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선천무상결(先天無上訣)(2).
호연소는 숙소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지만 북리곤으로서는 태평하게 숙소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혈왕의 전인을 두들겨 팬 사건이 어떤 식으로 처리될지 아무래도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밤마다 검법을 수련하는 숲 속의 공터를 지나 산 위로 오십여 장을 올라가자 작은 나무 집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앞쪽에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는 전망 좋은 곳으로써 바로 귀검 유무명 장로의 거처였다.
북리곤은 목옥 앞에 이르자 문으로 다가가지 않고 일부러 앞마당을 서성거렸다.
"여기까지 왔으면 부를 일이지 왜 귀 아프게 발걸음 소리만 내고 있느냐?"
문이 열리며 귀검 유무명이 밖으로 나왔다. 곧바로 나오면서도 평상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은 게 분명했다.
"설마 이 늙은이가 보고 싶어 온 건 아닐 테고. 그래, 무슨 일이냐?"
"그게, 저어… 사실 오늘 제가 사고를 쳤어요."
"사고라니? 여제자를 건드렸느냐?"
"에이! 무슨 그런 황당한 말을!"
"그러게 말을 해야 알 게 아니냐. 설마 날더러 네가 무슨 사고를 쳤는지 알아맞히라는 건 아니겠지?"
"혈왕의 전인을 두들겨 팼어요."
"엉? 뭐, 사고랄 것도 없구나. 애들이야 싸우면서 크는 거고···."
중얼대듯 입을 열던 귀검 유무명이 화들짝 놀라며 새삼 북리곤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했느냐? 그러니까 후대의 문주가 될… 그 아이를… 아니, 그분을 네가 패버렸단 말이냐? 그래, 어느 정도나 팼느냐?"
"좀 심했어요. 이가 몇 개 부서지고 왼쪽 팔도 부러졌는데 어쩌면 갈비도 몇 개 부러졌을지 몰라요."
"끄응! 대형 사고구나. 한데 설마 날더러 뒤처리를 해달라는 건 아니겠지?"
"안 되나요?"
"이놈아, 사고를 쳤으면 사고 친 놈이 책임져야지 왜 내가 나서야 한단 말이냐!"
"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뭬야? 이놈아, 남이 들으면 늙은이가 주책없이 남색이나 밝히는 것으로 오해하겠다!"
본시 사랑이란 감추고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이미 상대가 느끼는 법이다. 사실 귀검 유무명은 특별히 내색한 적은 없었지만 북리곤을 친손자만큼이나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다.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할까?
어릴 때부터 주위의 어른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북리곤은 밝고 올곧게 성장해 그것이 또 남들을 잡아끄는 매력으로 굳어진 상태였다.
"헤···!"
북리곤은 짐짓 어린아이처럼 웃다가 문득 얼굴을 굳혔다.
"제가 찾아온 건 뒤처리를 부탁하기 위한 게 아니라 이상한 일이 있어서 의논드리기 위해서예요."
"이상한 일?"
"사실 난 내가 혈왕 할아버지의 전인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또 다른 전인이 있다니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니면 뭐겠어요."
"무슨 말이냐?"
"이걸 알아보실 수 있겠어요?"
북리곤은 품속에서 혈왕비환을 꺼내 귀검 유무명에게 내밀었다.
처음에는 맞지 않는 반지를 엄지손가락에 끼는 게 어색해서 빼놓았고, 나중에는 남들의 시선을 끌까 염려스러워 그동안 품 안에 간직했던 혈왕비환이었다.
"설마 혈왕비환?"
귀검 유무명은 더 이상 익살을 떨지 못했다. 그는 굳어진 채 혈왕비환을 세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잠시 후, 북리곤이 내민 혈왕비환이 진짜임을 확인한 귀검 유무명의 눈에 긴장이 물결쳤다.
북리곤은 백약선축에서 혈왕을 만났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랬구나. 어쩐지 이상한 점이 많다 했는데… 그렇다면 그 아이는 총사 포숙도가 만들어낸 가짜가 분명하다."
"가짜요?"
"그래. 봉문을 해제시키기 위해 가짜를 만들어낸 거겠지. 물론 그 아이를 문주로 내세운 뒤 뒤에서 조종하며 본 문의 전권을 장악하려는 야심도 있었을 테고. 이건 나 혼자만 알고 있을 문제가 아니다. 잠시 예서 기다려라."
