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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왕곤
작가 : 박재영
작품등록일 : 2016.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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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달빛이 끊어지는 땅(2).
작성일 : 16-04-11     조회 : 635     추천 : 0     분량 : 6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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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화.

 달빛이 끊어지는 땅(2).

 

 

 유민촌의 소년 양호에게는 두 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는데 이름이 양약빙(梁蒻氷)이었다.

 양약빙은 음침해 보일 정도로 침울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고생을 많이 해 성격이 바뀐 듯했다.

 그 나이 때의 어린아이라면 조금만 친근하게 대해줘도 잘 따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양약빙은 달랐다. 북리곤이 아무리 다정하게 대해줘도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너 몇 살?"

 "···."

 "이따가 성안에 갈 일이 있는데 올 때 댕기 하나 사 올까? 빙아는 무슨 색을 좋아하지?"

 "···."

 "이 오빠가 싫어?"

 "···."

 늘 이런 식이었다.

 말을 걸어도 대답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무서워하거나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단지 겁 많은 작은 고양이가 경계하며 다가오지 못하는 듯한 태도였다.

 북리곤은 실망하지 않은 채 양약빙의 마음을 열려고 노력했다.

 그가 생각해 낸 것은 양약빙 스스로 접근해 오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양약빙이 계속 침묵으로 대하자 북리곤은 그 뒤부터 일부러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참고 기다리며 애써 말을 걸거나 다정하게 대하지 않았다.

 이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그가 양호와는 어린아이처럼 장난치고 웃으며 어울리면서도 막상 양약빙만은 모르는 사람인 양 무시하자 양약빙이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금모신원이었다.

 어느 날, 북리곤이 금모신원과 장난치고 있을 때 양약빙이 다가왔다.

 양약빙은 가까이 다가오기는 했지만 우뚝 선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북리곤은 모르는 체 계속 금모신원과 장난치며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게 할 말이 있는 거니?"

 반 시진가량이 지나도 양약빙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쳐다보고만 있자 북리곤은 내심 미소를 머금었지만 일부러 무관심한 척 질문을 던졌다.

 "그 원숭이… 나랑 놀게 해줘."

 금모신원은 여간해서는 북리곤 이외의 사람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것은 북리곤과 늘 함께 지내다시피 하는 양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특별히 명령을 해야만 마지못해 잠깐 양호의 손에서 놀다가 다시 북리곤에게 돌아오곤 했던 것이다.

 양약빙은 금모신원에게 손짓하지 않고 북리곤에게 부탁했다. 신기한 원숭이와 놀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북리곤에게 부탁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양약빙의 이런 행동은 어린아이다운 태도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북리곤이 느끼기에는 그와 가까워지고 싶어 핑계를 만드는 게 분명했다.

 "좋아. 대신 네가 매일 씻겨주고 먹을 것도 챙겨줘야 해."

 "응. 할 수 있어."

 양약빙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북리곤은 이제야 양약빙이 자신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것을 알고 내심 기뻐했다. 자신에게 마음을 열었다면 머지않아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음을 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음날부터 양약빙은 아예 북리곤의 움막에서 함께 살았다.

 과연 금모신원과 놀고 싶다는 것은 핑계였다. 양약빙은 금모신원과 노는 것보다는 북리곤을 쳐다보는 것을 더 좋아했던 것이다.

 "빙아는 이담에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좋은 남자 만나 시집가야겠지?"

 "난 그런 데 안 가."

 "훗! 여자는 크면 시집가는 거야."

 "그래도 안 가. 시집가면 곤 오빠와 헤어져야 하잖아."

 "엉?"

 양약빙은 늘 북리곤의 옆에 있으려 했다. 잠을 잘 때에는 언제나 북리곤의 품에 안겨 잤는데 답답해서 몸을 떼는 순간에도 반드시 북리곤의 손을 잡아야만 잠이 들었다. 심지어 몸의 일부라도 북리곤의 몸에 닿아 있어야 마음 놓고 잠에 빠져들 정도였다.

 유민촌에서 함께 생활한 지 삼 개월이 되었을 때 북리곤은 떠날 준비를 했다.

 그는 양호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써주고 이화단철장으로 가는 길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양호 일가족이 이화단철장으로 가는 데 필요한 여행 경비는 그동안 수집해서 말려놓은 약초들을 판돈에 자신이 갖고 있던 은자를 보태 충당할 수 있었다.

 그가 양호 가족을 이화단철장으로 보내려는 것은 양호가 북리곤처럼 장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양호 이외에도 유민촌 사람들 중에서 장인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추려 함께 이화단철장으로 보낼 계획이었다.

 문제는 양약빙이었다.

