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장왕곤
작가 : 박재영
작품등록일 : 2016.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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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하산(下山)(2).
작성일 : 16-04-11     조회 : 736     추천 : 0     분량 : 6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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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화.

 하산(下山)(2).

 

 

 다음날, 북리곤은 모용 자매와 함께 백린사왕을 잡으러 나섰다. 금모신원이 이미 백린사왕이 있는 곳을 알고 있었는데 산 하나를 넘어야 하는 제법 먼 거리였다.

 한 시진 만에 금모신원의 안내를 받아 백린사왕이 있는 굴 앞에 당도한 일행들은 일단 굴을 포위한 후 불을 피웠다.

 연기가 굴 안으로 들어가자 백린사왕이 튀어나왔다. 백린사왕은 도망갈 길이 막히자 꼬리로 지면을 치며 세 사람 사이를 좌충우돌했는데, 한 번 꼬리로 지면을 칠 때마다 몸이 허공으로 솟구치며 흰 그림자만 번뜩였다.

 백린사왕은 과연 빠르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금모신원은 더 빨랐다.

 백린사왕이 세 사람 사이에서 맴도는 순간 금모신원이 벼락같이 달려들어 꼬리를 잡았다. 이어 몇 차례 허공에 빙빙 돌린 후 지면에 내려치자 백린사왕은 축 늘어진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모용 자매는 금모신원이 그 앙증맞은 조그만 손으로 백린사왕의 꼬리를 잡은 채 질질 끌고 오자 내심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백린사왕을 잡은 다음날, 아침 일찍 북리곤은 산을 떠날 차비를 했다.

 모용 자매는 원래부터 간편한 행장이라 준비할 게 없었지만 북리곤은 달랐다. 그는 스스로 만든 지게에 온갖 물건들을 쌓기 시작했는데 지켜보고 있던 모용봉루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아예 이 통나무집도 짊어지고 가지 그래?"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의 연장들은 기본이다. 온갖 약초들을 캐서 말려놓은 게 한 보따리이고 다시 호피(虎皮) 등을 비롯해 짐승들의 껍질을 말려놓은 것이 그야말로 작은 산을 이룰 정도였다. 짐승 가죽들은 모두 그동안 북리곤이 잡아먹은 산짐승들의 부산물인 듯했다.

 "이건 망치고, 이건 겸자… 게다가 숫돌까지… 무겁게 그런 건 왜 짊어지고 다녀?"

 모용봉루는 지게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대장장이의 연장들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딱 벌렸다.

 북리곤이 지게를 짊어지며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반문했다.

 "그렇다면 넌 왜 검을 차고 다니지?"

 "난 무인이야."

 모용봉루가 은근히 자부심 어린 표정이 되어 자랑스레 말하자 북리곤은 더욱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난 대장장이야. 대장장이가 연장을 갖고 다니는 건 무인이 검을 지니고 다니는 것과 다를 게 없어."

 "말 된다, 말 돼!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이 짐승 껍질들하고 말린 풀들은 다 뭐야?"

 "다 돈 되는 거야."

 "그걸 모르는 게 아니라 그 많은 짐을 지고 어떻게 움직이냐는 거야!"

 지게 위에 쌓여 있는 물건들의 높이는 무려 일곱 자가 넘을 듯했다. 제아무리 차곡차곡 쌓아도 워낙 양이 많았던 것이다.

 지게를 짊어지자 북리곤의 몸이 지게 위의 물건들에 짓눌려 보일 정도였다.

 "신경 꺼, 도와달라는 말은 안 할 테니까."

 북리곤은 자신의 키보다도 큰 짐을 짊어진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물건을 산처럼 짊어진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걸음이었다.

 산을 내려가는 동안 북리곤의 움직임은 경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형이 험한 곳이 나오면 오히려 짐이 없는 모용 자매들을 도와줄 정도였다.

 "아무튼 괴물은 괴물이라니까."

 결국 기가 질려 버린 모용봉루가 혀를 내둘렀다.

 산을 빠져나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용 자매들은 백린사왕을 잡기 위해 산속을 무작정 헤맸기 때문에 막상 나오려고 하자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험준하기 이를 데 없는 봉우리들뿐이었다.

 게다가 깊은 계곡을 건너거나 산을 넘어야 하는 일이 많아 하루에 기껏해야 이십 리 정도 전진하는 게 고작이었다.

 모용 자매는 천상 북리곤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산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온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 이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북리곤은 해가 뜨면 걸음을 재촉했고 어두워지면 잠을 잤다. 모용 자매와는 달리 힘들어하기는커녕 산속에서의 생활에 완벽하게 적응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산을 빠져나오는 동안에도 북리곤의 행동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규칙적이었다.

 언제나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운공조식을 했고, 그 뒤에는 반 시진가량 산을 뒤지며 식량을 구해온다. 통나무집에서의 생활과 다른 점은 검을 만들던 시간에 길을 재촉한다는 것뿐이었다.