"왜요? 다른 장로 분들을 부르시려고요? 하지만 지금은 모두들 주무실 텐데···."
"원래 늙으면 잠이 없는 법이다."
귀검 유무명의 신형이 그림자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의 음성이 북리곤의 귀에 들려온 것은 이미 그의 모습이 사라진 뒤였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귀검 유무명이 세 명의 장로를 대동한 채 다시 북리곤에게 돌아온 것은 미처 밥 한 끼 지을 시간도 되기 전이었다.
세 명의 장로는 혈왕비환을 확인한 후 각자 손을 뻗어 북리곤의 체내에 잠재돼 있는 곤음진기를 확인했다.
"이 아이의 몸 안에는 일 갑자가 넘는 막강한 진기가 잠재되어 있소. 게다가 한쪽에는 또 다른 진기가 웅크리고 있으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오. 그게 바로 곤음진기일까요?"
"그럴 것이오. 아직 촉발되지 않아서 그렇지 그 진기도 삼십 년 공력은 넘는 것 같소."
"과연 혈왕께서 이 아이를 전인으로 삼은 게 분명하오."
귀검 유무명 장로를 포함해 네 명의 장로는 북리곤을 가운데 세워놓고 갑론을박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북리곤의 귀에는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서로 전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북리곤이 곤음진기를 다스릴 줄 모른다는 데에 있었다.
서로 심각하게 의논을 거듭하던 네 명의 장로는 결국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너에게 곤음진기를 다스릴 수 있도록 기회를 주겠다."
잠시 후, 다른 장로들이 모두 돌아가자 귀검 유무명이 진지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북리곤은 기대를 품은 채 귀검 유무명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문주의 후계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연무관이 있다. 그 안에 들어가면 곤음진기를 연성하는 구결이 적혀 있는 비급이 있을 것이다. 원래는 혈왕비환을 지니고 있고 네 몸에 곤음진기가 심어져 있는 것만으로 널 혈왕의 전인으로 인정할 수 있지만 또 다른 전인이 나선 이상 넌 반드시 곤음진기를 펼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겠군요."
"널 총사 포숙도나 그 측근들이 모르게 은밀히 연무관에 넣어줄 테니 그 안에서 곤음진기의 비급을 찾아내 익히거라. 연무관 안에서 곤음진기를 수련하면 이미 네 몸에 혈왕께서 심어준 곤음진기가 촉발되어 이내 대성하게 될 것이다. 추측하건대 혈왕께서 그렇게 안배했을 것이다. 그러니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알았습니다."
"그럼 일단은 숙소로 돌아가 있어라. 내 준비가 끝나는 대로 널 찾아가마."
귀검 유무명의 거처를 떠나는 북리곤의 마음은 홀가분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그는 봉문이 해제되면 자신이 혈왕의 진짜 전인이라는 것을 굳이 내세우지 않고 떠날 계획이었다.
하지만 사고가 터진 이상 더 이상 감출 수만은 없었다. 사마기가 문주가 된 뒤 모자서나 예혜상에게 보복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북리곤은 수련장으로 가는 대신 총사의 측근 수하들에 의해 뇌옥으로 끌려갔다. 귀검 유무명 장로를 믿고 마음 턱 놓고 있던 북리곤으로서는 실로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짐작컨대 예혜상과 모자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장이와 호연소마저 또 다른 뇌옥에 감금된 게 분명했다.
조사나 심문은 없었다. 사마기의 일방적인 증언에 의해 북리곤 일행은 후대 문주가 될 후계자를 죽이려 한 엄청난 죄를 저지른 죄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상황이 어이없는 방향으로 진행되자 북리곤은 진정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더 이상 귀검 유무명을 믿고 의지할 수도 없을 듯했다.
월단퇴의 권력 구조가 어떤 형태인지는 모르나 일단 총사 포숙도가 먼저 손을 쓴 이상 원로원도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았다.
뇌옥은 좁고 협소했다.
발목 아래로 썩은 물이 괴어 있어 악취가 풍겼다.
예혜상을 떠올리자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모자서나 장이, 호연소 등은 남자이니 어떻게 해서든 견디겠지만 여자의 몸으로는 그야말로 단 하루로 견디기 힘든 지옥이 아닐 수 없었다.
'힘이 있어야 해.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강해져야 해.'
