망가진 걸까. 과연 현정에게 무사히 돌려줄 수 있을까.
제대로 일을 해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느끼는 가희의 눈꺼풀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여기요, 여기에 다친 사람 또 있어요. 이쪽은 살아있어요! 빨리요!”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쪽은 살아있다니, 그럼 윤전은... 가희는 윤전이 무사하기를 기도했다.
구급차에서 내린 대원들이 그녀를 들것에 실어 구급차 안으로 옮겼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병원이 어디죠?”
“비산병원입니다.”
“그럼 거기로 갑시다.”
구급대원들이 가희의 얼굴에 산소마스크를 씌우며 말했다. 어서 현정에게 가야 하는데... 밀려드는 허탈감 속에서 가희는 또 다시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