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해야 할 일은 비교적 또렷하게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막상 하겠다고 하니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요컨대 자료 전달이랑 녹음만 하면 되는 거잖아? 별 대단한 걸 하는 게 아니었다. 그 정도만 하고 나는 발을 빼면 되는 거니까. 잠시 머뭇거리긴 했다. 치호가 녹음기를 준다고 했을 때 나는 자동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있어."
의외라는 표정. 필요할 일이 있었나? 그는 작게 혼잣말로 중얼거렸지만 나는 흘려들을 수 없었다. 그 말에서 내가 서랍에 봉해두고 어느덧 존재를 잊은 녹음기를 떠올렸고, 그게 떠오르기도 전에 이미 대답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3년 전 마케팅을 진행하던 업체직원이 말 그대로 밥 먹듯이 말을 바꾸었다. 어제 이야기하던 내용을 내일이면 다시 다른 말로. 대체 무슨 얘기를 하시냐고 되물으면 되려 이쪽을 이상한 취급했다. 분통이 터져 제일 음질이 깔끔하게 잡힌다는 녹음기를 구입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내 스스로가 좀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녹음기를 재생시켰을 때의 그 경악스러운 표정만 기억에 남았다.
나는 괜히 큼큼거리며 질문했다.
"그런데 녹음은 해서 어디다 쓰게? 어차피 회의 같은건 다 회의록으로 남길 테고 중요한 기밀 이야기 같은 건 하지 않을 텐데."
"생생함?"
치호가 무심하게 말을 던졌다.
"소리가 글보다 생생하잖아. 딱딱한 보고서에 없는 분위기와 기타 비언어적 정보가 많이 들어있지."
정확히 이해한 건 아니었으나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인테리어 상황을 파악하러 현장에 가보기로 했다. 그때 녹음하면 되는 거지? 치호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는 다 넘겼고..녹음까지만 하고 내 할 일은 끝나는 거다?"
나는 그가 잊었을까봐 한 번 더 말했다. 그는 내 말에 나를 뚫어져다 쳐다보았다. 치호의 과녁판이 이번엔 내게 향한 것 같았다. 한마디 하는 줄 알았으나 그는 잠시 후 알겠다고만 했다. 한숨도 쉬지 않았고 아쉬운 기색도 없었다.
현장에 가기로 한 날은 오후부터 비가 내렸다. 먹구름 진 하늘에서 주룩 주룩. 후드득 후드득. 산뜻하다기보다는 오물을 씻어 내리려는 듯 새카만 하늘은 하늘 아래 그늘을 드리웠다.
오늘 나가도 되려나? 범상치 않은 빗줄기를 바라보면 내가 말했을 때, 나와 동행하기로 한 강대리가 이렇게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건 차라리 금방 그친다는, 늦은 밤까지 내린다는 기상청의 의견과는 정반대의 의견을 피력했다.
"원래 기상청 말은 믿을게 못됩니다."
"현철씨 같은 사람이 날씨확인은 더 잘하는 편이더라구요, 경험상."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습니다. 과장님."
그 순간 검지를 치켜세우고 나를 향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던 그의 얼굴에 강한 빛의 여파로 짙은 그늘이 졌다. 번쩍.
그리고 몇 초 뒤 들리는 엄청난 천둥소리. 특정 대상을 향해 내는 소리는 아니겠지만, 하늘에서 울리는 그 소리는 마치 목표점을 두고 호통을 치는 것 같았다.
"아하하..그럼 후딱 갔다 오도록 합시다."
멋쩍은지 강대리가 손가락을 슬그머니 구부리고 운전대를 잡았다. 강대리는 끊임없이 떠들었다. 이런 날은 안전운전이 제일이죠. 아, 저기 도넛 드셔보셨어요? 여자친구가 저거 아닌 도넛은 도넛도 아니라고.. 그러고 보니 과장님은 자녀분이..? 하나. 아..아드님? 아니 따님. 아 그러시구나. 몇 살..? 다섯 살. 그거 참 귀엽겠네요.
최소한의 대답만을 하며 나는 무심히 제 할일을 다하고 있는 와이퍼 너머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20분 남짓의 멀지 않은 길임에도 불구하고 쏟아지는 비 때문인지 훨씬 더 걸려서 도착했다. 너무 한 자세로 앉아있던 터라 몸이 찌뿌둥했다.
"으왓, 으스스 하네요 뭔가."
강대리의 말에 나도 적극 공감했다. 그때까지도 비가 내리고 있었고 하늘은 어두웠다. 개발상가 주변이라 아직 건물에 들어선 가게가 듬성듬성한 그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DM클럽 건물은 크고 웅장했다. 하지만 사람이 왕래 하지 않은 건물 특유의 허함이랄까. 아직 오픈 준비 중이니 당연한 말이겠지만 김도명의 가게라는 데서 오는 거부감도 은근히 내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