북리곤의 뇌리로 어젯밤 장이가 눈물을 흘리며 내뱉던 말이 떠올랐다.
북리곤은 다시 한 번 강해져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최소한 남에게 짓밟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강해져야 했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에게는 무공이나 권력, 심지어 음모나 모략조차 통하지 않을 것이다.
북리곤은 뇌옥에 갇힌 첫날 분노로 몸을 떨며 강해져야 한다고 수없이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둠 속에 감금되어 있자 시간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몇 시진이 지났는지, 심지어 며칠이 지났는지 헤아리기 어려웠다.
북리곤은 자신이 뇌옥에 갇힌 지 세 시진 정도 지났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벌써 며칠이 지난 느낌이기도 했다.
북리곤은 불쑥불쑥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치솟을 때마다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검왕의 묵화를 떠올렸다.
무수한 선(線)의 조합… 그 선 하나하나가 검의 궤적이며 초식이었다.
어떻게 보면 아무런 규칙도 없는 듯하지만 그 검의 궤적들은 하나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검의 끝을 보았다는 검의 절대자, 바로 검왕이 추구했던 길이었다.
북리곤의 시간 감각으로 삼 일이 지난 듯했다.
그동안 식사는 단 한 끼도 지급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찾아오는 사람도 일체 없었다. 이렇게 되자 아무리 낙천적인 성격인 북리곤조차 점차 절망감에 휩싸였다.
'이놈들! 아예 굶겨 죽이려는 모양이구나.'
공력이 깊어 시장기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그나마 처음 하루 정도만 시장기를 느꼈을 뿐 그 뒤부터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손과 발이 족쇄에 결박되어 있고 그 족쇄는 쇠사슬에 연결되어 벽면에 고정되어 있다. 움직일 수 있는 거리는 불과 두 자 정도.
가장 큰 괴로움은 자신의 손조차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이었다.
어둠 저 너머로 무언가가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다.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들이 스멀스멀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북리곤은 어둠이 인간의 의지를 갉아먹을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경험했다. 이런 식으로 몇 달을 보내면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울 듯했다.
그나마 묵화를 떠올리며 검왕의 검법을 조금씩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재미에 빠져 있지 않았다면 벌써 발작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뇌옥의 문이 열린 건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귀검 유무명이 뇌옥의 문을 열고 들어와 결박을 풀고 북리곤을 밖으로 데리고 나왔는데 계속 주위를 살피는 게 무척이나 조심스러워하는 행동이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사위는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널 뇌옥에 보낸 건 우리 원로들이다."
"예? 여긴 별로 좋은 곳도 못 되는데 왜 그랬습니까."
"너를 총사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일개 백의대 제자가 혈왕의 전인을 이길 정도라면 총사가 어찌 관심을 갖지 않겠느냐. 만약 그가 네 신분을 알게 되면 널 없애려 들 것이다. 다행히 사마기가 너희 네 명이 합공한 것처럼 변명을 해 총사가 너에 대해 특별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군요."
"그리고 널 뇌옥에 보낸 또 하나의 이유는 네가 연무관에 들어가 있는 것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느닷없이 네가 사라지면 총사 포숙도가 의심할 게 아니냐."
"하지만 총사가 뇌옥에 왔을 때 내가 없으면 발칵 뒤집어지지 않을까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총사 포숙도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깔끔 떠는 놈이라 뇌옥 같은 지저분한 곳에는 절대로 오지 않는다."
"그건 그렇다 치고···."
북리곤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짐짓 귀검 유무명을 노려보았다.
"이놈아, 눈 깔아라! 어른을 보는 눈빛이 왜 그 모양이냐!"
"도대체 나흘씩이나 뇌옥에 처박아둔 이유가 뭡니까. 정말이지 돌아버리는 줄 알았단 말입니다."
"그거야 네놈이 워낙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온 것 같아 교육 좀 시키기 위해… 아, 아니 그게 아니고, 그동안 일이 좀 많았다."
느물거리던 귀검 유무명이 황급히 말을 바꿨다. 북리곤이 씩씩대며 여차하면 어른이고 뭐고 없다는 식으로 노려보았던 것이다.
잠시 후, 귀검 유무명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북리곤을 데려간 곳은 문주의 거처인 혈왕전(血王殿)이었다.