 북리곤 때문에 사람에 대해 닫혀 있던 마음이 간신히 열려진 그녀였다.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북리곤의 예상대로 그가 떠난다고 하자 양약빙은 과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은 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북리곤이 금모신원을 함께 딸려 보내기로 약속하고 이화단철장이 자신의 집이라고 이야기 한 뒤에야 겨우 울음을 그칠 수 있었다.

 다음날 유민촌을 떠난 북리곤은 열흘 뒤에 운남의 애뇌산에 들어설 수 있었다.

 

 ···월단퇴라…? 그런 지명은 모르겠고, 운남 애뇌산 깊은 곳에 달빛이 끊어지는 땅이 있다는 말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북리곤은 무작정 애뇌산으로 온 게 아니었다. 유민촌에서 생활할 때 이미 월단퇴에 대해 수소문해 놓아 대략 어디에 있는지 알고 온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애뇌산에 도착해 보니 막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산은 수백 리나 뻗어 있고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봉우리들은 첩첩이 중복되어 길을 막는다. 정확한 지형을 모르고서는 월단퇴를 찾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북리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아직 부족한 연검록의 내공심법을 수련하며 천천히 산을 뒤지다 보면 언제고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북리곤이 이미 산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는 점이었다.

 다음날부터 북리곤은 오전에는 내공을 연마하고 오후에는 월단퇴를 찾으며 산을 뒤지는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한데 예상과는 달리 불과 삼 일 만에 월단퇴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산 깊은 곳에서 사람들이 지나다닌 듯한 소로(小路)를 발견한 것이었다.

 발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앞을 가로막는 나뭇가지들이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교묘히 제거되어 있었다. 자세히 살피니 바닥의 풀도 사람의 발에 밟혀 눕혀져 있는 부분이 많았다.

 산중 소로는 끊어진 듯 하다가 다시 이어지며 곧장 깊은 산속으로 뻗어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북리곤은 길을 발견한 뒤부터 쉬지 않고 걸었지만 미처 길이 끝나기도 전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애뇌산의 초입에서부터 계산하면 대략 일백여 리 정도 들어온 것 같았다.

 북리곤은 더 어둡기 전에 노숙할 준비를 하기 위해 길옆의 숲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휴식을 취했다.

 '선하단을 복용한 뒤 얻은 진기는 연검록의 내공심법에 의해 쌓여진 진기와 융화된 채 연검록의 구결대로 운기하면 각 경혈을 일주천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방법으로 단전 안에 곤음진기를 움직이려 하면 꼼짝도 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

 북리곤은 멍하니 앉아 곤음진기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직 날이 완전히 어둡지 않아 산 한쪽에 회색의 잔양(殘陽)이 남아 있었다.

 '혹시 곤음진기를 움직이는 구결이 따로 있는 게 아닐까?'

 북리곤은 철저하게 자신을 장인이라고 여기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무공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할 기초적인 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실 각 문파의 내공심법이 다르고 그에 따라 운기하는 방법이 각기 다르다는 것 정도는 무인이 아니라도 알 수 있는 기초 지식이었다.

 처벅! 처벅···!

 이때, 생각에 잠겨 있는 북리곤의 귀로 느닷없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한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아니었다.

 북리곤은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북리곤이 온 방향에서 세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선두에 서 있는 삼십대 후반의 중년인은 군청색의 장삼을 걸치고 있었는데 딱딱한 표정이었다.

 중년인의 한 걸음 뒤에는 열여섯 살가량 된 소녀와 이십대 중반의 여인이 따라오고 있었다.

 소녀는 화사한 취의경장을 걸쳤는데 눈이 번쩍 뜨일 만치 예뻤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 같아 더욱 귀엽게 느껴진다.

 소녀와 나란히 걷고 있는 여인은 짙은 흑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상당한 미인이었다.

 세 사람은 북리곤이 모닥불을 피워놓은 지점까지 다가왔지만 신경 쓰지 않고 스쳐 갈 기세였다.

 "저어!"

 북리곤은 다급해져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세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북리곤에게 시선을 주었다.

 북리곤은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이런 깊은 산중에서 사람을 만났으면 최소한 자신처럼 놀라야 정상이다. 한데 세 사람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저잣거리에서 스쳐 가는 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북리곤은 세 사람에게 말을 걸어놓고 일시지간 할 말을 잃었다.

 북리곤이 멍청히 바라보기만 할 뿐 말을 잇지 않자 흑의여인이 냉소를 터뜨렸다.

 "멍청하기는!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여기서 노숙을 하려고 했느냐?"

 무척이나 거친 말투였다. 게다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듯한 고압적인 자세였다.

 "코앞이란 말입니까?"

 북리곤은 흑의여인의 말뜻도 모르면서 중얼대듯 반문했다.

 "하긴 정확한 위치는 몰랐을 테니···."