 삼 일째 되는 날 모용봉루가 지친 기색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주위에 산채 같은 거 없어?"

 "산채라니?"

 "왜 이른바 산왕(山王)이라고 자처하는 산적들이 있는 곳 말이야."

 "그건 왜 찾아?"

 모용봉루가 계속 주위를 둘러보며 북리곤에게 질문하자 모용금소가 어리둥절해하며 반문했다.

 모용봉루가 악동처럼 씩 웃었다.

 "산적들도 사람이니까 뭐 제대로 먹을 만한 걸 지니고 있지 않을까? 근처에 산채가 있다면 습격해서 먹을 것 좀 빼앗아 오자. 정말이지 짐승 고기나 나무 열매 따위는 이제 질렸단 말이야."

 "뭐야!"

 모용금소는 어이가 없다는 듯 모용봉루를 보며 혀를 찼다. 늘 겪는 일이었지만 동생 모용봉루의 발상은 기발해도 너무 기발했다.

 모용금소가 머리를 흔들었다.

 "생각해 봐. 산채라는 게 대부분 산속에 있기는 하지만 여긴 깊어도 너무 깊어.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야 뭘 털어도 터는 건데 이런 곳을 지나가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하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던 모용봉루가 십여 걸음 앞에서 걷고 있는 북리곤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야, 산적!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이 지긋지긋한 산을 벗어나는 거야?"

 북리곤이 걸음을 멈춘 채 모용 자매가 가까워지기를 기다리며 입을 열었다.

 "나도 잘 몰라. 인가가 있는 곳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어."

 모용봉루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북리곤이 없었다면 산속에서 헤매다가 지쳐서 죽었을 게 분명했다. 식량만 해도 북리곤은 늘 간단히 구해왔지만 모용 자매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잠시 후, 북리곤은 노숙할 준비를 했다. 아직은 주위가 환했지만 모용 자매는 북리곤의 행동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모닥불을 피우고 건량으로 요기를 때우고 날 때쯤이면 어느새 어두워진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곤음진기를 다스릴 줄 안다는 말이 무슨 뜻이었을까?'

 버릇처럼 운공을 마치고 나서 북리곤은 잠을 청하지 않은 채 모닥불 옆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북리곤은 십만대산을 떠나면서부터 혈왕이 남긴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몸에 심어져 있는 곤음진기의 실체를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사실 그의 단전에는 거대한 진기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바로 선하단의 공능이 순수하게 진기로 바뀐 일 갑자의 내력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진기는 연검록의 내공심결에 따라 연마된 진기와 융화되어 가히 무림의 일류고수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의 단전에는 일 갑자의 진기 이외에도 뭉쳐진 단환 형태의 진기 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혈왕이 심어준 곤음진기였다.

 기이하게도 그 곤음진기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단전 안에 있기는 하되 마치 남의 물건인 양 이질감이 느껴지는 진기였다.

 다스린다 라는 말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 통제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북리곤은 곤음진기만이 아니라 선하단의 공능이 융화된 일 갑자의 진기조차 사용할 줄 모르는 상태였다. 그저 구결에 따라 각 경혈로 운기할 수 있을 뿐이지 진기를 자신의 뜻대로 펼치는 용기(用氣)의 단계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래 운기가 가능하면 용기(用氣)도 가능하다. 그저 원하는 부위에 진기를 흘려보낸다고 생각하면 그뿐인 것이다.

 진정한 내가고수란 뜻이 일면 이미 기가 이는 경지에 달한 사람을 말한다.

 만약 북리곤이 체계적으로 무공을 익혔다면 내가고수의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미 검기로 뿜어내거나 또는 장력에 실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북리곤은 자신이 무공을 익혔다는 생각을 하지 못해 막대한 진기는 단지 주체할 수 없는 힘으로 발출될 뿐이었다.

 그가 연검록의 내공심법을 이미 오성 이상 연공했으면서도 검을 완성시키지 못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쇠를 다룰 때 진기를 흘려 넣었다면 제아무리 강인한 만년한철도 그의 뜻대로 제련될 터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북리곤은 머리를 흔든 후 품속에서 족자 하나를 꺼냈다. 바로 묵 선생에게 얻은 묵화였다.

 "그게 뭐예요? 어린아이 장난처럼 쭉쭉 선만 그려놓은 그런 그림을 무엇 때문에 그렇게 넋을 잃고 보는 건가요?"

 북리곤이 잠을 자지 않고 족자를 펼쳐 놓은 채 내려다보고 있자 모용금소가 질문을 던졌다. 그림에 대한 안목이 없는 모용금소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숲을 그리면 나무를 그릴 수 없다.

 또한 나무를 세세히 그리면 숲이 완성되지 않는다. 하지만 묵화는 나무를 그렸으되 다시 보면 숲이 완성되어 있는 형태였다.

 그 나무라는 것이 비록 붓으로 선을 쭉쭉 그어놓은 것에 불과해 보이지만 북리곤에게는 그 선 하나하나가 생명력을 지닌 나무로 보였다.

