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몸의 주인이, 김익호라는 사람인가요?”
고통스런 기침이 멈추고, 간신히 숨을 고른 진우가 여자에게 물었다. 엘리베이터는 10층을 지나고 있었다.
“네? 회장님 아니세요?”
여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길게 설명할 시간은 없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기 전에 여자를 설득해야 한다.
“어제 뉴스에서 출근길에 부딪힌 사람들 몸이 바뀌었단 뉴스는 보셨죠?”
“네.”
“저는 89년생 서진우라는 사람이구요. 영혼치기를 당해서... 그러니까 김익호 회장이라는 사람한테 몸을 빼앗겼어요.”
“몸을 빼앗겨요? 영혼치기요?”
“미안해요. 지금은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일단 병원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저 좀 도와주세요.”
“그러니까 그쪽이... 김익호 회장님이 아니라 서진우씨란 말씀이시죠? 영혼치기... 라는 게 몸이 바뀐 걸 말하구요.”
“맞아요. 저는 단순히 몸이 바뀐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계획적으로 제 몸을 훔쳐갔다는 거예요. 믿기 힘드시겠지만...”
또다시 목이 갈라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바튼 기침이 나왔다. 여자가 진우의 등을 가볍게 쓸어주며 말했다.
“믿어요.”
“네?”
“서진우씨 말 믿는다구요. 사실은 저도 지금 제 모습이 아니거든요.”
“그럼 그쪽도...”
“저도 어제 아침에 몸이 바뀌어서 제 몸을 찾는 중이에요.”
자그마한 체구에 귀염성 있는 얼굴, 이 몸의 주인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몸을 찾으려 할 것 같은데 무슨 사연이 있기에...
“그럼 아까 그 덩치 큰 사람한테 쫓기는 건가요?”
여자의 질문이 진우의 생각을 멈추게 했다.
“맞아요. 그놈이 저희보다 먼저 1층에 도착하면 어쩌죠?”
“서진우씨, 뛸 수 있겠어요?”
“네?”
“엘리베이터에서 정문까지 뛸 수 있겠냐구요. 정문만 나가면 병원 앞에서 대기하는 택시들이 있으니까 달아날 수 있을 거예요.”
“한 번 해 봐야-”
콜록콜록. 간신히 누르고 있던 기침이 터져나왔다.
“아, 이런 상태로는 안 되겠어요.”
“어디 숨을 만한 곳이 없을...까요?”
“숨을 곳... 아, 6층 대강당이요. 그쪽 뒤에 사람이 없는데-”
여자가 손을 뻗어 6층을 누르려는데 엘리베이터는 이미 6층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자 여자가 얼른 4층을 눌렀다.
“숨을 만한 곳이 생각났어요. 제가 이 병원을 좀 알거든요.”
여자가 자신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 4층입니다.
안내방송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여자가 진우의 팔목을 꽉 잡았다. 두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4층 병동에는 환자들과 보호자들, 간호사들이 드문드문 지나다니고 있었다. 환자복을 입은 진우와 진우를 부축해주는 여자도 그들 속에서는 평범한 환자와 손녀쯤으로 보일 것이다.
“신관 4층으로 가면 건강검진센터가 있어요. 거기 화장실로 가요. 거기라면 아까 그 남자도 쫓아오지 못할 거예요.”
여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까지 병원 구조를 잘 알고 있다니, 병원 관계자인지도 모른다. 진우는 여자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궁금증은 일단 미뤄두기로 했다. 지금은 몸을 빨리 움직이는 게 우선이었다.
진우는 여자를 따라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병든 노인의 몸은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동관에서 신관으로 연결되는 통로까지 왔을 때 진우의 다리가 풀렸다. 그는 거의 매달리듯 복도 손잡이를 잡았다.
“많이 힘드세요?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여자가 왼쪽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부축해주었다. 한쪽은 여자에게 한쪽은 손잡이에 의지하면서 진우는 이를 악물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통로를 지나니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의 국제 건강검진 센터가 나왔다. 병원이라기보다 호텔 로비 같은 분위기였다. 널찍한 복도는 헐떡이는 숨소리를 내기 민망할 만큼 조용했다. 건물 미화원 아주머니가 청소 카트를 밀고 진우의 옆으로 지나갔다. 맞은편에서는 말쑥한 양복을 입은 남자가 오고 있었다. 자신감 넘치는 호감형의 얼굴이었다. 그런 남자가 진우를 보고는 표정이 확 변했다.
“회장님!”
남자는 ‘김익호 회장’을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 진우와 여자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괜찮으십니까?”
“응.”
진우는 짧게 대답했다. 남자의 눈썹이 아래로 쳐졌다. 남자는 눈웃음을 짓는 와중에도 진우를 부축하고 있는 여자를 슬쩍 훑어보았다.
