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살인의 법칙, 살인백율(殺人百律)(1).
선천무상결은 그 성질이 온유했다.
극양(極陽)도 아니고 극음(極陰)도 아닌 대자연 자체의 기운이었다. 때문에 선천무상결은 어떤 성질의 진기를 연공해도 모두 융화시키는 공능이 있었다. 마치 바다가 수많은 강줄기의 물들을 모두 받아들이되 결코 넘치지 않는 이치와 같았다.
북리곤은 원래 곤음진기만 다스릴 줄 알게 되면 곧바로 연무관을 나올 계획이었다. 하지만 곤음진기가 연검록의 기운과 상응하는 기이한 현상을 대하고 생각을 바꿨다. 두 개의 기운을 하나로 융화시켜 선천무상결을 완성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관건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운기법을 하나의 운기법으로 통합하는 방법이었다.
북리곤은 생각을 거듭한 끝에 결국 그 해결을 몸에 맡기기로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두 개의 진기가 스스로 합쳐지도록 내버려 두고 그 흐름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삼 일째 되는 날, 북리곤은 연검록의 진기와 곤음진기가 자연스럽게 합쳐지도록 마음을 썼다.
기를 움직여 순서대로 각 경혈에 보내는 것은 정확히 설명하자면 마음을 쓰는 일이다. 단지 그렇게 움직이도록 의념을 집중시키는 것이지 실제로 무엇을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북리곤은 두 개의 진기가 서로 다른 경혈을 일주천한 후 자연스럽게 하나로 합쳐지도록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예상대로 지금까지는 서로 휘감기며 반발하지도 않고 또 융화되지도 않던 두 개의 진기가 어느 한순간부터 서로 녹아들며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떨어져 있는 두 개의 물방울이 합쳐져 완벽한 하나의 물방울이 되듯 자연스러운 융화였다.
실로 거대한 힘.
하나로 합쳐진 진기는 정순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음(陰)과 양(陽),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았다.
그 진기는 다시 모든 경혈을 넘나들며 일주천하기 시작했다. 연검록이나 곤음진기에서 기가 흐르던 경혈들을 한데 섞어놓은 듯한 새로운 길이었다.
일주천이 끝난 기운은 스스로 두 개로 갈라지더니 한쪽은 임맥으로, 또 한쪽은 독맥을 향해 치달려 갔다.
북리곤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스스로 제어할 수 없었다.
퍼! 퍼퍽···!
착각이었을까?
몸의 두 곳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꺼번에 임독양맥이 뚫려 버린 것이었다.
아득하다.
그리고 또한 고요하고 담담했다.
북리곤은 자신의 마음이 이 세상이 아닌 광활한 곳을 노니는 느낌을 받았다.
마음이 지극히 평온한 가운데 여러 차례 감응(感應)이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북리곤의 마음은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서 출정하여 다시 멸수상정(滅受想定)에 들었다가 홀연히 되돌아왔다.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조금 전 나는 아득한 곳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눈을 뜬 북리곤은 어리둥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신이 한 줌 부운(浮雲)처럼 가볍다.
몸 구석구석에 엄청난 힘이 갈무리되어 아무리 써도 줄어들지 않을 듯한 느낌이었다.
북리곤은 자신이 과연 연검록과 곤음진기, 두 개의 기운을 하나로 합쳐 새로운 힘으로 만들어냈음을 깨달았다. 바로 선천무상결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또 극양의 진기와 극음의 진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
선천무상결은 원래 선하단을 복용해 얻은 일 갑자의 내공력과 그동안 연검록으로 쌓여진 진기, 그리고 다시 혈왕이 체내에 심어준 삼십 년의 공력이 합쳐진 막대한 진기가 되었다.
한데 선천무상결의 놀라운 공능은 둘에서 하나를 빼도 남는 게 둘이 된다는 점에 있었다.
북리곤은 곤음진기만을 따로 운용해도 근 이 갑자에 달하는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극양의 진기인 건양진기를 운용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북리곤은 벽장 안에 곤음진기의 비급과 함께 있던 다른 책자들을 집어 들었다.
<살인백율(殺人百律).>
"살인의 백 가지 법칙이라?"
북리곤은 살인백율이라는 표제를 보고 흥미를 잃었다. 살수가 되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데 다시 넣어두려다 아쉬움이 남아 내용을 살펴보던 북리곤의 눈이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살인백율이라고 표제가 적혀 있었지만 살인의 방법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없었다.