 더욱 불가사의한 것은 그 선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무언가 떠오를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북리곤은 시간이 날 때마다 묵화를 들여다보았지만 아직까지 아무 소득도 없었다. 단지 묵화가 단순한 그림이 아니고 무언가 감춰져 있다는 확신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북리곤 일행이 십만대산을 벗어난 것은 그로부터 닷새가 지난 뒤였다.

 산세가 다소 평탄해지는 지점에 이르자 관도가 보였고, 관도를 따라가자 광동성과 광서성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 오주(梧州)에 이를 수 있었다.

 

 오주는 수운(水運)의 중심지로 귀주성과 광서성 남부의 물산이 집결되는 대도였다.

 오랜만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대도에 들어선 쌍둥이 자매는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듯 활기에 넘쳤다.

 성안으로 들어선 쌍둥이 자매가 가장 먼저 한 것은 객점을 찾아 방을 잡는 일이었다. 개운하게 몸을 씻기 위해서였다.

 쌍둥이 자매가 씻는 동안 북리곤은 산에서 지고 나온 물건들을 팔기 위해 저잣거리를 찾아 나섰다.

 그가 그동안 모아놓은 약초들과 짐승 가죽들은 제법 귀한 것들로써 모두 합쳐 은자 오십 냥의 가치가 있었다. 육 개월 정도는 여행 경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돈이었다.

 전낭을 두둑이 채운 북리곤은 포목점에 들러 새 옷을 한 벌 산 후 객점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뜨거운 물로 몸을 씻었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어 주청으로 내려가자 기다리고 있던 쌍둥이 자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모용봉루의 표현처럼 영락없이 산 도적 몰골이었던 북리곤이 한순간에 귀공자의 모습으로 바뀐 때문이었다.

 '단지 옷 하나 바꿨을 뿐인데.'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바로 모용봉루였다.

 깨끗이 몸을 씻은 후 짐승 가죽으로 대충 만든 옷 대신 새로 산 흑삼으로 갈아입은 북리곤의 모습은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미공자였다.

 흑삼과는 대조적인 흰 피부가 유난히 돋보였다.

 "와아! 곤 오빠가 이렇게 멋있는 줄 몰랐어요."

 "왜 하필이면 검은 옷이야? 흰옷을 샀으면 조금 더 나아 보였을 텐데."

 모용금소가 좌석으로 다가오는 북리곤을 보며 탄성을 터뜨렸다. 반면에 모용봉루는 냉소를 흘렸다. 하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은 듯 음식이 나온 후에도 북리곤의 모습을 훔쳐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어···."

 식사를 마친 후에도 쌍둥이 자매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북리곤에게 할 말이 있는 듯한 눈치였다.

 모용금소가 망설이며 더듬거리자 답답하다는 듯 모용봉루가 말을 가로챘다.

 "산적, 넌 운남으로 간다고 했지?"

 "그래, 월단퇴라는 곳에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어."

 "우리 집은 남해서여각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남해에 있는 건 아니에요."

 "우리 집은 유주(柳州)에 있어."

 "곤 오빠는 운남으로 간다고 했으니 남령(南寧)까지는 동행할 수 있어요."

 "흥! 뭐, 지긋지긋하지만 남령까지 함께 가주겠다는 말이야."

 쌍둥이 자매가 서로의 말을 보충해 주며 번갈아 입을 열기 시작했다.

 모용금소는 헤어지기 싫으니 중간까지 만이라도 함께 가고 싶다는 솔직한 태도였지만 모용봉루는 반대로 내키지 않는데 북리곤이 불쌍해서 함께 가주겠다는 자세였다.

 모용금소가 모용봉루를 한 번 노려본 후 간절한 눈빛이 되어 입을 열었다.

 "그곳에서는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하지만 대신 약속해 줘요. 월단퇴의 일이 끝나면 반드시 남해서여각으로 한 번 찾아오겠다고."

 "그러지."

 북리곤이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운남의 월단퇴에서 일이 끝난 뒤 무창의 이화단철장으로 돌아가려면 유주를 거쳐야 하는 입장이었다.

 북리곤이 약속을 하자 모용금소는 뛸듯이 기뻐했다. 모용봉루 역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북리곤과 모용 자매가 오주에 들른 것은 단지 객점을 찾아 몸을 씻고 오랜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기 위해서였다.

 일행은 하루를 쉰 뒤 곧바로 길을 재촉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편한 여행이었다. 관도를 따라 걷다가 식사 때가 되거나 어두워지면 객점을 찾으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금모신원이었다.

 산속에서는 북리곤이 늘 금모신원이 먹을 식량까지 구해왔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도시에 들어서자 문제가 심각했다. 식당에 들어설 때마다 금모신원 때문에 늘 몇 사람 몫을 더 시켜야 했다.

 어른 주먹 크기에 불과한 금모신원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모두들 귀엽게 생각하다가 그 조그만 원숭이가 장정 세 사람이 먹을 분량을 먹어치우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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