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살수입문(殺手入門)(2).
두 장의 배첩(拜帖)에는 완벽하게 똑같은 문양이 찍혀 있었다. 분노한 채 입을 벌리고 있는 아수라의 얼굴 형태가 그것이었다.
하지만 두 장의 배첩은 또 전혀 달랐다.
한 장의 배첩은 그 종이가 누렇게 빛이 바랜 데다 군데군데 삭은 곳이 있어 무척이나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반면에 또 다른 배첩의 종이는 하얗게 빛을 발하며 새 종이임을 자랑하고 있었다.
전혀 다르면서 또한 완벽하게 똑같은 문양을 지닌 두 장의 배첩을 들여다보고 있던 노인은 고개를 들며 흡족한 표정을 머금었다. 오랜 시간을 들여 꼼꼼히 두 장의 배첩을 비교한 결과가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든 것이다.
"되었다. 이 정도면 완벽하다. 이로써 혈왕비환까지 갖춰졌으니 이제 드디어 본 문의 봉문이 해제되는 것이다."
"하오나 원로들께서 과연 가짜 혈왕비환을 구별하지 못할까요?"
"원로들 중 더러는 속아 넘어갈 테고, 또 더러는 가짜라는 걸 눈치 챘으면서도 모른 체 넘어가겠지."
"모른 체한단 말입니까?"
"칠십 년이다! 문주가 아직 살아 있는지 아니면 이미 죽었는지도 모르면서 문주의 말 한마디 때문에 봉문한 채 지낸 세월이 칠십 년이란 말이다. 원로들 또한 봉문이 해제되는 일이니만치 일부러라도 모른 체할 것이다."
노인의 눈빛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지난 칠십 년간의 세월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아이를 불러들이는 겁니까?"
노인의 앞에 공손히 서 있던 장년인이 격동의 빛을 떠올리며 질문을 던졌다.
노인이 애석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일 년 정도만 있으면 광한일기공(廣寒溢氣功)의 성취가 구성에 이른다고 했으니 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광한일기공을 적어도 구성까지는 익혀야만 곤음진기로 펼친 것과 흡사한 형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긴 가짜 혈왕의 전인을 만들기 위해 이미 칠 년을 기다렸는데 이제 일 년을 더 못 기다리겠습니까?"
노인과 장년인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낮은 웃음소리가 그들이 있는 대전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야망이 담겨 있는 웃음소리였다.
* * *
백의대의 서고(書庫)는 지하에 위치해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특히 모든 제자들에게 개방되어 있지만 서고 안에서만 읽을 수 있을 뿐 밖으로 갖고 나갈 수는 없었다.
검법과 도법, 각종 암기술과 경공술, 추적술 등등.
서고에 존재하는 무공들은 그야말로 그 종(種)을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각 문파의 무공은 물론이고, 천하에 존재하는 모든 무림 문파의 정보가 적혀 있는 책자도 따로 보관되어 있었다. 그 정보는 세밀하기 이를 데 없어 각파의 내부 사정을 그야말로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 수 있었다.
월단퇴의 제자들은 월단퇴의 독문 무공 이외에도 타 문파의 무공을 서너 개 정도는 연마해야 한다. 때로 월단퇴가 개입된 걸 감춰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내공심법들도 십여 종이 있었는데 대부분 월단퇴의 독문 내공심법인 벽혈사강(碧血死岡)을 익힌 제자들이 연마해도 충돌하지 않을 불가나 현문의 내공심법들이었다.
예혜상과 혜어진 뒤 가장 먼저 백의대의 서고에 간 북리곤은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곤음진기는 보이지 않았다.
'적의대에도 비고(秘庫)가 있다고 했는데 혹시 상승 무공들은 그곳에 따로 보관되어 있는 게 아닐까?'
북리곤은 자신의 추측이 맞으리라 확신했다.
백의대의 서고에는 일반적인 학문과 기초적인 무공들만 있고 한 단계 위인 적의대에 입관해야만 상승 무공을 익힐 수 있는 것이다.
원래 북리곤은 다른 무공에는 일체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오직 곤음진기뿐이었다. 하지만 백의대의 서고에서 곤음진기를 찾지 못한 이상 적의대에 입관해야만 했다.
그리고 적의대에 입관하기 위해서는 백의대에서 어느 정도 실력을 쌓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무공을 익혀야 하는 걸까?'
