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너..!!"
유진은 흥분으로 말까지 더듬으며 여과 없이 그를 향해 감정을 표출했다. 삽시간에 유진의 얼굴이 벌게졌다. 오랜 인연이었지만 그녀에게 이런 얼굴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언제나 조금은 세상을 달관한 듯 시크한 구석이 있던 그녀였기에. 덩달아 나도 충격 받았다.
"잠깐,"
뭔가 사단이 나도 큰 사단이 나겠구나. 위험을 감지한 내가 그녀를 말리려 팔을 붙들었다. 유진이 흠칫하더니 나를 돌아봤다. 그 얼굴에서는 아직 분노가 사라지지 않은 채였고 순수한 분노가 곧바로 내게로 향했기 때문에 그 순간 나는 오롯이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유진은 나를 처음 본 듯한 얼굴이 되었다.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그제야 인지한 것처럼 놀라움을 가득 담고 있었다. 나를 두려워하는 인간은 보자마자 알 수 있는 거구나. 나는 그 사실에 절감했다.
왜? 왜 무서워 하는 거야?
나는 물어보지 못했다.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내가 잡은 그녀의 팔에서 규칙적인 숨소리를 가진 사람의 박동을 느꼈다. 유진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얼굴이 풀어지고, 어설프게 굳어있는 입이 씰룩였다. 내가 알던 유진이다. 아니, 내가 알던 유진인가?
어쨌든 상황은 그렇게 종료되었다. 힘이 빠진 건지 이성을 되찾은 건지 모를 그녀가 상황의 변화를 도중에 포기했다. 반면 상대방을 뒤집어놓은 그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머릿속이 웅웅거렸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도, 그녀도.
간단한 계산치레를 끝내고 병원 밖을 나가는 길목에서 유진이 따라 나왔다. 나와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그가 먼저 가있겠다며 계단을 내려갔다. 통통통. 대리석의 말끔하고 싸한 소리가 멀어졌다. 잠시 후 나와 유진이 멀뚱하게 서있는 계단 복도에 정적이 찾아왔다.
먼저 입을 연건 그녀였다. 시간은 이미 1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지쳤고 피곤했고, 왠지 모를 포기감이 몸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미안해."
뭐가?
나는 입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녀가 '미안'하다고 얘기하는 것이 방금 전 불같이 화낸 행동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모른 척 하고 싶었다. 응어리진 마음 속 덩어리는 말로써 설명하기 어려웠고 별로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은 유진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차마 내게 말하지 못하는 그 모든 것은, 언제나 그녀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나는 매번 내 생각이 과하다며 모른 척 했을 뿐이다.
"내가 너무 유치한거.. 나도 아는데. 차마 그걸 원망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지도 못하겠더라. 내가 너무 허접하고 한심해서. 초라하고 찌질해서."
"..."
"근데 그걸 쟤가 콕 집어내잖아. 남의 눈에도 그런 게 훤히 보이는구나 싶었어. 아차 싶었고. 너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에 머리가 새하얘지더라. 너무...창피했어."
아이를 가지지 않는 삶에 대해 나는 알지 못한다. 아이를 원하는데 없는 삶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가 나를 보며 느낀 감정의 이름이 무엇이든, 나는 섣불리 위로할 수 없었다. 별거 아니라 넘길 수도 없었다. 결국 어중간한 상태에서 나는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바랐다. 시간이 약이라고, 그렇게 치유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독한 오만이었다. 이기심이었다. 내 앞에 선 그녀는 눈을 발갛게 물들이며 말하고 있었다. 얼마나 말하기 힘들었을까. 얼마나 괴로웠을까.
"괜찮아."
유진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괜찮고 너도 괜찮아."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침묵을 받았고 그것이 지나가길 묵묵히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는 동안 유진의 눈이 평정심을 찾아갔다. 그녀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어느덧 나른한 표정을 지닌 그녀가 내 앞에 있었다. 항상 보아왔던, 은근히 멋있다고 느꼈던 평소의 얼굴이었다.
애석하게도 역시 이것만은 거짓이 아니라고 직감했다. 그녀가 내게 어떠한 감정을 품고 있었던 간에 지금껏 그녀가 내게 보여준 모든 것에 거짓이 있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 애 조심해."
그녀는 한글자한글자 힘을담아 내게 전했다. 말 그대로 '전했다'라는 말이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나에게 전했다는 것. 들으라고 한 소리가 아니라는 것. 내 마음 속에 깊이 새기고 잊지 말라는, 경고 같은 것.
경고해도 넌 듣지 않을 거 같아서.
뭐라 대답하기 어려워서 나는 난감하게 웃었다. 내 반응에 한숨을 쉬는 모습이 아내와 꼭 닮아있었다.
"가볼게."
"그래."
등을 돌려 계단을 내려오자 출입문 옆에 서있는 그가 보였다.