“VIP실에 입원해 계시다는 말씀은 들었는데, 4층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저한테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말하는 자세로 봐서 남자는 놈들과 한 패는 아닌 듯 했지만,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었다.
“병실에만 있으려니 답답해서 나왔네. 그만 일 보게.”
“힘드시면 휠체어라도 갖다 드릴까요?”
남자가 손을 맞잡고 비비며 말했다.
“괜찮으니 일 보게.”
진우는 아까보다 훨씬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남자는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다시 조금 전의 반듯한 태도로 물러났다. 불안한 진우가 뒤를 돌아봤을 때 마침 뒤를 돌아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댔다. 남자가 VIP실에 연락이라도 한다면 진우가 있는 위치가 발각될 것이다.
병실 앞을 지키는 놈은 한 명이었지만 병원 안에 놈들의 패거리가 몇 명이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쪽이에요.”
여자가 복도 모퉁이를 지나, 진우를 데리고 들어간 곳은 공용화장실이었다. 진우의 지하 원룸에 딸린 화장실의 세 배가 넘는 크기였다. 공용화장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남자용 소변기와 세면대, 변기와 기저귀 교환대까지 갖추고 있는 화장실이었다.
“여기 좀 앉으세요.”
여자가 변기 뚜껑을 내려주며 말했다. 진우는 벽면의 큰 거울에 비친 자신이 아닌 자신의 모습을 애써 외면하며 변기 위에 걸터앉았다.
“여기서도 마냥 숨어 있을 수는 없겠네요.”
진우가 쉰 목소리로 말하는 동안 여자는 종이타월에 물을 묻혀 진우에게 건네주었다.
“자, 이걸로 입술만이라도 좀 축이세요.”
“고마워요. 근데 그쪽을 이름을...”
“현정이에요, 이현정.”
“현정씨,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제가 누군지도 모르실 텐데...”
“저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고 있거든요.”
현정의 입 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갔다. 진우는 말라빠진 입술에 물을 축이며 기력을 회복하려 애썼다.
“좀 괜찮으세요? 아직 뛰는 건 무리겠죠?”
“억지로라도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여기에서 나가면 오른쪽으로 저층용 엘리베이터가 있어요. 밖이 보이는 투명한 엘리베이터요. 그걸 탈거예요.”
“투명 엘리베이터요?”
“네, 그 엘리베이터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또 1층 로비를 내려다볼 수 있으니까 유리할 것 같아서요.”
“오히려 놈들에게 노출되기 쉽지 않을까요?”
흠, 현정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 엘리베이터 탔을 때 항상 내려다보기만 해서 거기까지 생각을 못했네요. 만약 그 남자가 1층에서 올려다본다면 불리하겠어요.”
현정이 확연히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 하긴 진우도 그렇지만 현정도 살면서 도망을 칠 일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현정씨는 여기서 일하세요?”
“아, 아뇨.”
“근데 어떻게 여기 구조를 그렇게 잘...”
“저희 엄마가 여기 입원해 계시거든요. 그 전부터 자주 이 병원에 다니셔서 제가 모시고 다니다보니까... 제가 원래 호기심이 많아서 어디든 가면 구석구석 알아놓는 걸 좋아하거든요.”
“제 운이 아직 남았나 보네요. 현정씨 같은 사람을 만나다니.”
후훗, 현정이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그녀도 자신의 몸은 아니라고 했지만 웃는 얼굴에서 선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투명 엘리베이터가 안 된다면, 일반 엘리베이터를 타야할 텐데, 그건 정문에서 거리가 좀 있어서...”
“투명 엘리베이터가 정문에서 더 가깝나요?”
“네, 그렇긴 한데... 아! 계단실 옆에 있는 비상용 엘리베이터를 타면 어떨까요?”
“그건 정문에서 가까이 있나요?”
“그렇게 가깝진 않아요.”
다시 현정이 한숨을 쉬었다.
“투명 엘리베이터는 정문에서 거리가 얼마나 되죠?”
“음... 한 십오 미터쯤?”
진우는 여러 상황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그려봤다. 익호의 몸은 뛰기에 적합하지 않다. 15미터라고 해도 간신히 뛸 수 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와 정문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1층에서 잡힐 위험이 높아지게 된다. 그렇다면 일단 정문에서 가장 가까운 엘리베이터를 타는 편이 그나마 유리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설령 미리 노출된다고 해도 ‘회장님’에게 거칠게 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 부분에 베팅하는 수밖에 없다.
“현정씨, 투명 엘리베이터로 갑시다.”
“괜찮겠어요?”
“괜찮길 바래야죠.”
진우는 현정을 결연한 눈으로 바라봤다. 현정도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제가 먼저 나가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놓을게요.”
현정이 화장실 문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아뇨. 같이 나가요.”
진우의 말에 현정이 손을 내밀었다. 진우는 땀이 배어나온 것도 신경 쓸 겨를 없이 현정이 내민 손을 꽉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