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사상 최악의 경기였던 데스링 배틀.(줄여서 DRB) 한 쪽이 쓰러질 때까지 싸우는 잔인하고도 잔인한 경기이다.
더 끔찍한 건, 이 경기에는 어떠한 규칙도 방침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편 선수를 심하게 다치게 하거나 죽여도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규칙이 없는 것 자체가 DRB만의 규칙이다.
이 끔찍한 경기에서 그나마 갖춰진 것은 경기 진행 방식이다.(이것마저 없었으면 거의 전쟁판이 될 뻔했다)
여기서 진행하는 모든 경기는 무조건 1:1 결투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또, 승자와 패자가 정해지면 승자는 바로 다음 선수와 맞붙는 식으로 진행한다.
마지막으로 해가 질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승리한다.
간혹 마지막 규칙 때문에 공동일등이 생기기도 한다. 이럴 때는 상금을 반으로 나눠 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차지하기 위해 되도록 공동일등 따윈 안 만들려고 한다.
그렇게 끔찍한 하루가 지나고 하루 더 생명을 연장한 선수들은 경기가 끝나자마자 ‘생존자들만의’ 축하 파티를 연다.
이때 생존자들 대부분은 그날 밤 거액의 돈을 들여 거창하게 파티를 연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이 ‘승부’에 목을 매러 가다 얼마 안 가서 목이 날아간다.
도대체 ‘왜’ 어젯밤을 끝까지 버텼는데도 불구하고 대체 ‘왜’ 다음날 경기 앞에서 처참히 무너지냐고?
이유는 이 경기가 바로 실력뿐만이 아니라 운도 따라줘야 하는 위험한 경기이기 때문이다.
사실 선수들은 경기에 입장하기 전 경기를 치를 순서를 번호표로 제비뽑기해서 뽑는데, 이때 앞번호와 뒷번호가 생사를 좌우한다.
예를 들어 보자면, 1번 선수와 2번 선수가 맞붙어 1번 선수가 승리했다고 치자. 그럼 다음 경기에 3번과 4번이 나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1번이 바로 3번과 다시 대결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결국 1번을 뽑은 사람은 그날 살아남으려면 그 경기에 참여한 모든 선수들을 쓰러트려야 하는 식이다.
반면에 맨 끝번호를 뽑은 사람은 그날 우승하려면 고작 사람 한 명만 쓰러트리면 끝나는 것이다.(간혹 앞 선수들의 대결이 길어져 경기에 아예 안 나갔는데도 해가 져서 경기가 끝난다면, 아무 수고 없이 승자가 될 때도 있다.)
경기 중간에 휴식 따윈 없다.
승패가 갈라지면 숨 돌릴 틈도 없이 바로 다음 선수와 싸워야 한다.
그래서 보통 끝번호를 뽑은 사람들이 그날의 우승자가 된다.
그리고, 살아남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 미친 경기를 계속 하는 이유는, 한판만 승리해도 받을 수 있는 엄청난 돈과 인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 살인게임에서 어찌어찌 승리해서 원하는 금액을 받고 유명해져도 모두들 돈에 눈이 멀어 다음날 어제의 천운을 기대하고 경기에 참여했다가 바로 목이 날아가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에는 베테랑이 있듯이, 이 미친 짓을 5년 동안 해왔던 청년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다름 아닌....
“플레리온! 저희 데스링 배틀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화려한 공격과 날쌘 움직임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우리의 영웅, 입장하십니다!”
확성기 소리가 경기장 안으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관중들은 목이 터질 듯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 틈을 타 우윳빛 매력적인 칼단발에 부드럽고도 날렵한 눈매를 가진 청년이 링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흰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은빛의 펜싱 칼을 쥐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펜싱을 배우지는 않았다. 단지 그와 맞는 무기일 뿐.)
그가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환호성이 거세졌다.
그를 상대로 싸워야 할 불쌍한 상대는 불행히도 벌써부터 겁을 먹고 있었다.
플레리온이 갑옷 점검을 마치자, 바로 경기를 시작한다는 안내가 나왔다.
“그럼,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3....2.....1...! 시작!”
시작 소리와 함께 덩치 큰 상대방의 주먹이 먼저 플레리온 쪽으로 날아왔다. 플레리온은 재빨리 뛰어올라 상대의 필살기였던 주먹을 가볍게 피했다. 그러고는 상대의 어깨를 지지대로 삼고는 공중으로 날아올라 공중제비를 돌며 펜싱 검으로 떨어지는 가속력을 이용해 상대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피 보는 걸 즐기지 않는’ 플레리온 만의 기술 중 하나였다.
