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호는 말을 하면 돈이라도 내는 것 마냥 말을 아꼈다. 눈으로는 어쩐지 수많은 말을 하는 것 같은데도, 최대한 눌러 담고 넘어가는 걸로 보였다. 그게 사람을 답답하게 했다. 너랑 할 얘기가 없는데도 그랬다.
결국 내 말을 끝으로 이어진 침묵에 백기를 든 건 나였다. 설상가상으로 회사 앞으로 아는 직원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끌고 회사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긴 게 바로 몇 분 전 일이다.
프랜차이즈의 기세에 밀려 간신히 손님만 유지한다는 듯한 느낌의 카페 내부는 직접 로스팅 한 원두만 쓴다는 주인의 말에 따라 은은한 원두향으로 가득차 있었다. 원목 벽지와 어울리지 않는 거무죽죽한 와인색 소파를 보고 치호는 눈썹을 까닥였다. 몇 년도부터 보이지 않았던 건지 모를 미묘한 패턴의 식탁보-적어도 그런 이름이 적절해 보였다- 위에 두꺼운 유리를 올려놓은 테이블은 소파와 더불어 시간 여행이라도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법했다. 카페라고 부를 만한 수준이면 손님 수는 짐짓 달랐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면 사람 많은 공간이 되어버린 이 곳에는 아마 발걸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먼저 앉아 소파를 통통 두드리면서 맞은편 자리를 눈짓했다. 나 역시 처음 왔을 때 저런 반응이었다.
"지금 완전 아저씨 같다고 생각했지."
"아니."
내가 턱을 괴고 쳐다보자 치호가 다시 말했다.
"조금."
나는 목청을 높여 웃었다. 커피 맛은 보장할게. 마셔보면 놀랄 거다 너?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상대로 치호는 의구심을 풀지 않다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케냐AA를 한 모금 마시고선 입을 꽉 다물고 눈을 꿈뻑였다. 맛있지만 바로 맛있다고는 인정 못하는 괴리감에 얼굴이 오묘해졌다. 사람들의 이런 표정을 보는 게 카페 주인의 낙이라고 했다. 들었을 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과연 일리 있는 말이다.
"그래서?"
나도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입 안 가득 진한 향이 퍼졌다. 웃기게도 난 이럴 때마다 용기가 났다. 맛있는 음식이 식도를 넘어가면서 바로 에너지로 바뀌는 느낌.
"맛있는 커피도 대접했겠다.. 하던 얘기마저 할까? 넌 이치호고, 수진이 데리고 다니던 아이야. 너랑 나랑은 솔직히 그다지 친했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9년 만에 날 찾아온 이유는?"
물론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닐 테고. 그 말은 삼켰다. 제법 도전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기분을 상하게 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치호의 눈에 그제야 생기가 돌았다.
"도움이 필요해서."
"아하. 도움.."
겉저리를 뱅뱅 도는 말을 혀 속에서 굴리고 있자니 갈증이 났다. 떨쳐버리고 싶은 내 과거를 현재로 불러일으킨 이유가 도움이라.
나의 탁한 눈동자 속에 남을 도울만한 호의가 과연 남아있나. 누군가의 도움이 된다는 말 자체가 생소했다. 의심쩍은 듯한 내 얼굴을 보던 이치호가 입을 달싹였다. 뭔가를 말하고 싶은데 상당히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저건 고민 끝에라도 결국 말하는 류의 사전행동이었다.
"선생님은,"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살한 게 아니야."
자살, 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그가 말했다. 강조라기보다는 힘겹게 버티는 말투였다. 아니라고 사정없이 외치는 목소리 같았다. 미친 듯이 부정하고 싶은데 말을 해야할 때, 그게 내 입 밖으로 나가며 소리로 만들어질 때. 쥐어짜는 듯 한 말은 형태소 하나까지 놀랍도록 정확하게 발음한다. 그의 말을 따라 나까지 힘겨움에 얼굴을 구긴 건 그래서였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다잡았다. 무표정. 무감각. 무(무)를 채워 넣은 단어를 속으로 떠올렸다. 무. 무. 무....
"그러면?"
덕분에 냉정하고 침착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에 미치광이처럼 발광하던 나를 생각하자면 놀라운 발전이었다. 그녀가 자살했다는 말을 가장 믿지 못한 게 나였을 거다. 그래서 찾고, 찾고 또 찾았다. 하지만 그렇게 찾을수록 모든 것이 그녀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져버렸다는, 간단명료한 사실로 귀결되었다. 경찰이 나설 것도 없었다. 위조? 공작? 그런 것도 없었다. 가지런한 글씨로 유서를 쓰고. 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그녀는 떠났다.
