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나였을까?
이건 직감적인 것이었지만 그는 나 이외의 어떤 사람에게도 그녀에 대한 이야기나 그런 명령조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우연히 맡은 사업이 김도명과 연관되었기에? 과거의 자그마한 인연이라도 있어서? 그럴싸한 이유를 붙일 수는 있겠으나 그게 진짜 이유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의중을 알 수 없었다. 나는 그가 내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 그녀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 내 뒷조사를 다 하고 나서 모습을 드러낸 거라면, 무슨 이유에서든 난 적당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도 제대로 해낸 게 없었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손의 자유가 없어진 나는 문득 시계를 보았다. 11시 15분. 늦은 시간이었다.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혹은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모든 것이 같을 예정이었다. 반복되는 굴레 속에 생각이란 귀찮고 불편하다는 덩어리로 포장되었고 나는 그 포장지를 열어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맥박이 뛴다.
갑자기 손바닥 아래쪽에서 맥박이 뛰기 시작했다. 뜨뜻한 땀이 삐져나왔다. 불쾌한 기분이 들어 손을 닦고 싶었지만 여전히 내 손은 그의 어깨위에 있었다.
시계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째깍째깍. 막상 인지하고 나니 거슬린다. 뭐야. 이게 뭐냐고.
시간이 지나간다는 사실을 이토록 생생히 느낀 적이 없었다. 없었나? 모르겠다. 분명한건 이 모든 상황이 나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치료 끝났어요. 타박상이 조금 있기는 한데 찜질이랑 잘해주고 덧나지 않게 조심하면 상처는 잘 아물거예요."
"아.."
탄식에 가까운 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유진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긴장이 풀려버린 것이다. 그녀가 나를 힐끔 쳐다본다. 그 속에 미미하게 잠긴 냉랭함이 보인 듯 하여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 눈가랑 입가 쪽에 많이 다친 거 같던데..이거 상처 안 남을까?"
찢어진 건지 뜯긴 건지 모를 그의 깊은 상처. 얼굴을 처음 본 순간 느꼈던 불안감이 떠올라 내가 물었더니 유진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아주 멀쩡해진다고 말하긴 어렵겠다. 다행히 꼬집거나 손톱으로 할퀸 자국이 아니라서 잘 관리하면 거의 눈에 띄지는 않을 테지만. 얼굴이 괜히 중요한 게 아니야. 이치호 학생. 다음부턴 조심해."
"..네."
거즈를 붙인 눈가가 불편한지 그는 자꾸 손을 갖다 대었지만 유진이 빤히 쳐다보자 슬쩍 손을 내렸다.
"그러면 치료는 끝났고...둘이 무슨 사이인지 물어봐도 될까?"
"어..."
"숨겨놓은 아들?"
"설마. 얘는 그냥..잠깐, 너 몇 살이지?"
"열아홉."
"아. 그래."
"..."
물어보면서 내가 이제껏 그의 나이조차 몰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맨처음봤을 때는 열 살이었구나.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에도 나는 그의 나이를 몰랐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고 보니 학교도. 어디에 사는 지도.
건조한 우리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뭔가 아주 복잡해보이네. 신창준씨."
"아하하. 그런 건 아닌데.."
말을 흐리는 나를 보며 그녀의 눈동자에 호기심 내지 불안감 같은 것이 서리는게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모른 척 했다. 그녀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고 넘어갔다. 그런 점이 아내와 꼭 닮았다.
유진은 아내의 오랜 친구였다. 대학 때 들어간 중앙동아리의 일원이었고 기수로 따지자면 후배였지만 동기 같고, 친구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녀는 오랜 시간 나를 유심히 보아왔고, 절친이라는 상냥하고 예쁜 친구를 소개시켜준 것이다. 유진의 기준에 충족할만한 남자라는 건 아주 영광일 따름이었다. 그녀에게 인정받는 건 그런 느낌이 들게 했다.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삶이 된 것 때문에 나는 그녀를 선뜻 찾아가지 못했다.
섭섭할 만도 할 텐데 그녀는 생각 외로 멀쩡해보였다. 보였다 라는 측면의 정보에 불과하지만 지금 생각건대 그녀는 이런 상황을 모두 예상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만큼 덤덤하고 뭔가를 초월한 듯 보였지만 모를 일이다.
아마 그녀는 나를,
"엊그제 윤주 왔다갔어."
"어, 어..?!"
무심코 대답하다 화들짝 놀라 물었다.
"혜경이가 항상 여기로 오는 거 알고 있잖아."
"그렇긴 한데.."
"유치원 체육대회 하다가 넘어졌나봐. 조금 붓기는 했는데 별건 아니었어."
"아..."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라니. 멍청해보였겠지. 윤주의 새하얀 얼굴에 생채기가 난 모습이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이의 피부는 투명하고 맑아서, 상처가 생기면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상처가 나서는 안 될 얼굴이 존재한다면 그건 아이의 얼굴이었다. 아플 텐데. 아이는 울때면 모름지기 어린아이가 그러듯 세상 무너질 것처럼 울어젖혔다. 딸아이의 우는소리에 속수무책인 나를 보고 아내는 제 아빠만 보면 애가 기를 쓰고 더 운다고, 은근히 얍삽한 거 보라고 했지만 애정 어린 핀잔만큼이나 나 또한 그 말을 들어도 아빠로써 받아주고 싶었다. 우는 모습은 마음이 아팠지만 다 울고 내 품에서 잠든 아이의 얼굴은 그냥 천사였다. 지쳐 잠든 아이를 안으면 묘한 무력감과 무게감이 책임이라는 그늘을 드리운다. 그게 싫지 않다면 부모가 된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앞으로도 내가 놓칠 윤주의 모습이 몇 개나 될까. 그 아이 앞에서 혜경은 무슨 말을 할까. 가슴 한 구석이 아려왔다. 그리고 아빠인 내가 듣지 못한 체육대회 소식이 나를 윤주에게서 아주 먼 사람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윤주의 목소리를 들은지 얼마나 되었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쩐지 유진을 쳐다보기가 두려워졌다. 나는 발끝만 바라보며 바보처럼 그랬구나, 그래 맞아. 라는 둥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시간을 끌었다. 그때였다.
"저기요."
"응?"
한쪽 구석에 멍하니 상황만 바라보던 치호가 말했다. 마치 구원의 손길인 듯 내가 쳐다보았지만 그는 날 보고 있지 않았다. 살짝 비켜간 시선은 유진을 향해있었고 그녀가 나? 라고 되묻자 고개를 주옥거렸다.
저기요 라니. 그런 식으로 불린 게 유진이었다는 사실을 그녀도 인지하기 조금 어려웠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목소리에는 조심스럽다기보단 건방지고 낮은 울림이 있었다.
"신창준씨를 원망한다면 그렇게 하세요."
"뭐, 라고..? 얘 너 지금 무슨,"
"그리고 아이랑은 상관없어요."
"..."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뭔가 아주 실례된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나는 일단 그가 하는 말뜻을 헤아리기 위해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하지만 먼저 반응한 건 그녀였다. 무례한 말투에도 어린애를 대하는 어른 특유의 난감함이 섞인 미소로 일관하던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불안한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나는 그가 한 말이 모두 진실임을 깨닫는다. 그랬구나.
그녀는 나를 원망한다.
역시 여긴 오지 말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