상대는 플레리온의 일격을 받자마자 바로 기절했다.
동시에 폭죽 소리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싱겁군.”
할 일을 마친 그가 중얼거렸다.
피융. 피융.
플레리온은 이 지겨운 소리에 평소에 쳐다보지도 않았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이어 ‘플레리온 선수의 1813번째 승리를 축하 합니다’라고 써진 현수막이 하늘 높이 올라갔다.
나도 저 현수막처럼 하늘 높이 올라갈 수 있었으면.
플레리온은 감흥 없이 현수막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몇 초 뒤 생각을 마친 그는 관중석을 쭉 둘러보았다. 모두들 그를 향해 기립박수를 치고 있었다.
매일 있는 일이였다.
지겹고 무료했다.
그는 이 상황 자체가 끔찍이 따분했지만 자신이 우승 한 번 하는 걸 보기 위해 엄청난 입장료를 내고 들어온 관객들을 위해 세레모니 한번쯤은 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곧이어 보기 싫을 정도로 집에 많은(사실 거의 집을 가득 채운) 트로피가 하나 더 그의 손에 들어갔고,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다리를 180도로 벌리면서 점프하는 걸로 세레모니를 마무리했다.
관중들은 이마저도 열광했다.
플레리온은 피곤했다.
경기 후 그는 바로 그의 아지트인 경기장 화장실을 들렸다. 1인용 화장실이라 오늘도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는 문을 잠그고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의 그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오른쪽 눈을 살짝 덮는 깻잎머리도 축 쳐져 있었다.
“어떻게 경기 뛰는 것보다 웃는 연습이 더 어려울까...”
그가 거울을 보며 한탄했다.
따르르릉.
마침 그의 핸드폰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플레리온은 수신자를 확인하고는 곧바로 전화를 들었다.
“여보세요? 에릭? 경기 끝나고 지금 화장실이야. 뭐? 지금 똥 싸냐고? 내가 너냐? 알겠어. 곧 그쪽으로 갈게. 썬더스프링스 카페로 가면 되지? 그럼 끊어.”
그가 전화를 끊고 화장실 밖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플레리온 님! 이제야 나오시는군요! 무슨 똥을 그리 오래 싸시는지요! 혹시 변비이신가요? 걱정 마세요~ 변비 있는 남자도 전 좋아요! 결혼하면 제가 제 사랑으로 고쳐 드릴께요~”
불쾌한 목소리가 거슬렸다.
플레리온은 자신의 사생팬 3총사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도대체 여긴 어떻게 찾아오셨나요. 사생활 따윈 안중에도 없나요?”
3총사는 그의 물음에 각기 대답했다.
“벌써 여기는 플레리온 님의 아지트라고 팬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어요. 운이 좋으면 플레리온 님을 직접 만나거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데 오늘은 아마 운이 좋은 날이었나 보네요! 화장실에서 플레리온 님의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와서 당장 달려왔죠~”
“전화 내용도 다 들었어요~”
“전 플레리온 님의 목소리를 오래오래 들으려고 녹음까지 해놨어요! 저 잘했죠?”
그와 동시에 녹음된 그의 목소리가 한 사생팬의 전화기에서 쩌렁쩌렁 울려댔다.
“뭐? 지금 똥 사냐고? 내가 너냐?”
하필이면 그 주변에 사람들이 많을 때였다.
옆에서는 사람들이 킥킥 웃었다.
플레리온은 난처해졌다.
바로 그때, 익숙한 오토바이 바퀴 구르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플레리온의 표정이 180도 달라졌다.
“에나넘, 나이스 타이밍!”
그가 외쳤다.
그의 외침에 오토바이에 탄 여자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으며 붉고 긴 생머리 포니테일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화장 떡칠 이였다.
“올라타기나 해.”
플레리온은 그 한마디에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오토바이 뒷자리에 올라탔다.
에나넘은 오토바이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꽉 잡아.”
그와 함께 사생팬들의 외침도 멀어져만 갔다.
그렇게 둘은 에나넘의 오토바이를 타고 약속 장소인 썬더스프링스에 늦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둘은 카페 앞에 오토바이를 세워두고는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플레리온이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조용했던 카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시끄럽게 변했다.
“저 사람 혹시 플레리온 아니야?”
“글쎄... 닮은 것 같기도...?”
때마침 뒤늦게 그들의 등장을 알아챈 에릭이 미리 맡아둔 테이블에서 그들을 향해 손짓했다.
