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묵화(墨畵)의 비밀(2).
흑의노인은 모닥불 빛에 의지해 오랫동안 묵화를 내려다보았다.
"으음!"
근 한 식경가량 묵화에 빠져 있던 흑의노인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그는 북리곤을 똑바로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너는 이 그림 속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나무를 그린 선 하나하나가 검(劍)으로 보인 적이 있어요. 또 나무가 모여 작은 숲을 이룬 게 검초인 듯 느껴졌어요. 그리고 다시 작은 숲들이 모여 큰 숲이 되면 하나의 검법이 완성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고요."
"으음!"
흑의노인은 북리곤의 설명을 듣고 다시 묵화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뭔가 깨달음이 있었다는 눈빛이었다.
"대단하군, 대단해! 내 추측이다만… 이건 아마도 검왕(劍王) 희천세(希千世)가 말년에 자신의 깨달음을 집대성해서 한 폭의 산수화로 남긴 게 분명하다."
"검왕?"
"검의 끝을 보았다고 알려진 이백오십 년 전의 절대자였다. 검왕은 제자를 두지 않아 사람들은 모두 그의 검법이 절전되었다고 알고 있단다."
"검법을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다니, 정말이지 대단한 화가로군요!"
단순히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그 안에 하나의 검법을 남길 수 있다 함은 단지 무인으로서의 재능만이 아니라 뛰어난 화가로서의 재질도 필요했다.
흑의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늙은이는 네가 설명해 주는 걸 듣고서야 이 그림 속에 검법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 그게 정확히 어떤 검법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림을 보고 그 안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 또한 너만의 인연인 것. 그건 그렇고, 네놈은 늘 이런 식이냐?"
"뭐가 말입니까?"
"이런 귀중한 것을 아무에게나 보여주면 어떻게 하느냐?"
"우리 사이인데 뭐 어떻습니까?"
"우리 사이?"
흑의노인이 멍청해져 북리곤을 바라보았다.
언제 봤다고 우리 사이 운운한단 말인가?
북리곤이 우호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전 월단퇴의 백의대 제자이고 어르신은 월단퇴의 원로이시니 곧 한 가족이 아닙니까? 한집안의 어른이 설마 손자뻘 되는 제자의 물건을 탐낼 리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이래 뵈도 전 사람 볼 줄 안단 말입니다."
"흐음, 그러니까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그림을 보여주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냐?"
"당연하지요. 내가 바보입니까?"
"끄응!"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흑의노인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이리 내라."
북리곤의 눈에 어이없어하는 빛이 솟아났다. 절대로 욕심 내지 않을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그 믿음이 깨진 것이다.
북리곤이 묵화를 내밀자 흑의노인이 정색했다.
"그림을 완벽하게 외웠느냐?"
"예. 눈을 감고도 똑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입니다."
"잘했다."
흑의노인이 모닥불 속에 묵화를 던졌다. 묵화는 이내 불길에 휩싸이며 타올랐다.
북리곤은 흑의노인이 묵화를 미련 없이 태워 버릴 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걸 지니고 다니다가는 살신지화를 면하기 어렵다. 이미 네 머릿속에 검왕의 검법이 전해졌으니 더 이상 지니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렇군요."
"그동안 계속 지켜보았다만 넌 백의대의 기초 과정은 물론이고, 심지어 적의대조차 입관할 필요가 없다."
흑의노인은 과연 북리곤이 숲 속의 공터에서 혼자 수련을 시작할 때부터 지켜본 게 분명했다.
아직 남과 무공을 겨뤄보거나 비무를 해본 적이 없어서 북리곤 스스로는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고 있었지만 흑의노인은 이미 그의 성취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사실 북리곤은 일반적인 학문이나 진법, 독공 등을 제외하고 무공만 따진다면 이미 일류의 경지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내공 또한 이미 일 갑자가 넘어 당장에라도 강호에서 활동할 수 있는 수준인 것이다.
북리곤은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혈왕의 부탁을 받고 월단퇴의 봉문을 해제시켜 주기 위해 온 사실과 그러기 위해서는 곤음진기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해야 할지 어떨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뭐, 적의대에 입관해도 지금 실력이면 며칠 안에 출관할 수 있을 테지만 당분간 지금처럼 혼자 수련을 해라. 기회를 봐서 너에 대해 총사와 의논을 하마."
'내 실력이 당장 적의대에 입관해도 며칠 안에 출관할 수 있을 정도라고?'
흑의노인의 말에 북리곤은 내심 기쁘기 이를 데 없었다. 월단퇴에 입문한 지 채 이 년도 되지 않아 그 정도의 성취를 이룰 줄은 자신도 예상 못한 일이었다.
실로 천부적인 재질에 각고의 노력이 더해진 결과였다.
적의대의 비고에도 곤음진기의 구결이 적혀 있는 비급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북리곤은 맥이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날이 무공이 급증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던 것이다.