월단퇴에서 최고의 중지(重地)라 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지키는 수하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미 칠십 년 전부터 비어 있었던 것이다.
주인이 없어도 매일 청소는 하는 듯 정갈하기 그지없었다. 그야말로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전각 내의 방들을 기웃거리던 귀검 유무명은 침실에 이르자 걸음을 멈췄다.
"이곳 어딘가에 지하 연무관으로 이어진 비밀 통로가 있을 것이다. 지키는 수하들은 없어도 시비들이 청소를 하기 위해 매일 드나들고 있으니 발각되지 않도록 조심해라."
"그나저나 부탁이 있습니다."
"뭐냐?"
"상 사매를 비롯해 모자서와 장이를 뇌옥에서 꺼내주십시오."
"그건 곤란하다. 네가 곤음진기을 다스릴 줄 알게 되었을 때 그 아이들을 곧바로 뇌옥에서 꺼낼 테니 넌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곤음진기를 익히도록 해라."
"그렇다면 최소한 편안하게 지내도록 해주십시오."
북리곤은 막무가내였다. 귀검 유무명이 대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내 아예 그 아이들이 있는 뇌옥을 황궁처럼 만들어주겠다. 이제 되었느냐?"
"예, 감사합니다."
귀검 유무명이 돌아가자 북리곤은 침실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기관진법에 대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 성취가 있었다. 게다가 북리곤은 원래 장인이었기에 감춰져 있는 기관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쪽 벽면에 서 있는 서가(書架)가 바로 지하로 이어지는 문이었다.
서가의 한쪽 구석에는 작은 구멍이 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바로 혈왕비환의 전면에 돌출되어 있는 아수라의 두상과 일치했다.
혈왕비환의 돌출된 부위를 구멍에 맞춘 뒤 반 바퀴 돌리자 잠금 장치가 해제되었다. 이어 서가를 옆으로 밀자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간 북리곤은 문을 원래대로 돌려놓은 후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계단을 따라 삼 장 정도를 내려가자 방원 십여 장에 달하는 넓은 지하 석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석실의 천장에는 야명주가 박혀 있어 전혀 어둡지 않았다.
석실 중앙에는 돌 침상이 놓여 있었는데 손을 대자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 침상이 이렇게 찬 걸 보니 잠을 자기 위한 게 아니라 분명히 따로 용도가 있을 것이다.'
북리곤은 천천히 석실을 둘러본 뒤 한쪽에 만들어져 있는 벽장을 열었다. 기대했던 대로 그 안에 곤음진기의 구결이 적혀 있는 비급과 그 외에 두 권의 책자가 들어 있었다.
마음이 급했던 북리곤은 대뜸 곤음진기라고 표제가 적혀 있는 비급을 펼쳤다.
<이 곤음진기는 선천무상결(先天無上訣)에서 갈라져 나온 심결인바 선천무상결은 원래 무공이 아니라 장생과 불로(不老), 나아가 등선(登仙)의 요체가 기록되어 있는 도가(道家) 제일의 금서(金書)였다.
선천무상결을 대성하게 되면 삼천(三天)에 오르며 천 가지 재앙이 없어지고 백 가지 병이 치료된다. 호랑이나 이리의 흉포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또 늙음을 물리쳐 영원히 살게 된다. 선천무상결의 공능은 몸속의 여러 신들을 불어 모아 신기를 맑고 바르게 하는데, 신기가 바르면 외부의 사악함이 침범할 수 없고, 여러 신들이 모이면 두려움이 미칠 수 없는 것이다.
하나 선천무상결 자체가 남을 공격하는 무공이 아니어서 사조께서 선천무상결에서 곤음진기를 파생시켰음이다.>
첫 장을 펼치자 곤음진기의 유래에 대해 적혀 있었다.
언제 누가 적었는지는 모르되 그 연대가 일, 이백 년 전이 아니라 그보다 더욱 오래된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북리곤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장을 펼쳤는데 그곳에는 축기(蓄氣)와 운기, 그리고 다시 쌓여진 기를 펼치는 용기(用氣)의 단계가 세밀히 적혀 있었다.
북리곤은 이미 연검록으로 내공을 쌓은 경험이 있어 구결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게다가 이미 혈왕이 단전에 심어둔 곤음진기가 있어 축기의 단계도 필요없었다.
잠시 후, 성급한 마음에 곧바로 곤음진기를 운기하려던 북리곤은 문득 석실 중앙의 돌 침상을 바라보았다.