계단 위쪽과 출입문 옆은 거리가 꽤 벌어져있고, 나직이 얘기한 유진과 나의 대화가 들릴리 없는데도 나는 그가 모든 것을 듣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설령 들었을지언정 저렇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할 거라는 것도.
유진과 내 사이까지 치호가 파악해왔을 거란 생각은 아무리 해봐도 이상했다. 당사자조차 미묘하게 얼버무린 관계의 틀어짐이 조사로 나올 리 없었다. 그렇게 공을 들일 정도로 나를 파악하는 것도 이상했다. 물어보려는 찰나 그가 말을 꺼냈고 나는 내 의구심을 치호가 말끔하게 채갔다고 느꼈다.
"모르는 사람이야."
"뭐?"
"아까 그 여자 분. 나를 간첩마냥 보길래."
그는 거즈로 손을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처음 병원에 들어갈 때 그 사람은 당신이 오랜만에 찾아왔다는 식으로 말했지. 그리고 당신은 껄끄러워했고.
그리고 나를 치료하는 내내 그 사람은 당신을 주시했어. 안 본 사이 변한 게 있는지. 그건 변화를 감지하는 눈이야."
"..."
"그리고 '윤주'라는 말. 처음에는 윤주라는 사람이 당신이 잘아는 사람인 줄 알았지만, 보아하니 그 뒤에 나온 혜경이란 사람이 어른이야. 어른과 아이가 병원에 온다면 한명은 보호자 일테고, 다른 하나는 아이지. 그런데 왜 아이의 이름을 먼저 말할까?
유치원 정도의 아이가 부모와 함께 왔다. 아이의 이름만 안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은 혜경이란 이름을 편히 불렀지. 그렇다면 아는 사이라는 얘기가 되는데 보통 그렇게 말하는 경우는 드물고. 그걸로 당신은 '혜경'과 '윤주'를 둘 다 안다는 결과가 돼.
굳이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한건, 당신의 그 당황스런 반응을 예상할 수 있을만한 위치에 있다는게 되고. 일부러 말했으면 왜일까. 당신에게 매우 호의적인 그 사람이."
치호는 휑한 도로를 바라보며 마치 대본에 쓰인 글을 줄줄 읽어내는 것처럼 말하다 나를 잠시 쳐다보았다.
그 뒤의 말은 이미 내가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리고..그냥 짐작했을 뿐이야. 그 사람은 당신을 원망한다. 그건 아이와 관련되어있다. 그리고 그게 그녀의 중심이다."
"중심?"
말이 떨렸다. 그때까지 듣고만 있던 내가 되물은 건 그가 선택한 단어가 생경했기 때문이다.
"'중심'이란건 내가 지어낸 말이야. 적어도 소름끼친다거나 열받는다 거나 라는 말을 내 나름대로 포장한 거지만. 그냥, 알게 되더라구. 몇 가지 포인트만 있으면 대충 짐작해서 말한 게 꼭 관통한다더군."
관통이란 말은 사격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방금전까지 보이던 유진의 모습이 겹쳐졌다. 서늘했다. 그녀를 통과한 말이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관통한 상황을.
"나도 들은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치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 순간 그는 전혀 고등학생처럼 보이지 않았다.
뭐라 해야 될지 몰라 나는 잠시 서있었다. 흠. 입을 다문채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고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그거 혹시..네 얼굴이 엉망이 된 거랑 관계있어?"
"비슷해. 별 일 아냐."
관통. 관통. 나는 치호가 커다란 활을 들고 있다면, 각각의 사람들의 과녁에 그 활을 팡팡 날려 관통한다면.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별 일 아니라는 말은 대부분 별 일 일때가 많다. 나랑 닮지도 비슷하지도 않은 치호를 볼 때마다 나를 대입시키게 된다. 그래서 그 녀석을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내가 뭘 하면 되는데?"
가볍게 묻고자 했다. 하지만 고개를 홱 돌려 날 쳐다보는 치호의 눈빛은 끝없이 깊고 한 가지 정확한 의사를 표명하고 있었다.
내가 일말의 감정일지언정 그를 동정했다고, 그는 단번에 알았다.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미 눈빛은 이미 정의를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 말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나를 동정해도 그렇게 말한다면야 괜찮다고 역설적으로 얘기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처음 만남과는 다른 강한 눈엔 열망이 담겨 있었다. 자기만족의 싸구려 복수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크게 뜨인 눈 중 한쪽은 거즈로 가려져 있었다. 눈가가 멍들었으니 아팠을 텐데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단지 정말이냐고, 한 번만 물어도 될 법한 말을 두 번이나 내게 물었을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어려운 거 아니야."
그가 말했다. 어쩐지 다단계 설득하는 멘트 같았다.
"계획서 자료. 결재선에 걸려 있는 사람 다. 차후 진행. 그리고 그쪽 담당자든 누구든 만난다면,"
치호의 등 뒤로 지나가는 차의 노란 헤드등이 내 눈을 찔렀다.
"녹음 좀 해줘."
내 얼굴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