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 속을 헤매고 또 헤매도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괴물의 울음소리, 소름끼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뚜걱, 뚜걱, 뚜걱. 여덟 개의 발을 가진 거미처럼 일정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이러다가 괴물의 먹이가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다급해진 현정은 있는 힘을 다해 달린다. 그러나 미로의 끝에는 언제나 높다란 벽이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벽의 틈새에서 회색 연기가 새어나온다. 지독한 악취가 난다. 괴물의 입에서 뿜어 나오는 악취다. 뒤를 돌아 달리려 했지만 그럴 수 없다. 발밑이 어느새 늪으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목이, 무릎이, 허벅지가 끈적거리는 타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싫어! 난 나갈 거야!
흐느끼며 소리치다가 눈을 떴다. 벽시계가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창밖에는 이른 새벽의 푸른 기운이 남아 있었다. 악몽이었구나. 가쁜 숨을 몰아쉬던 현정은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을 열어봤다.
가희에게서는 부재중 전화도 메시지도 없었다. 오늘 저녁까지 연락을 주겠다고 했으니 아직까지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조바심이 나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몸이 바뀐 뒤 나타나는 어지럼증 때문인지 입안이 까끌까끌하고 목이 아팠다. 무거운 머리를 들어 올리며 주방으로 가서 시원한 물을 한 컵 마셨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가희의 몸은 윤전의 몸보다 훨씬 가볍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옷도 갈아입지 않고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다.
옷방으로 가서 편안한 티셔츠와 실내복 바지로 갈아입었다. 옷장 문 안쪽 거울에 가희의 모습이 비쳤다. 가희는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인상이면서도 귀여운 분위기를 풍겼다. 미소를 지어보니 왼쪽 볼에만 보조개가 폭 패었다. 누가 꼬집어놓은 것처럼 쏙 들어간 보조개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고마워요, 가희씨.”
현정은 거울을 보며 소리 내어 말했다. 그리고 거울 속 가희를 응시했다. 선량해 보이는 크고 검은 눈동자를 보며 자신을 믿으라던 가희의 야무진 목소리를 떠올렸다.
어느새 밖이 환하게 밝아왔다. 현정은 기지개를 켜고 거실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평소 요가할 때처럼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자 갑갑했던 마음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하지만 머릿속을 비우는 건 무리였다. 이런저런 걱정이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걱정되는 건 회사였다. 어제도 무단결근을 했는데 오늘까지 연락 없이 빠지면 정식채용이 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했다. 이런 일이 생겼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인턴 기간 도중에 무책임하게 사라진 직원으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은데...
팀장에게 연락해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도 생각해 봤다. 그렇지만 경찰에 신고하기를 주저한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꺼려졌다. 괜한 주목을 받게 되어 시끄럽게 될까 두려웠다. SNS에 소문이 퍼지고, 기자들이 찾아오고... 그렇게 되면 엄마가 알게 되는 것도 큰일이었지만, 그런 상황은 현정 자신도 원치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눈에 띄게 예쁜 외모 때문에 항상 주목을 받아야 했다. 소위 길거리 캐스팅이라는 것도 수없이 당해봤지만, 연기에는 관심도 소질도 없었다. 노래나 춤도 마찬가지였다. 현정은 타고난 음치에 몸치였다. 어쩌다 노래방에 가서 그녀의 노래를 들은 친구들은 그나마 신은 공평하다며 현정을 놀리곤 했다.
예쁜 외모 때문에 상처받는 일도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같은 반에 영주라는 아이가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단짝 친구였던 영주와 같은 고등학교에 가고 같은 반까지 되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부담도 영주와 함께 있었기에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평생 절친으로 지낼 거라 믿었다. 그러나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 두 사람의 우정은 영원히 깨져버렸다. 남자애 때문이었다. 영주가 좋아하는 남자애가 현정에게 고백을 한 것이다. 영주는 울며불며 현정을 비난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애한테 현정이 꼬리를 쳤다는 것이다. 그런 게 아니라고 남자애의 일방적인 고백이었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영주는 듣지 않았다. 그리고 반 아이들에게 나쁜 소문을 퍼뜨렸다. 이현정은 친구가 좋아하는 남자를 빼앗은 애라고. 얼굴만 예뻤지 속마음은 괴물보다 추하다고.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예쁜 척 한다는 말을 듣기 싫어 일부러 더 털털한 척 했고, 갖고 싶은 것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양보했다.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양보하는 습관이 들어서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서도 그러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했다. 남들의 이목을 끄는 것도 싫었다.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에 머리카락이 나와도 항의하지 못하고 조용히 수저를 놓고 가는 식이었다. 그런 현정이니 몸이 바뀐 일로 회사에서 남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건 진저리나도록 싫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일이 해결된 다음 팀장님을 찾아가 솔직히 말씀드리고 인턴을 그만둔다고 하자. 아쉽지만 어쩔 수 없잖아. 기회는 또 올 거야.
