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의 의도가 나를 궁금하게 하는 것이었다면, 아주 제대로 통했다.
미처 준비를 시작할 틈도 없이 서둘러 마무리 되어 버린 말. 자 이제 퇴장이오, 하듯 후다닥 사라지던 뒷모습. 여지처럼 툭 던져놓은 일주일.
그게 거슬렸을 것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다그쳤지만 여러모로 그건 무용했다. 잊었다 생각한 기억은 잠깐의 휘적거림만으로도 되살아났고 어지간해선 사라지지 않았다.
비겁해. 너는 비겁해.
누구의 말도 아닌 내 안에 응어리진 문장하나가 자꾸만 솟아오른다. 그 목소리는 내 목소리이면서 내 목소리가 아니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꾸만 과거로 되돌아간다. 그리고는 혼란스러워진다. 이 상태가 정말 불편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생각해보라던 그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나는 일주일이 어서 지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치호라는 이름 빼고는 그 아이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 없었다. 연락이 오지도 않았고 나도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딱 일주일이 되던 날 나는 그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날카로운 신경은 오늘이 오기를 바라고 있었는데도 그랬다. 혹시 안 올지도 몰라. 그리고 나는 여전히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겠지.
하필이면 그날 나는 늦게까지 야근을 했다. 오후 5시가 넘어 떠맡은 업무였다. 시계를 노려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고, 나는 반쯤은 포기한 기분으로 일을 했다.
회사 밖을 나온 시간이 열 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설마 있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페로 갔지만 카페 문은 굳건히 닫혀 있었다. 대신 시커먼 뭔가가 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보는 순간 그게 이치호란 걸 알았다.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기쁨과 부담감이라는 양가감정으로 나를 공격하는데다 잔뜩 꼬아놓은 실타래가 풀리는 듯한 감각은 허무감을 동반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이 내 시야에 정확히 잡히는 순간 그건 모두 잊고 나는 소리치고 말았다.
"야 너..! 이게뭐야?!"
달빛아래 어슴푸레 드러난 치호의 얼굴은 처음 봤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눈가와 입 주변에 피딱지와 볼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있었다. 멍은 파란 와중에도 피가 뭉쳐 빨간 점 같은 게 보이는데다 이제 막 활개 치듯 부풀어 오르는 중이었다. 보기만 해도 그곳에 뜨끈뜨끈한 열이 오르고 있는게 느껴졌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건들면 아플 거란 생각은 했는데도 불구하고 한걸음에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움찔하는 그의 솜털까지 내 손가락에 와 닿았지만 뿌리치지는 않았다. 대신 아팠는지 그는 윽, 이라고 입술 새로 내뱉었다. 하지만 이내 잠잠한 반응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무미건조한 표정이었다.
도리어 내가 아픈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누가 그랬어??"
"..그게 중요해?"
"뭐어?"
그의 담백한 말투에 황당해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결코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으아아.."
그가 괴상한 소리를 냈다. 곱상한 얼굴을 망가뜨리고 온 거는 안쓰러웠지만 나도 모르게 조금은 샘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조금.
"패싸움도 아닐 거 아냐. 어디 할 짓이 없어서...내 이 놈들을 그냥..!"
멀쩡히 서있는 걸 보니 얼굴만 집중적으로 가격한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을 인지하니 또 분통이 터졌다. 흥분한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피식 웃었다.
웃어?
방금 전보다 더 황당한 표정일 것이 분명한 내가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껏 소리 내던 사람은 나뿐이라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잠시 주위가 적막에 휩싸였다. 그때까지도 가만히 내 동태를 살피던 그가 말했다.
"아니 너무 친절하셔서..내가 다 놀랐네."
치호의 입꼬리는 슬그머니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비아냥도 수줍음도 아닌 말은 담백하기 그지없었기에 그냥 말 뜻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단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한숨을 한번 쉬고 그에게 말했다.
"..일단 상황설명 좀 해봐. 그 꼴로 여기 왔으면 그럴 의사는 있겠지?"
의외로 그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전에 병원 좀 가야겠다."
병원은 아이보리색 건물로 1층은 전형적인 약국이었지만 2층부터는 목조 간판의 수수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외과 병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환한 불이 아직 켜진 채였다. 야간진료를 하는 건 목요일 금요일로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처음 개원했을 때 별로 병원 같지 않은 분위기라고 말했더니 유진은 그게 키포인트라고 하면서 제대로 '병원 같지 않은 병원'을 개원한 일이 아주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때는 그 말이 시답잖게 느껴졌기 때문에 허무하게 웃으며 너답다고 너스레를 떨었던 기억이 있다. 늦은 밤 도착한 유진의 병원은 위압감이나 병원 특유의 황망한 기운이 적어서 안심이 되었다. 그때 그렇게 말한 이유가 이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들어가 이름을 말하기도 전에 유진이 나왔다. 개원 시부터 일하고 있던 간호사가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이 년..아니 이 년 반 정도 되었으려나? 그새 유진은 더 말랐고 머리는 좀 더 짧아졌으며 웨이브가 들어간 밝은 염색을 하고 있었다. 검은색 뿔테 안경이 묘하게 그녀와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내 옆에 멀뚱히 서있는 그를 보더니 아주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럴 테지. 설명은 나중에 요구하겠다는 무언의 눈동자가 나를 한번 바라보더니 일단 들어오라고 했다.
"일단 앉으시고,"
치호가 의자에 앉았다.
"..보호자분은 잠시 학생 어깨 좀 잡아주세요. 따가우면 피하게 되다보니."
그녀는 하얀 가운을 펄럭거리며 그 앞에 앉았다. 원장인 그녀가 직접 볼만한 정도는 아닐 텐데 몇 가지 약품과 집게, 솜 같은 것을 가져와서 그의 얼굴을 면밀히 살펴보더니 치료를 시작했다. 비릿한 피냄새 위로 소독약 냄새가 겹쳐졌다.
묵직하게 누른 그의 어깨는 꽤 뭉쳐있었다. 긴장했나? 태도는 돌부처 같아도 이렇게 맞을 정도면 방어해보려 애쓰지 않았을까. 샌드백처럼 맞고 있던 그의 시간은 이미 과거가 되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걸로 현재처럼 생생했다. 더군다나 얼룩덜룩한 얼굴과 비린 피냄새. 달그닥 거리는 철제기구의 소리와 함께라면.
맞아본 사람은 안다. 아주 간단한 걸로도 과거가 현재가 되고, 다시 한 번 맞을 수 있는 그 생생한 버튼을.
그는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나타났다. 담담하게 복수를 운운하는 눈동자는 그의 등장과 퇴장처럼 어떠한 악의나 열의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느꼈다. 하지만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았던 건 혹시 나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무것도 비추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