특히 북리곤은 천잔십이결의 수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 천잔십이결을 완벽하게 소화시킬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것은 다시 두 달가량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 뒤의 일이었다.
천잔십이결이 완성된 후 북리곤은 천잔십이결을 점차 엉뚱한 검법으로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바탕은 분명히 천잔십이결이다. 하지만 변형이 거듭되며 천잔십이결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검법이 되고 있었다. 묵화 속에 감춰져 있던 검왕의 검법이 북리곤의 뇌리에서 조금씩 풀려 나오며 새로운 길로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휴우, 오늘은 그만 할까?"
검법을 수련하면 할수록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는 검왕의 검법이 조금씩 풀려 나와 새로운 경지에 보여준다.
북리곤은 검법 수련에 빠져 그야말로 잠자는 시간도 아까울 정도였다. 하지만 기관진법이나 독공 등의 일반적인 학문도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잠을 자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둠을 헤치며 숲 속의 공터에서 미처 십여 장이나 걸어 나왔을까?
쉬이익!
돌연 좌측의 숲 속에서 한줄기 흑영이 번개같이 덮쳐 왔다. 흑영의 손에는 한 자루 비수가 쥐어져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 비수만 번뜩이는 것 같았다.
"헉!"
북리곤은 이미 천잔십이결은 물론 검왕의 검법 또한 어느 정도 완성시키는 경지에 올라 있었지만 암습을 피할 순 없었다. 암습과 정면 대결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상황이었다.
사실 내공이 깊으면 보통 사람들보다 청력과 안력이 급증되는 것은 물론 육감마저 발달하게 되어 있다. 한데 북리곤은 이미 누군가 숲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고 방심했다가 당한 것이다.
충격을 받아 굳어져 있는 북리곤의 눈에 그의 목에 비수를 대고 있는 예혜상의 얼굴이 들어왔다.
"너, 넌?"
"곤 사형, 내가 미행하는 걸 전혀 몰랐지요? 난 지금 잠입술과 암기술을 배우고 있는데 이만하면 꽤 실력이 괜찮은 편이 아닌가요?"
예혜상이 비수를 회수하며 환하게 웃었다.
"끄응!"
북리곤은 예혜상의 암습에 꼼짝도 못하고 당했던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무림의 고수들도 왕왕 자신보다 무공이 약한 살수들에게 허무하게 당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북리곤의 뇌리로 스쳐 갔다.
그는 예혜상을 직시했다.
"사매, 앞으로도 시간 날 때마다 지금처럼 날 암습해 줄 수 있어?"
"뭐예요?"
"방금 생각한 건데 좋은 훈련이 될 것 같아. 사매도 나와 시합을 하는 셈 치면 되고."
"하긴, 혼자 연습하는 것보다는 효과적이겠네요."
"대신 진짜 무기는 쓰지 마. 아차 해서 내가 못 막거나 피하지 못하면 꼼짝없이 죽게 되니까."
"좋아요. 서로 훈련시켜 주는 일이 될 테니까 나도 찬성이에요. 내가 너무 심심하지 않게 대비를 단단히 해야 해요. 그래야 나도 암습하는 재미가 있지 않겠어요?"
"흠! 아마 오늘처럼 간단히 성공하긴 힘들 거야."
숙소로 돌아오자 장이가 한잠 자고 깨어난 것인지 일어나 앉아 있었다.
그는 북리곤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대뜸 입을 열었다.
"야, 너 밤마다 어디 가는 거야? 뭐,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예혜상 소저를 몰래 만나는 건 아니겠지?"
"뭐야! 말 같은 소릴 해라. 그리고 소저는 무슨 얼어 죽을 소저냐. 우리보다 나이도 어리니 그냥 사매라고 부르든지 상아라고 불러."
"어이쿠! 어떻게 감히 천사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있겠냐! 그건 그렇고, 부탁이 있는데 말이야. 저어, 그게 말이지···."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냐? 네놈 성격에 오래 뜸을 들이는 걸 보니 꺼내기 쉽지 않은 말인 건 알겠는데 도대체 뭐야?"
"그게, 혹시 예혜상 소저를 만나게 되면 내 이야기 좀 잘해주지 않을래?"
"어떻게? 밥 잘 먹고 잠 잘 잔다고? 무공에는 아예 취미도 없는데 밥 먹여주고 재워준다고 해서 월단퇴에 입문했다고 얘기해 줘?"
"이 자식이 정말···!"
장이는 시간만 나면 북리곤을 들볶았다. 바로 예혜상 때문이었다.
예혜상은 처음에 함께 월단퇴로 들어왔던 인연 때문인지 북리곤을 잘 따랐는데 수련을 끝난 뒤에도 곧잘 찾아오곤 했다.