그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이 내게 필요했을 따름이었다. 그 뒤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정말이지 놀라울 만큼 전혀 없었다.
"당신, 별로 놀라지 않네."
부들부들 떠는 것처럼 보이던 치호가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눈빛에 한기가 서렸다.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내 말 믿지 않는구나."
"들어보고."
"못된 어른이네."
"너도 착한 아이는 아닌 것 같다?"
"..선생님이 자살했다고 생각해?"
"응."
"물리 적인거 말고."
"아니."
누가 이런 질문을 할 거라 예상한 적도 없었지만 준비된 듯 대답은 거침없이 나왔다. 뒷목털이 누가 잡아당긴 듯 쭈뼛해졌다. 목이 갈갈했고, 어느새 나는 한쪽 다리를 달달 떨고 있었다.
"...본론부터 말할게. 최근 맡은 사업이 있지? DM클럽이라고."
떨던 다리를 딱 멈췄다. 허리를 곧추 세웠지만 치호는 나한테 말하던 상태 그대로였다. 기분이 나빴다. 그리고 신기했다. 이해 안되는 건 신기함이 더 컸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너 내 뒷조사 했니?"
"아무런 준비도 없이 여기까지 올 리 없잖아."
뻔뻔한거 보소..내가 너무 약하게 반응했나? 좀 더 으르렁거리듯 다그쳐야 했나? 고민하는 사이 치호는 제 할 말을 시작했다.
"DM클럽 대표가 김도명이야."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치호가 작게 한숨 쉬었다.
"도명제약 이사장 김도명이라고."
그 순간 잘근 잘근 씹던 뭔가를 퉤, 내뱉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씹던 것도 없고, 내뱉을 것도 없었다. 목지게 올라오는 무형의 덩어리가 식도를 막는 순간 드는 생각은 '참 바보 같다' 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주 전. 주말을 포함했으니 제외하면 열흘 전. 나는 회사에서 한 사업을 맡게 되었다. 전반적 인테리어 및 시행사를 겸해 DM클럽이라는 프랜차이즈 클럽 10호점의 개점 인테리어 계획서였다. 왜 이게 내 손에 오게 된 것인지의 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일단 우리 회사가 세 번 째 회사였다. 까다로움. 그 숫자 하나만을 가지고도 유추할 수 있었다. 계약파기는 번번히 업체 쪽에서 했다고 들었다. 위약금을 물어가면서도 고개를 젓는 사양 사업. 아마 사람 문제겠지. 일이 거지같아서 계약이 옮겨가는 경우는 내가 알기론 거의 없었다. 이거 또 골치 아파지겠고만. 굵게 쓰인 글씨에 유달리 영문이 크게 보였다. 그때까지 DM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던 문자 나열에 불과 했다.
대표이사 이름을 보지 않았을까? 아니 확인했겠지. 실제 나는 치호가 짚어주기 전까지 그 김도명이 이 김도명과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보통 자기가 나온 초등학교는 알아도 교장 이름만 듣고 기억하는 건 어렵지 않나. 어쨌든 그 이름이 가져온 여파는 충분히 강했다. 나는 바닥이 보이기 시작하는 커피 잔을 들이키고 대충 넘겨야겠다 싶어 슬렁슬렁 하던 일에 빨대를 딱 꽂은 고등학생을 쳐다보았다.
"복수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누구한테? 김도명한테?"
나는 헛웃음을 쳤다. 비아냥거리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입 밖으로 질질 새는 웃음은 그것 외엔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치호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가 나한테 말했다.
"한 번에 오케이할거라곤 생각 안했어."
그의 잔에 담긴 커피는 반이 넘게 남아있었다. 그는 식어버린 커피를 단숨에 들이키고 테이블 위에 놓았다. 잘그락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일주일 뒤에 다시 올게. 그때 얘기해."
벙쩌있는 내가 잡기도 전에 그는 몸을 일으켰다. 나가면서 커피가 맛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카페 주인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딸랑, 지나치게 경쾌한 방울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주문이 풀린 듯 움직였다. 하지만 이미 이치호는 없었다. 나와 그를 번갈아 보던 카페 주인만의 시선만이 잔여물처럼 남아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