 흑의여인이 고개를 끄덕인 후 중년사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형, 그렇지 않아도 상아가 지친 것 같으니 잠시 쉬었다 갈까요? 저 아이도 함께 데려갈 겸 해서 말이에요."

 "그러지."

 중년사내는 대답과 함께 오히려 먼저 북리곤이 피워놓은 모닥불로 다가왔다. 이어 마치 자신이 피워놓은 모닥불인 양 북리곤의 눈치도 보지 않은 채 불가에 앉았다.

 흑의여인 역시 소녀와 함께 모닥불 앞에 앉으며 북리곤을 올려다보았다.

 "앉아, 좀 쉰 뒤에 같이 출발할 테니."

 "예? 예."

 북리곤이 어리둥절해하며 불가에 앉자 흑의여인이 가만히 북리곤의 위아래를 살폈다.

 "근골은 그만하면 훌륭한 편이고… 누가 널 추천했느냐?"

 "추천? 그런 거 모르는데요."

 "이런 멍청한 놈! 내 말은 그러니까 누가 널더러 이곳으로 가라고 했느냔 말이다!"

 "그게···!"

 북리곤은 자신도 모르게 혈왕에 대해 이야기하려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느낌을 받고 오히려 반문했다.

 "저어, 혹시 월단퇴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래, 그러니까 묻는 게 아니냐."

 흑의여인의 대답에 북리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힘겹게 월단퇴를 찾아가는 길목에서 월단퇴 사람들을 만났으니 반갑기 그지없었지만 궁금함이 더 앞섰다.

 "저어, 월단퇴는 봉문된 게 아닌가요?"

 "봉문?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아니지. 널 추천해 준 사람이 이야기해 준 모양이구나."

 "봉문 되었는데도 이렇게 왕래할 수 있는 건가요?"

 "풋!"

 북리곤이 진지하게 질문하자 흑의여인이 실소를 터뜨렸다.

 짐짓 냉막한 표정에 고압적인 자세였지만 웃음을 터뜨리자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마치 어린 후배에게 설명하는 태도로 차분히 입을 열었다.

 "봉문이라는 것은 강호에서 활동을 못할 뿐이지 감금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사는 곳이니 당연히 외부인의 왕래도 있고, 제자들 역시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아, 그런 거였군요."

 "단, 강호의 일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일체 관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강호에서 우연히 시비에 휘말려도 절대로 문의 무공을 사용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죽게 되더라도 말이다. 봉문이란 바로 그런 의미이다."

 흑의여인은 설명을 마친 후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소녀를 눈짓했다.

 "내일부터는 한식구가 될 터이니 서로 인사해라."

 '한식구가 된다고?'

 북리곤이 내심 의아해하는 순간 소녀가 북리곤을 향해 수줍어하는 미소를 보냈다.

 "저는 예혜상(芮惠翔)이라고 해요. 입문은 같아도 저보다 나이가 많으니 사형이 되겠네요? 앞으로 사형이라고 부를게요."

 '입문? 사형? 무슨 말이지?'

 북리곤은 뭐가 뭔지 몰라 정신이 없었지만 상대가 자신을 소개했으니 그도 대답을 해야만 했다.

 "북리곤이라고 합니다."

 북리곤이 자신을 소개하자 흑의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운삼(洙芸삶)! 그게 내 이름이다. 앞으로 너희들이 날 보게 될 일을 드물겠지만 사형은 너희들을 가르칠 교두 중 한 분이시니 인사드려라."

 흑의중년인의 이름은 호연소(昊然疎)라 했다.

 그는 냉막하기 보다는 무표정했다. 모든 것에 관심이 없는 듯한 눈빛이었다.

 호연소는 북리곤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자 짧게 자신의 이름만을 밝혔을 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자, 대충 쉬었으면 이제 일어나자."

 수운삼이 벌떡 일어나자 호연소 역시 몸을 일으켰다. 일행을 인솔하는 것은 수운삼의 몫이라는 듯 오히려 그녀의 지시에 따르는 듯한 태도였다.

 '일단 이 사람들을 따라가 보는 수밖에 없겠지?'

 북리곤은 수운삼이 자신에 대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해명하려 들지 않았다. 어차피 월단퇴에 가야 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북리곤이 모닥불을 흙으로 덮어 끈 뒤 옆에 벗어두었던 지게를 짊어지자 수운삼이 멍청히 바라보았다.

 "그냥 편해서 지고 다니는 거예요.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세요."

 북리곤은 태연하기 이를 데 없었다. 태연할 뿐만 아니라 거칠고 고압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수운삼에게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태도였다.

 수운삼은 이채를 머금은 눈빛으로 잠시 북리곤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수운삼 일행과 함께 오백여 장을 걸어가자 시야가 트이며 저 앞쪽으로 마을이 보였다. 바로 칠십 년 전까지만 해도 천하제일의 살수 단체로 알려져 있던 월단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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