예혜상은 지난 일 년 반 동안 그야말로 사내라면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아름답게 성장해 있었다. 게다가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 함께 입관한 백의대 제자들의 선망을 사고 있었다.
백의대 제자들 중에서 가장 몸이 달아 있는 게 바로 장이였다. 그녀가 북리곤을 곧잘 찾아오는 바람에 가까이 대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숙소를 함께 쓰고 있는 모자서도 예혜상이 찾아올 때면 유독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예혜상의 암습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퍼부어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다음날부터였다.
이 방법은 과연 훈련으로서의 효과가 컸다.
예혜상은 북리곤이 이미 대비하고 있는 상태에서 암습에 성공해야 했다. 때문에 더욱 실력을 쌓거나 매번 암습할 때마다 기발한 작전을 짜야만 했다. 이것은 후일 임무를 맡았을 때를 대비한 실전 훈련을 겸할 수 있었다.
북리곤 또한 언제, 어느 때 예혜상이 암습해 올지 몰라 늘 긴장한 채 지내야 했다. 심지어 잠을 자거나 식사를 할 때는 물론 혼자 검법 수련을 할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북리곤과 예혜상이 훈련을 시작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평소처럼 북리곤을 암습했다가 실패한 예혜상이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장소는 바로 북리곤의 숙소였다.
"곤 사형, 혈왕의 전인이 온다는 소문 못 들었어요?"
"혈왕의 전인?"
북리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말이 사실입니까?"
짐짓 관심이 없는 척 십여 걸음이나 떨어진 창가에 혼자 서 있던 모자서가 크게 놀라 반문했다. 어찌나 놀랐는지 그는 상대가 예혜상이라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다가와 얼굴을 바싹 들이밀 정도였다.
"어? 모 사형이 말하는 건 처음 들었어요."
예혜상이 신기하다는 듯 새삼 모자서의 위아래를 쓸어보았다. 예혜상은 다른 백의대 제자들에게는 냉랭하게 대하고 있지만 북리곤과 함께 숙소를 쓰고 있는 장이와 모자서에게만은 스스럼없이 대해주는 편이었다.
"그게···."
모자서는 자신이 처음으로 예혜상에게 말을 건 것임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장이가 짐짓 눈을 부릅떴다.
"너, 이 자식! 별거 아닌 일에 얼굴이 왜 벌게져? 그리고 우리와 있을 때는 죽어도 입을 열지 않는 놈이 예 소저가 오니까 입을 열어? 설마 나랑 연적(戀敵)이 되자는 거냐!"
모자서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는 무어라 입을 열지 못한 채 도와달라는 듯 북리곤을 바라보았다.
"장난 그만 쳐! 그건 그렇고, 정말 혈왕의 전인이 온다는 소문이 있단 말이냐?"
"그래요. 언니한테 직접 들었어요. 우리 백의대 제자들은 모르고 있지만 그 일 때문에 벌써부터 월단퇴 전체가 잔칫집처럼 들떠 있어요."
"혈왕의 전인이 온다면… 봉문이 해제될 테니 다들 기뻐하는 게 당연하지."
모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격동을 감추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월단퇴의 제자들은 지난 칠십 년 동안 강호에서 활동을 하지 못했어요. 오 년마다 새로 선출된 제자들도 지금까지 계속 본 문에 남아 수련만 거듭해 왔고요."
예혜상 역시 들떠 있는 표정이었다.
월단퇴에 입문해 열심히 수련한다고 해도 사실상 강호에서 활동할 수는 없는 상태였다. 언제 봉문이 풀릴지 몰라 제자들을 계속 뽑고는 있지만 칠십 년 전에 입문한 제자들조차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임무를 맡은 적 없이 늙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난 반대야. 봉문이 풀리는 게 싫어."
장이가 별안간 울상을 지었다.
"뭐예요?"
"봉문이 풀리는 게 싫다니? 그럼 넌 지금처럼 죽어라 무공을 익혔는데 한 번도 써먹지 못한 채 늙어 죽는 게 더 좋단 말이냐?"
예혜상과 모자서가 일제히 장이를 바라보았다.
장이는 손을 내저으며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그럼. 난 그냥 지금처럼 지내는 게 좋아. 적당히 훈련받는 척하면 알아서 옷 주고 밥 주지, 잠잘 데 있지 얼마나 편해. 난 사람 죽이는 거 싫단 말이다."
"정말이지 너라는 놈은···!"
모자서가 혀를 내둘렀다.
북리곤은 장이가 짐짓 익살을 떨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가 뭔지 어리둥절했던 것이다.
'혈왕께서 설마 다른 제자를 둔 것일까? 신물인 혈왕비환을 내가 지니고 있으니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뭐, 사실이라면 누가 봉문을 해제하든 마찬가지이니 일단은 지켜보기로 하자.'
사실 북리곤이 월단퇴에 온 것은 단지 봉문을 해제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봉문을 해제하는 사람이 꼭 자신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