현정은 머릿속의 생각들을 몰아내기 위해 대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침대시트와 이불, 베개커버도 전부 새 것으로 갈고, 쓰던 것들은 세탁기에 넣었다. 그리고 창틀의 먼지도 닦고, 화장대 서랍 속 물건들도 전무 빼내 종류별로 정리했다.
옷장의 옷도 마찬가지였다. 뒤죽박죽 섞여있는 것들을 차곡차곡 개어놓고, 재킷 같은 것들은 옷걸이에 나란히 걸었다. 등에 땀이 나기 시작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현정은 한 문제 한 문제 풀어나가듯, 침실과 옷방, 주방과 거실, 욕실을 정리하고 깨끗이 청소했다. 중간에 출출해 라면을 끓여먹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몸을 쉬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멍하니 있을라치면 불안과 초조가 목을 죄어왔기 때문이다.
청소를 마쳤을 때는 온몸이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현정은 욕실로 들어가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왔다. 자연히 시선은 벽시계로 향했다. 5분만 있으면 저녁 6시였다.
슬슬 가희에게 연락이 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다가는 초조해서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될 수 있으면 연락이 오길 기다리려 했지만 더 이상 참는 건 무리였다. 현정은 가희가 적어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신호만 갈 뿐 연결이 되지 않았다. 잘못 걸었나 싶어 몇 번이고 다시 걸어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안 좋은 예감이 가슴을 훑고 내려갔다.
현정은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내려 애쓰며 중국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수창과 통화하기 위해서였다.
- 네, 다래성입니다.
언제나 주문 전화를 받는 주인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한데 혹시 수창이랑 통화할 수 있을까요?”
- 수창이요? 잠시만요.
수화기 너머에서 아주머니가 수창아, 전화받아봐, 라고 외쳤다.
- 여보세요. 강수창입니다.
“수창아, 나야.”
- 가희 누나?
목소리만 듣고 가희라고 착각했나보다.
“아니, 나 현정이.”
- 아, 현정이 누나. 맞다. 어젯밤에 둘이 만난 거죠?
“응. 근데 혹시 가희씨한테 무슨 소식 없었어?”
- 저한테는 연락 없었는데... 왜요?
“오늘 저녁쯤에는 연락을 주겠다고 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고, 전화도 안 받아서...”
- 아아, 걱정 마요. 가희 누나 원래 일하고 있을 때 전화 잘 안 받아요.
“그래? 아직 그 사람... 못 만난 걸까?”
- 글쎄요...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응. 고마워.”
전화를 끊으려는데 수창이 현정을 불렀다.
- 누나!
“응?”
- 잘 될 거예요. 너무 걱정 말아요.
수창의 진심어린 위로에도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일곱 시가 됐을 때, 현정은 엄마를 만나러 병원에 가기로 결심했다. 어제 저녁에 찾아가지 못한 것도 마음에 걸렸고, 집에서만 몸을 졸이고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무엇보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현정은 가희의 옷으로 갈아입고 봉투 안에 남아있던 비상금을 전부 챙겼다. 그리고 엄마가 입원해 있는 비산병원으로 향했다. 엄마에게는 가희의 몸속에 들어간 자신을 옆집에 사는 동생이라고 소개할 작정이었다.
병원 앞 정류장에 내려 근처 꽃집에서 프리지아 꽃다발을 사고, 엄마가 좋아하는 빵집에 가서 치즈케이크도 샀다.
병원에 들어서고 나서 아차, 이건 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일 저녁이었지만 국내 유수의 병원답게 환자와 의사, 보호자 등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이 중에 가희를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사람 많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자신이 없어 계단으로 올라갔다. 엄마가 입원해있는 8층까지 올라가려니 약간 숨이 찼지만, 가희는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하는 편인지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두근두근, 병실에 가까이 다가가자 긴장으로 가슴이 뛰었다.