“플, 오랜만이야! 우리 여기 있어!”
그 말에 에릭 옆에 앉아 있던 청년도 에나넘을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에나넘, 플 데려오느냐 수고했어.”
청년의 말에 에나넘이 웃었다.
“그래, 화장실에서 질질 짜는 애송이 끌고 오느냐 힘들었다.”
에나넘의 말에 플레리온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뭐? 애송이?”
“그럼 네가 어른이야?”
곧이어 우당탕 쿵쾅-
소리와 함께 둘은 서로에게 가구를 던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지켜보던 두 친구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떻게 쟤네 둘은 맨날 싸우냐?”
에릭이 말하자 옆에 네모난 안경을 쓰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푸른 단발을 한 청년도 한소리 했다.
“오토바이를 같이 타고 온 사실이 놀랍기만 하구만. 예전에 비하면 큰 발전이야.”
에릭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직-쾅!
불길한 소리에 두 친구는 뒤를 돌아봤다.
완전 진풍경이였다.
카페에 있는 가구들이 거의 다 아작 날 위기에 처하자, 이젠 카페 직원마저 그들의 싸움을 말리고 있었다.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돼요!”
그러나 그들의 예상대로 플레리온과 에나넘은 직원의 말을 껌 씹듯이 무시해버렸다.
“너도 그럼 애송이야!”
“말 다했냐?”
또 다시 가구 몇 개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덕분에 아까 전에 그들에게 아는 척을 했던 두 친구는 쪽팔려졌다.
“쪽팔린다. 쳐다보지 말자.”
“동감이야.”
그 순간, 구세주처럼 어떤 사람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플레리온~ 에나넘! 나 왔어!”
그 한마디에 상황은 종료되었다.
에나넘에게 주먹이 먹힌 채 플레리온은 소리가 나는 뒤쪽을 돌아보았다.
“마민?”
플레리온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자, 마민은 그를 향해 활짝 미소 지었다.
상황을 눈치 챈 그녀의 시선이 엉망이 된 마룻바닥을 훑었다.
“너희 또 카페까지 와서 싸우는구나.”
그녀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그제서야 민망해진 플레리온은 에나넘과 함께 상황을 수습하고 자리에 앉았다. 마민의 등장으로 카페에 다시 평화가 찾아오자, 에릭은 혼자 멀찍이 떨어져 있는 플레리온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플레리온, 고민 해 봤어? 너가 전에 DRB 은퇴한다고 했잖아.”
에릭의 말에, 플레리온은 음료를 마시다 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대답할 기미가 없어 보이자 에릭이 다시 말을 걸었다.
“거기 혼자 있지 말고 와서 같이 얘기하자. 나랑 프론이 너를 위해서 특별히 조사해 온 것이 있어.”
그 말에 플레리온은 의자에서 일어나 순순히 그를 따라 에릭과 프론(단발에 네모안경)과 마주앉았다.
“그럼 이제부터 플레리온의 DRB(데스 링 배틀) 은퇴에 대래서 이야기하지.”
에릭이 혼자 진지한척 근엄한 척을 다 해가며 말하자, 플레리온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 은퇴문제인데 왜 쟤가 오버냐.... 프론, 너도 그냥 쟤 무시 좀 해줘라...’
플레리온은 솔직히 지금 대화하기 싫었다.
그의 은퇴 문제에 대하여 에릭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은 더더욱. 플레리온이 싫다고 속으로 간곡하게 외쳤지만 그걸 노래만 듣고 있는 프론이 알 리 없었다.
마침내 프론이 헤드셋을 벗었다.
그와 동시에 플레리온이 속으로 생각했다.
‘젠장.’
평소 과묵한 프론이 헤드셋을 벗는다는건 분명 그도 할 말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때, 좌절하고 있던 플레리온에게 에릭이 먼저 질문했다.
“너가 분명 지난주에 DRB 은퇴하고 싶다 말했지?”
플레리온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에릭이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제는 더 이상 열정도, 의미도 목표도 없는 그저 시간낭비 일 뿐이라고 말이야.”
에릭의 말에 프론도 맞장구 쳤다.
“맞아. DRB를 하면서 진심으로 행복하지 않다고 말했지.”
플레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또 DRB를 그만두면 뭘 해야할지도 잘 모르겠고 말이야.”
“그래.”
플레리온이 세 번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랑 프론이 ‘위대한 신화 속 악당과 세계멸망’에 대해 조사해 왔어! 분명 너 같은 영웅이 관여할 일이야!”