살인백율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대부분 처음 무공에 입문하는 무인들이 유의해야 할 사항이었다. 대자연의 기를 흡수해 공력을 높이는 방법이라든지, 무예를 익히는 데 필요한 마음가짐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쉽게 말해 무공의 가장 기초적인 학문이랄 수 있었다.
북리곤은 살인백율이 어쩌면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공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익힌 무공들이 스승에게서 체계적으로 배운 게 아니라 일종의 벼락치기 무공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북리곤은 점차 살인백율에 빠져들었다. 대충 훑어보기 위해 앉지도 않았는데 그는 그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책에 심취해 들었다.
살인백율 안에는 장이 거듭될수록 북리곤의 흥미를 잡아끄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북리곤은 의식의 일부만을 사용하는 방법이 적혀 있는 부분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을 정도였다.
인간은 몸의 일부분만 부상을 당해도 전신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손톱 밑에 작은 가시가 박히게 되면 그 고통 때문에 손 전체를 쓰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살인백율에 기록되어 있는 방법을 사용하면 부상당한 부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있었다. 고통을 참는 게 아니라 고통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방법이었다.
그 외에 살인백율에는 참으로 유용한 여러 가지 기술이 기록되어 있었다.
의식의 초점을 한 점에 맞추는 법, 오감을 날카롭게 다듬고 나아가 육감을 발달시키는 법, 상대의 내심을 읽을 수 있는 법, 주변의 상황을 기억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어 활용하는 법 등등.
"마음에 드는 공부로구나."
북리곤이 책에서 눈을 뗀 것은 근 반 시진 만의 일이었다. 무슨 일에든 한 번 빠져들면 침식조차 끊어버리는 성격치고는 꽤나 빨리 제정신(?)을 차린 셈이었다.
"챙길 때는 확실히 챙기라고 누가 말했었지? 공자님? 맹자님? 그분들이 아니면 이렇게 생활에 유익한 명언을 남길 사람이 없을 테니 두 분 중 한 분이 말한 게 맞을 거야."
북리곤은 또다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비급의 내용에 빠져들까 염려스러워 나머지 서책은 제목도 보지 않은 채 품속에 갈무리했다.
"내게 어려운 일을 부탁했으니 이 정도는 챙겨도 뭐라 안 하시겠지요, 혈왕 할아버지? 안 그래요?"
결과적으로 벽장 안에 비장되어 있던 세 권의 비급을 모조리 챙긴 북리곤은 아무도 없는 빈 연무관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 * *
물론 시력이나 청력이 예전에 비해 급등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북리곤이 주위의 매복자들을 느끼는 것은 보고 들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느낌 그 자체였다. 오감이 아닌 육감(六感)이었던 것이다.
북리곤은 시험 삼아 자신이 주변 어느 곳까지 느낄 수 있는가 시험해 보았다.
놀랍게도 오십 장 범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느껴졌다.
온갖 산짐승들의 기척, 그들이 내뿜는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 심지어 조용히 열리고 있는 꽃망울의 움직임까지.
북리곤은 혈왕전 주위를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는 매복자들을 눈으로 보듯 확연히 느끼며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총사의 수하들일까? 내 신분을 알고 제거하려고 수하들을 매복시킨 것일까?'
그야말로 살기(殺氣)의 바다였다.
수효는 대략 이백 명 정도.
그 많은 인원이 단 한 명도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이니 실로 놀라운 은잠술이 아닐 수 없었다.
'한데 이상한 것은 내가 연무관을 나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살기가 강렬해졌다는 점이다. 날 노리고 매복해 있는 것이라면 살기를 감출 텐데 오히려 일부러 살기를 내뿜는 느낌이라니?'
이백여 명이 한꺼번에 살기를 내뿜자 수천 개의 바늘이 한꺼번에 전신을 찔러대는 느낌이다.
'빌어먹을! 무형의 살기가 유형의 물체처럼 느껴지다니, 감각이 너무 예민한 것도 이럴 때는 오히려 손해로구나.'
북리곤은 선천무상결을 완성한 이후 전신의 감각이 극대화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는 내심 오히려 투덜거리며 주위를 쓸어보았다.
북적대는 저잣거리처럼 주변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저 꼬맹이가 혈왕의 전인이 맞는 거냐?"
"그건 그렇고, 이틀 정도면 나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이제야 기어 나오는 걸까? 설마 구결대로 운기 한 번 하는 걸 나흘씩이나 걸린 건 아닐 테고."