문득 북리곤의 뇌리로 아무 죄도 없으면서 얻어맞던 양호의 모습이 스쳐 갔다.
양호는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어 남령의 토박이 아이들에게 얻어맞고 힘들여 번 돈으로 산 만두조차 잃었던 것이다.
북리곤의 뇌리로 또 부친 북리대정이 호북성의 정세를 걱정하던 모습이 스쳐 갔다.
'나의 목표는 장왕이다. 하지만 자신이 맘먹은 일을 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남에게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
힘이 없으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세상이란 그런 곳이고, 또 북리곤 역시 이미 그런 이치를 알 만한 나이였다.
북리곤은 기왕에 곤음진기를 찾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적의대에 입관해야 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억지로 하게 되면 능률도 오르지 않고 신도 나지 않는다.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북리곤은 자신이 무공을 익혀야 하는 이유를 찾아냈다. 기왕에 하는 일이라면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해 해야 하는 것이다.
'좋아! 한 번 해보지, 뭐!'
결심을 굳힌 북리곤은 예혜상이 준 교육 과정에 대한 안내서를 떠올렸다.
'내공은 기왕에 연검록을 익혔으니 그것으로 됐고… 우선 검법부터 배울까?'
오십 명의 백의대 제자 중 기초 검법을 배우는 아이는 이십 명 정도였다. 그들 중 북리곤과 같은 숙소를 쓰는 소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북리곤은 혹시 같은 숙소를 쓰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을까 두리번거렸지만 낯익은 아이들이 없었다. 그의 예상대로 북리곤과 같은 숙소를 쓰는 아이들은 이미 기초를 쌓고 온 게 분명했다.
기초 검법을 가르치는 교두는 아침에 연무장에 집합했을 때 북리곤의 내공을 시험해 본 교두였다.
그는 북리곤이 어슬렁거리며 늦게 오자 눈살을 찌푸렸지만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기초 검법 수련은 하루에 한 시진이었다. 때문에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무공을 배우든지 아니면 혼자 검법을 연습할 수 있었다.
기초 검법은 월단퇴의 독문검법인 천잔십이결(天殘十二結) 중 전(前) 육결(六結)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북리곤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삼 일이나 늦게 시작했지만 다른 아이들도 아직 제일결을 반복해서 수련하는 과정이라 뒤처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검법 수련이 끝나자 북리곤은 다시 기초적인 권각술을 가르치는 수련장으로 갔다.
권각술은 권법과 각법(脚法)으로 다시 나뉘어져 있었다.
권각술을 배우고 나자 반 시진 동안 식사 시간이 있었다. 점심을 마치고 난 북리곤은 다시 수련장들을 기웃거리다가 경공술을 택했다.
대부분의 백의대 제자들이 선택하는 수련 과목은 일단 세 가지 정도였다. 그 세 가지가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뒤 다시 다른 무공을 익히는 것이다.
세 가지 훈련 과정만 선택해도 연습할 시간을 감안하면 간신히 잠자는 시간과 식사 시간이 남는 정도였다.
한데 북리곤은 세 가지의 무공 이외에도 다시 독공(毒功)과 진법(陣法) 과정도 배우기로 했다. 기왕에 무공을 익히기로 한 이상 가능하면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걸 얻으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사실 다섯 가지 과목을 한꺼번에 수련하는 것은 몸이 견뎌나지 못하는 강행군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북리곤은 이미 일 갑자 이상의 내공을 지니고 있어 그다지 피곤한 줄 몰랐다. 잠자는 시간이 부족했지만 그것도 운기조식으로 감당했다.
삼 개월이 지나자 북리곤은 수련하고 있는 다섯 가지 무공 모두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무슨 일이든 한 번 빠져들면 병적으로 집착하는 성격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유별난 고집과 근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시 삼 개월이 지났을 때 북리곤은 다른 소년들과 함께 천잔십이결 중 세 번째 초식인 천잔삼결(天殘三結)을 익히기 시작했다.
천잔십이결 중 전 육결은 사실 기초 검법에 지나지 않았다. 후(後) 육결(六結)에 들어서야만 비로소 일류검법이랄 수 있었다.
천잔십이결은 겉으로 보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가 요체인 것 같지만 사실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움직이는 것에 대응한다는 검리(劍理)가 그 바탕에 숨겨져 있는 검법이었다.
가히 절기라 할 수 있는 검법.
십 년을 연마해야 겨우 칠성 정도의 성취를 이룰 수 있고, 십오 년을 수련해야만 진정한 위력이 드러나는 검법이 바로 천잔십이결이었다.
