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
퇴근길에 나는 그를 발견했다.
해가 길어져 이제 막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하늘이 그의 등 뒤로 펼쳐졌다. 구름이 뭉게뭉게 솟아오른 와중에 하늘이 빨개지고 있었다. 어쩐지 그림 같네. 하지만 역광 때문인지 서있는 남자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별 감흥 없이 지나가던 나는 잠시 멈춰 섰다. 남자가 나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거리도 멀거니와 미동도 않고 서 있는 자세가-의도했던 아니던-그의 움직임을 차단하는 것 마냥 보였다. 어쩐지 으스스하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발견했다, 라는 표현을 써도 될는지는 사실 좀 의문스럽다. 하지만 역시 그 말 이외에 그와의 만남을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 든다. 그때에도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훗날 알게 된 거지만 나를 만나러 온 정확한 목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마치 내가 알아서 그를 알아보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확실히 그래야한다는 듯이.
그늘진 얼굴 위로 진지함이 깃든 눈동자가 나를 정확히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한 발짝 내딛자 얼굴이 드러났다.
그늘이 사라진 그 얼굴을 보고 나는 살짝 안도했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얼굴은 눈동자만 희번득해서 위압감을 주었는데 막상 보니 완전 애였다. 고등학생? 심지어 교복을 입고 있었다. 단정한 남색 자켓에 마찬가지로 같은 색의 넥타이. 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교복이 안정감 있게 잘 어울렸다.
키는 나와 엇비슷하거나 조금 컸지만 아까와 같은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눈이 큰 타입이었는데, 눈매자체는 날카로워서 조금 인상 깊었다.
내 눈 앞에 있는 남학생을 그렇게 품평하는 동안에도 그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내가 발견하기 전부터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나는 전혀 몰랐다. 아니 딱 봐도 나한테 용건이 있는 건 상대방이 아닌가?
어색한 침묵과 시선 교환에 에라 모르겠다, 그냥 자리를 뜨려는 찰나 그가 나를 불렀다.
"신창준씨."
그 말투에 압도당하는 바람에 나는 어설프게 네, 네? 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피하던 시선이 다시 맞물렸다. 보통 누군가와 말을 하거나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거리감이랄까 그런 게 있지 않나? 이 꼬맹이가 심각하게 불편한 이유가 단 한 번도 내게서 눈을 돌리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는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잘 알아들으라는 듯,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면서 너무 느리거나 빠르지 않게 말했다.
"당신, 이수진 선생님 알지?"
그 이름이 내 뇌리를 통과해 기억으로 재구성되기 전에 나는 그 강렬한 눈빛에 누군가를 떠올렸다. 대체 어디서 그 이름을? 잊고자 노력하면 어느 순간 잊게 된다는 자명한 진실이 눈 앞에 있었다. 어떻게 그녀를, 그녀의 존재를 잊고 살아갈 수 있었던 걸까. 두고 온 그녀의 발걸음이 뒤늦게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무게를 드리웠다. 세상이 나를 비난하는 것 같은 착각에 소름이 끼쳤다. 그 날처럼.
나는 생경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것이 나와 그의 첫 만남이었다.
.
"이치호야."
이름을 물어보는 내게 그는 굳이 내가 왜 그런 말을 당신한테 해야 하지? 라는 얼굴로 뚱해 있다가 대답했다. 내팽개치듯 던진 말을 나는 하나하나 주워 담는다. 이치호.
말하고 나서 대답을 요구하는 마냥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저 표정. 남의 얼굴을 잘 읽는 편이라고 생각치 않았는데 그의 얼굴엔 쓰인 문장과 빈정거리는 뉘앙스까지 제대로 느껴졌다.
소위 말하는 '빡침'이 끌어 올랐지만 나는 뒷머리를 될 대로 벅벅 긁는 걸로 분노의 표출을 대신했다. 다시 치호를 쳐다보았을 때 그는 무심하게 나를 바라보다 메마른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수진을 아냐는 물음에, 바톤이 던져져 뭔가를 말해야하는 건 다름 아닌 내가 되었다. 얼굴로는 이미 모든 걸 말하고 있을 터였다. 나를 보는 그의 얼굴이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음으로. 하지만 입은 풀이라도 붙인 듯 떨어지지 않았다. 이건 심경의 문제야. 정말로 입이 붙어버릴 리 없잖아. 마음으로 추스려도 실상 그 마음은 추스리지 못한듯 싶었다. 그녀의 이름만으로도, 그 무게가 너무 컸다. 난 눈만 꿈뻑거리다가 도리어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 나름 공격이었다. 그가 물은 질문에 대한 대답과는 달리 손쉽게 말이 흘러나왔다.
"넌 누군데? 애시 당초 당신이라니..너 몇 살이야?"
그는 안 그래도 지루해 죽을 것 같은 영화에서 진부하다 못해 고리타분한 장면에 기가 찬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황당무계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나보다 열 살 이상 어려보이는 놈한테서 쉬이 볼 수 있는 얼굴은 아니었다.
"이수진 선생님."
제 신분을 밝히기는커녕 그는 그녀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번복했다. 그렇다 이거지. 제대로 혼쭐을 내줘야겠다는 생각을 한 찰나, 그 호칭에 귀가 열렸다.
"선생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다 이윽고 소리쳤다.
"아 너 설마.. 그때 그 꼬맹이???"
꼬맹이라는 표현에 그는 얼굴을 구겼다. 이제야 알겠냐는 듯 나를 쏘아본다. 건방진 표정을 보니 기시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녀의 존재만을 기억하고 있던 나에게, 그것도 쏟아지는 혼란 속을 유영하는 내게, 그녀 옆에 있던 어린아이를 생각해내지 못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던 아이의 모습은 그 자리에 못박힌 채 변함 없었고, 남겨둔 그녀 외에 나와는 다른 시간을 살아가던 그 아이를 전혀 떠올리지 못하게 했다.
그녀가 아닌 어른을 어른 취급하지 않았던 그 작았던, 괘씸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귀여웠던 아이.
새삼스럽게도 내가 그 아이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치호 라는 이름에서 떠올릴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름 정도는 분명히 들었을 텐데.
아이의 시간이란 신기하다. 9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한다면 머릿속에 선뜻 떠오르는 것이 없다. 하지만 작았던 아이는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다. 자각하고 나서야 어릴 적과 많이 겹쳐져서 왜 이제껏 몰랐을까 싶은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