"왜 아니겠느냐! 생긴 걸 봐라. 고집만 센 멍청이처럼 생기지 않았느냐!"
살기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같이 나이가 적잖을 듯한 노인들의 음성이었다.
"맞아. 저 애송이는 분명히 멍청할 거야. 조금 전 우리가 일부러 살기를 뿜어냈는데도 아예 느끼지도 못하잖아."
"하긴, 그 정도의 살기라면 웬만한 사람들은 제자리에 주저앉아 똥오줌을 싸야 할 텐데 저놈은 멀쩡하니 신경이 둔한 건지 워낙 멍청해서인지 알 수가 없어."
과연 북리곤은 신경이 둔한 건지 멍청한 건지 판단하지 못할 정도로 오랫동안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수백 마리의 까마귀 떼가 한꺼번에 울어대는 듯하던 소란이 가라앉았다.
북리곤이 허공에 대고 외쳤다.
"지금 내가 무서워해야 하는 겁니까? 두려워서 벌벌 떨어야 하는 거냐고요! 만약 그래야 한다면 조금 있다가 벌벌 떨 테니 누가 먼저 먹을 것 좀 주십시오. 생각해 보니 벌써 열흘 가까이 아무것도 안 먹었습니다."
조용했다.
그 많던 매복자들이 한꺼번에 증발해 버린 듯한 침묵이 잠시 동안 이어졌다. 북리곤의 태도에 어이가 없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해서 잠시 동안 입을 열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처벅··· 처벅!
문득 나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북리곤의 앞쪽에서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한 움직임이었다.
땅딸막한 체구에 오른손만이 기형적으로 큰 노인이 북리곤 앞에 나타나는 순간 사방 곳곳에서 돌연 횃불이 밝혀졌다. 몸을 숨기고 있던 이백여 명에 달하는 매복자가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들 흑의를 입고 있다는 것과 당장이라도 관에 들어가라고 해도 섭섭해 하지 않을 파삭 늙은 노인들이라는 점이었다.
노인들이 자리 잡고 있는 자세는 실로 각양각색이었다.
지붕 위에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은 그래도 봐줄 만했다. 장소가 비좁은 탓인지 나뭇가지 위에 새 떼처럼 옹기종기 앉아 있는가 하면 담 위에도 빽빽이 앉아 있다. 그나마 그런 자리도 못 잡은 노인들은 그냥 바닥에 털썩 앉아 있었다.
다가오던 노인이 북리곤의 일 장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강호에 나가 있다가 며칠 전에 귀환한 내 둘째 사형이다. 좋게 말하면 까다롭고, 나쁘게 말하면 성질이 더러운 사람이니 예의를 잃지 마라. 아차 해서 비위를 건드리게 되면 혈왕의 후예고 뭐고 그냥 목을 따버릴 사람이다."
어디선가 귀검 유무명의 전음이 북리곤의 귀로 파고들었다.
그제야 북리곤은 혈왕전을 가득 메우고 있는 노인들이 총사와는 무관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몰려온 겁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북리곤은 귀검 유무명의 전음이 들려온 방향을 향해 역시 전음을 보냈다.
사실 그는 조금 전만 해도 전음을 보내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 그가 능숙하게 전음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살인백율 덕분이었다.
"혈왕의 진짜 전인이 나타났는데 관심을 없다면 월단퇴의 식구가 아니지. 원래는 모두들 몰려오려는 걸 일단 장로급으로 한정한 것이다."
"맙소사! 지금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장로들이란 말인가요? 무슨 장로들이 이렇게 많아요?"
"생각해 봐라. 혈왕의 봉문령이 내려진 게 칠십 년 전의 일, 당시 막 적의대를 출관한 제자들의 숫자가 나를 포함해 칠십 명이었다."
봉문령이 내려지지 않았다면 장로가 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살수는 적의대를 출관한 살수들의 십분지 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봉문령이 내려져 임무를 맡지 않으니 죽을 일도 없었다. 때문에 귀검 유무명과 동기인 제일대 장로들의 수효만 해도 칠십여 명에 달하게 된 것이다.
뿐이랴!
그 아래로 오 년마다 다시 오십 명에서 일백 명 사이의 신입 제자를 받아들였고, 그 제자들 역시 임무를 맡지 못한 채 계속 수련만 해오고 있었다.
관례대로 나이가 든 살수들을 모두 장로로 예우했다가는 장로의 숫자만 오백여 명에 육박하게 되는 것이다. 아예 팔십이 넘기 전에는 장로가 될 수 없다는 규칙이 정해진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