북리곤에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 것은 천잔삼결을 수련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어째서일까? 난 왜 배우지 않은 천잔삼결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일까?'
아직 배우지 않은 천잔삼결을 교두가 펼쳐 보이는 순간 북리곤은 이미 그 검로(劍路)를 확연히 알아볼 수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까지 저절로 눈에 들어온다는 점이었다.
북리곤은 천잔삼결뿐이 아니라 천잔사결마저 어떤 식으로 초식이 펼쳐질지 이미 알고 있었다.
뿐이랴!
명확하지는 않지만 기초가 아닌 후 육결, 천잔칠결부터 천잔십이결의 검로마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미세한 부위에서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전체적인 검로는 한 가지 길밖에 없을 것 같았다. 초식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려면 어차피 정해진 검로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과연 내 생각대로일까?'
북리곤은 천잔십이결을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 검로를 모두 알고 있는 검법에 매달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다음날, 북리곤은 검술 수련에 참여하지 않고 처음 월단퇴로 올 때 산속에서 만났던 수운삼을 찾아갔다.
"무슨 일이냐?"
"부탁이 있어서 왔어요."
"부탁?"
북리곤이 자신을 찾아오자 수운삼은 다소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북리곤은 마치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는 사이인 듯 스스럼없이 입을 열었다.
"선배도 천잔십이결을 익혔겠지요?"
"그래. 너희들은 지금 천잔십이결 중 전 육결을 배우고 있겠지? 검법을 수련하다가 의문점이 생긴 모양이구나."
수운삼은 북리곤이 검법에 대해 의문점이 생겨 찾아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북리곤이 검법을 가르치는 교두에게 묻지 않고 자신을 찾아온 것을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무엇이 궁금한 것이냐?"
"그냥 천잔십이결 전체를 제 앞에서 한 번 펼쳐 보여주시면 돼요."
"···!"
수운삼은 어이가 없는 듯 북리곤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무어라 하지는 않은 채 북리곤을 한적한 후원으로 데리고 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알 것 같은데 한 초식 한 초식을 체계적으로 익히는 게 올바른 수련법이다. 검법을 가르치는 교두가 다음 초식을 미리 보여주지 않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기왕에 여기까지 날 찾아왔으니 천잔십이결 전체를 펼쳐 보이기는 하겠다만, 단 한 번뿐이다."
스릉!
검을 뽑아 든 수운삼은 두 발을 어깨 넓이로 벌린 뒤 잠시 호흡을 골랐다. 이어 오른손에 쥐어진 검을 비스듬히 얼굴 앞 한 자 거리에 둔 채 왼손의 손바닥으로 검등을 눌렀다.
북리곤 역시 잘 알고 있는 천잔십이결의 기수식이었다.
팟! 파파팟!
순간적으로 수운삼의 발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검이 허공을 난자했다.
손을 쭉 펼쳐 검신과 팔이 일직선이 되는가 하면 어느새 휘돌아 반원을 그린다.
발과 손의 움직임은 항상 일치했고 시선은 검끝에 머물러 있었다.
아름답다고 할까?
북리곤은 수운삼이 검초를 펼치는 모습을 보며 한가로운 생각에 빠졌다가 검초가 천잔삼결에 이르자 정신을 가다듬었다.
거칠면서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
손과 발은 검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동할 뿐이다. 의식해서 손과 발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무의식의 움직임 같았다.
'다음에는 세 걸음 정도 앞으로 나아가겠지? 역시 그렇군.'
수운삼의 천잔십이결은 어느덧 전 육결을 지나 후 육결로 이어지고 있었다. 후 육결에 이르자 검세는 도도하게 흘러가던 물결에서 거칠게 굽이치는 급류로 바뀌었다.
수운삼의 손에서 펼쳐지는 천잔십이결을 보며 북리곤은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검로가 눈에 들어왔다. 미세한 부위에서 예상 외의 흐름이 없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인 검로는 북리곤이 예상한 그대로였다.
"잘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잠시 후, 수운삼이 검을 내리자 북리곤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도움이 되었느냐?"
"예."
수운삼의 질문에 북리곤은 곧바로 대답했지만 수운삼이 보기에는 건성인 것 같았다. 게다가 북리곤은 무언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듯했다.
'이 녀석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수운삼은 북리곤이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멍청히 서 있는 것을 보고 내심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