"전에 연검록의 내공심법을 익힐 때 화기가 강한 곳에서 연성하니 그 성취가 빨랐다. 혹시 저 돌 침상 역시 그런 용도가 아닐까?"
북리곤은 자신의 추측을 시험해 보기 위해 돌 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순식간에 몸이 얼어붙으며 전신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돌 침상 전체가 귀하기 이를 데 없는 만년한옥(萬年寒玉)이었던 것이다.
연검록의 내공을 체내에 일주천시키면 엄습하는 한기를 막을 수 있었지만 북리곤은 일부러 곤음진기의 구결대로 만년한옥의 한기를 받아들이며 진기를 이끌어냈다.
곤음진기는 그 진기도인의 방법이 연검록의 구결과는 정반대였다. 기이하게도 연검록의 내공심법을 익힐 때는 전혀 사용하지 않던 경맥만을 따라 운기하는 방식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만년한옥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를 받아들여 곤음진기의 구결에 따라 일주천하자 단전에 잠자고 있던 곤음진기가 반응해 풀려 나왔다.
일단 단전에서 풀려 나온 곤음진기는 북리곤의 체내를 원전(圓轉)하며 완전히 일깨워지기 시작했다. 근 삼십 년에 해당되는 극음진기였다.
북리곤의 체내에서 놀라운 현상이 벌어진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원래부터 그의 체내에 쌓여 있던 일 갑자가 넘는 진기가 곤음진기에 반응해 운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각 경혈을 돌기 시작했다.
수미상응(首尾相應)이랄까?
마치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 어우르듯 곤음진기와 연검록의 진기는 충돌하지 않은 채 서로 감응하며 오히려 융화되려 했다.
사실 곤음진기와 연검록의 내공력은 서로 정반대의 성질을 지닌 진기였다.
이치대로라면 서로 상극인 두 개의 진기를 한꺼번에 연성할 수는 없다. 두 개의 진기가 체내에서 충돌해 주화입마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한데 곤음진기와 연검록의 진기는 교묘하게도 서로 휘감길 뿐 충돌하지 않았다.
'괴이하구나. 난 곤음진기를 운기했는데 연검록의 진기가 함께 움직이다니?'
북리곤은 운기를 멈춘 뒤 이번에는 연검록의 내공력을 단전에서 끌어내 연검록의 내공심법에 따라 운기해 보았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검록의 내공을 운기하자 이미 촉발된 곤음진기가 저절로 움직여 연검록의 진기가 흐르는 반대의 경혈을 따라 도도히 흘러갔다.
한 번 운기함으로써 연검록과 곤음진기 두 가지의 진기를 한꺼번에 연마하는 효과를 볼 수 있게 되자 북리곤은 내심 기쁘기 이를 데 없었다.
'혹시 연검록 역시 선천무상결에서 갈라져 나온 내공심법이 아니었을까?'
북리곤은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기한 현상에 대해 놀라는 한편 궁금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다!
북리곤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연검록의 내공구결은 원래 건양진기(乾陽眞氣)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었는 바 곤음진기와 마찬가지로 도가의 상도내법(上道內法)인 선천무상결에서 갈라져 나온 심법이었다.
선천무상결은 남을 공격하는 무공이 아니라 신진(神眞)의 도를 깨우쳐 육부를 편안하게 움직이게 하며 삼혼과 오장이 조화를 얻게 하는 도가의 공부였다.
또한 선천무상결은 음양의 기운을 따로 연성하는 신공이 아니었는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각기 극양의 기운과 극음의 기운을 연성하는 건양진기와 곤음진기로 분리된 것이다.
북리곤은 우연과 필연이 겹쳐져 원래 하나였던 신공을 따로따로 모두 얻는 기연을 얻었는데 공교로운 것은 처음부터 완벽한 선천무상결을 익힌 것보다 더욱 뛰어난 위력을 지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건양진기와 곤음진기, 두 가지의 기운을 하나로 합쳐 선천무상결을 운용할 수도 있고 또 필요에 따라 서로 다른 기운으로 운용할 수도 있다. 게다가 한 가지 진기를 연마하면 나머지 진기가 상응해 한 번의 운기조식으로 두 배의 효과를 볼 수 있으니 참으로 무림사에 다시없을 기사(奇事)가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