에릭의 터무늬없는 말에 프론이 마시고 있던 음료수를 뿜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화를 과도하게 믿는 에릭이 또 쓸데없는 헛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내가 조사한 내용중 가장 흥미로웠던 내용은 멸망을 불러 온다고 해서 ‘파멸의 붉은 돌’ 이라 불리는 붉은 돌과 그걸 자유자제로-”
“에릭, 그만.”
듣다 못한 프론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플레리온을 바라보았다.
“플레리온, 내 계산에 의하면 넌 평생 떵떵거리면서 써도 남을 충분한 돈과 재산이 있어. 고로 에릭이 말한 미신에 휘둘려 네 목숨이 위태로워지는건 친구로서 원하지 않는 일이야.”
그의 말에 에릭이 뜨끔해서 소리쳤다.
“미신 아니야! 진짜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프론은 에릭을 무시한 채 덧붙였다.
“물론 내 말을 듣지 않을 정도로 넌 정의감이 쓸데없이 넘쳐나지만. 그런데 적어도 네가 이런 일로 죽지는 않았으면 해.”
프론의 날카로운 지적에 에릭이 플레리온에게 소리쳤다.
“컴퓨터랑 계산밖에 모르는 이 괴짜 말은 신경쓰지 말고, 너가 결정해! 네 삶이야!”
에릭의 말은 플레리온을 생각 속에 빠지게 만들었다.
내 삶이라......
에릭답지 않은 멀쩡한 말이군.
그래, 난 항상 남을 위한 삶을 살아왔어.
잔인한 킬링 게임을 이 악물고 하면서 정작 내가 원하는 일들은 묻어둔 채....
그리고 나보다 더 성공 가능성이 보이는 아이들에게도 미안하지. 재능을 피울 새도 없이 내 손에 의해 저세상으로 사라지니...
내가 이 의미없고 무자비한, 내가 상대를 베지 않으면 내가 베이는 이 잔인한 게임을 하면서 얼마나 사람을 얼마나 죽였더라.
오늘로 딱 5년.
하루에 참가자는 대략 30~40명. 대부분 내손에 의해 죽었지. 그럼 365×35×5.....
아, 하늘을 쳐다보기가 두려워.
내가 죽은 사람들의 피로 인해 하늘은 날이 갈수록 붉어지기만 하고...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 푸른 하늘을 보고 싶어. 내가 죽인 사람들을 되돌려 놓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만회를 할 수 있진 않을까?
만약 그 과정에서 내가 목숨을 잃는다 해도 죄값을 치르는 일부라고 생각하고 겸허히 받아들이지.
내 보잘것없는 목숨은 내가 죽인 사람들 수에 비하면 먼지도 되지 않지만, 한번 해 보는 거야.
사실 난... 이젠 이 의미없는 게임에서 영웅으로 칭송받는 것보다 그저 깨끗한 사람이 되고 싶어.
식사 이후, 플레리온은 일찍 자리를 떴다.
그러고는 어두워진 길가로 나와 검붉은 하늘을 올려다 보며 조용히 사색에 잠겼다.
‘내가 세상에 할 수 있는 의미있는 공헌은 뭘까....’
문득, 그는 길거리에 버려진 자신을 주어다 키운 릴로이 코치가 떠올랐다.
‘릴로이 코치님은 내가 DRB를 그만두겠다 하면 싫어하실까?’
그러자 그에 반박이라도 하듯 방금 전 에릭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너가 결정해! 네 삶이야!’
결국 플레리온은 결정을 포기한 채 괴로워 하며 에릭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에릭, 나랑 이야기 좀 하자.”
그 말에 뭔가를 씹어 먹는 소리와 요란한 영화가 틀어져 있는 소리가 나더니, 에릭의 짧고도 무지 간결한 대답이 돌아왔다.
“왜?”
플레리온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비현실적인 말을 믿는 자신이 한심했다.
“너가 아까 전에 말한...’붉은 돌’에 관심이 생겨서.”
플레리온이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기 반대편에서 TV 리모컨을 던지는 소리와 함께 흥분한 에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그렇다면 아까 전에 미리 말을 하지! 당장 우리 집으로 달려 와!”
그러곤 곧바로 전화기에서 전화가 끊기는 신호음이 들렸다. 플레리온은 이런 몹쓸 자신을 당장이라도 두들겨 패고 싶었지만, 이미 일 낸거 끝까지라도 가 볼 생각으로 에릭의 집을 향해 바람보다 빨리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