연기에 소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내가 엄마 앞에서 ‘가희’를 연기해낼 수 있을까?
기합을 한 번 넣고 병실 안으로 들어간 현정은 엄마의 핼쑥한 얼굴을 보자 명치끝이 아려왔다. 겨우 하룻밤 못 만났을 뿐인데 엄마는 밤새 기력을 다 소진한 사람처럼 지쳐보였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누구... 세요?”
엄마가 약간 경계하는 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저는 현정이 언니 옆집에 사는 가희에요.”
“네, 안녕하세요? 근데 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
낯선 사람 앞에서 엄마는 애써 태연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혹시나 딸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돼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아, 다름이 아니라 현정 언니가 어제 엄마한테 못 와봤다고. 감기도 감기지만 인턴 과정이 막바지라 너무 바쁘다고 어머니한테 이것 좀 전달해 달라고 했어요.”
엄마에게 꽃다발과 케이크를 내밀었다. 엄마는 주저하며 선물을 받아들었다. 현정은 목이 메어오는 걸 억누르며 방긋 웃었다.
“아니, 무슨 하루 정도 못 볼 수도 있지. 이런 걸 전해달라고 일부러 부탁을 했다니...”
“최 여사님하고 같은 입원실 분들하고 나눠드셔야 하니까 꼭꼭 제일 큰 케잌으로 사가라고도 하던데요.”
“아유, 고마워요. 바쁘면 바빠서 그런가보다 이해하지. 이웃 아가씨도 바쁠 텐데 괜히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저 이 근처 카페에서 알바하거든요. 아, 그리고 현정 언니가 꼭 전해 달라고 한 말이 있어요.”
“그래요? 뭔데요?”
“엄마, 사랑해요... 라구요.”
현정은 가희의 입을 빌어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노란 프리지아를 품에 안은 엄마의 눈자위와 코끝이 빨갛게 물들어갔다. 더 보고 있다가는 현정도 눈물이 터져버릴 것 같아 급히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가희씨라고 했죠? 잠깐만요.”
현정은 얼른 돌아서서 손등으로 눈에 고인 눈물을 찍어내고 미소 띤 얼굴로 엄마를 봤다.
“괜찮으면 나 가희씨 손 좀 잡아볼 수 있어요? 이렇게 젊은 아가씨 보니까 우리 딸 생각이 나서 내가 주책인 줄 알면서도...”
현정은 엄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엄마가 그녀의 손을 지긋이 잡아주었다. 엄마의 손끝은 차가웠지만, 딸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따뜻하다는 게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입에서 엄마, 엄마, 라는 말이 터져나올까봐 현정은 이를 꽉 악물었다.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빨리 회복하시길 바랄게요.”
“그래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잘 가요. 아, 참 저기 좀 열어볼래요?”
엄마가 가리키는 사물함 서랍을 열어보니 색색의 실 팔찌가 들어있었다.
“내가 밤에 잠이 안 올 때마다 심심풀이로 만든 건데... 뭐 줄 건 없고, 괜찮으면 그거 하나 가질래요?”
“네, 어머니. 고맙습니다.”
“가희씨한테는 빨간색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현정은 빨간색 팔찌를 집어 팔목에 가져다댔다. 그러자 엄마가 정성껏 매듭을 지어주었다.
“그럼 잘 가요. 근데 가희씨 볼수록 우리 딸 같다. 둘이 별로 닮지도 않았는데.”
“감사합니다. 저 갈게요.”
도망치듯 병실을 나오는 현정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현정은 제멋대로 흘러넘치는 눈물을 티셔츠 소매로 닦아내며 걸음을 재촉했다. 엄마를 만났으니 집으로 빨리 돌아가야 했다.
이번에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너무 빨리 도착했다 생각했는데 1층이 아니라 12층이었다. 그제야 엄마 생각을 하느라 1층 버튼을 누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그래도 엘리베이터가 거꾸로 올라가는 것도 모르다니.
현정은 12층에서 내린 다음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다. 방금 현정이 내린 엘리베이터 말고 짝수 층을 운행하는 두 대는 전부 1층에 있었다.
12층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그러고 보니 인테리어도 다른 병동보다 고급스러웠다. 뭐하는 층인가 둘러봤더니 안내판에 VIP 병동이라고 쓰여 있었다.
내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 엄마도 4인실이 아니라 VIP 병동에 모실 수 있을 텐데.
현정은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바뀌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