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벌컥 열리고 최훈이 들어왔을 때, 나는 놀랐지만 꽤 놀라지 않고 되려 뚱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벌컥벌컥 문을 젖히고 들어오곤 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도, 기척도 느끼지 못했지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났다. 처음엔 나도 수진도 소리를 내지르며 깜짝깜짝 놀랐지만, 이런 것도 익숙해진다. 알수록 기묘한 남자였다.
"과장님은 왜 이렇게 기척 없이 다니세요?"
"이 녀석 말투 봐라~"
말과는 다르게 그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내가 마주 웃어주지 않더라도 본인은 전혀 상관없다는 투였다. 처음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최훈은 추측이 잘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천재와 바보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에 예시를 든다면 그가 아주 적합하지 않을까, 나는 생각했다.
최훈은 일단 발상 자체가 기발했다. 다들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문제에 짱돌 하나를 가볍게 던지면 모든 이가 기함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곤 했다. 아무도 생각지 못할법한 것을 그는 너무도 쉽게 뒤집고, 옆으로 앞으로 뒤로라고 할 정도로 독특한 방식으로 접근해왔다. 가히 충격적이다 싶었지만 인정해야 할만한 대범함과 사고방식이었다. 얼핏 천재성이 돋보이는 그가 그다지 유망한 인재로 급부상하지 못하는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첫 만남의 사무실 풍경이 보여주듯 그는 한마디로 괴짜였다. 항상 흘러내릴 듯 아슬아슬한 뿔테안경을 코끝에 걸친 그는- 가끔씩 그 안경을 똑바로 고쳐주고 싶은 강한 충동에 휩싸이고는 했다- 대화의 맥락과 상황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해대고는 했다. 관심사나 흥미의 폭도 다양하고, 또 변덕도 심해서 무엇이든 금방 몰두하고 어느 순간 가차 없이 잊어버렸다.
그와 이야기하다 보면 알든 모르든 상관없을 잡지식으로 뇌내 용량을 채워가는 느낌이 들었다. 별 반응 없이 듣고만 있다 넘기는 내용도 가끔씩 떠오르곤 했다. 내겐 하등 도움되지 않는 무수한 이야기들. 업무 얘기, 약품 얘기, 화학 얘기. 나는 기왕이면 그런 얘기만 추려내고 싶었다. 최훈의 천재성은 인정할만했기에, 딱 배울 것만 듣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최훈은 그런 나를 보며 '시원찮고 심심한 녀석'이라는 칭호를 내려주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그래서 그가 불편했다. 인정할만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만 합이 맞는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웠다.
당시의 나는 세상만사 자체가 커다란 시스템에 둘러싸여있다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쪽이었다. 개개인의 특성뿐 아니라 가장 큰 그림에서 서서히 좁혀오는 세부사항까지. 작은 부분에서 큰 부분으로 확장된다기보다는 큰 부분에서 작은 부분으로 좁혀오는 게 이치에 더 맞다고 보았다. 얼핏 규칙 없어 보이는 것들도 그 '규칙 없음'이 규칙이 되기도 했다. 패턴이라고 해야 하나? 기본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명쾌하지 않는 흐름이나 꽉 막혀 보이지 않는 것들이 특히나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런 내 눈에 완벽한 일선에서 구겨진 모서리 같은 최훈이 거슬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저런 사람이 구조와 반응이 확실한, 그래서 내가 좋아했던 화학 전공자라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나를 썩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건방지다싶게 툴툴거리거나 반대의견을 피력해도 기분나빠하는 기색이 없었다. 최훈은 수평적인 입장에 서 있는 인간이었다. 누가 봐도 그랬다. 너무 어렵지도 쉽지도 않았으며 그 또한 누군가를 너무 어려워하거나 쉽게 대하지도 않았다. 의견이 충돌하는 상황을 싫어하기는 커녕 즐거워했다.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눈을 빛내며 재밌어하는 표정은 보통 사람들에게서 보기 힘든 이례적인 것이었다. 과장님은 참 대단한 거 같아요. 수진의 말에, 그를 기꺼워하는 나를 제쳐두고서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뿔테 안경의 최훈은 그런 사람이었다.
어느 날 오랜만에 본부 '제록부' 사무실로 들어가니 사무실에 직원은 없고 어떤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이질적이었다. 텅빈 사무실에 처음 온 사람이 으레 그러하듯 어색하거나 본인이 낯선 손님이라 자각하는데서 오는 태도가 없었다. 내가 들어섰을 때 자연스레 얼굴엔 당신 누구..? 라는 정도의 물음표가 머리 위로 떠올랐지만 남자는 도리어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를 훑었다.
"안녕하세요?"
그가 말했다.
"누구세요?"
젊은 남자는 반듯한 양복을 차려입고 완벽한 정자세로 허리를 곧이 편채 얼굴만 나를 향해 있었다. 내 말에 어깨를 조금 돌렸지만 완전히 돌아서진 않았다. 어쩐지 무시당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는 나보다 몇 살 더 어린 것 같았다. 옷차림만 편했어도 대학생처럼 보일 법 했는데 태도와 표정 같은 게 잠시 봤음에도 불구 능글맞은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생각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몰랐다. 차갑다는 수식어가 어울릴 법한 외견이었다. 따스한 기운은 찾아볼 수 없었고 날카로운 턱선과 시원하게 파인 눈동자가 예리했다.
그는 한 손에 서류철 하나를 들고 있었는데, 내 물음에 잠시 그걸 훑터보더니 소리가 나게 탁 닫았다. 그가 말했다.
"재밌는 제안서를 하나 읽었는데요.."
남자가 몸을 크게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서류철에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을 부드럽게 놀렸다.
"당신은 아닌가보네요. 나중에 다시 오죠."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고 남자는 단언하며 말했다. 누구냐는 내 질문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산뜻하게 웃고, 내 어깨에 손을 잠시 올렸다 사무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나는 치욕 당했다고 느꼈다. 뭐지?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뭐야 저 놈은? 내 얼굴에 삽시간에 열이 올랐다. 뒤늦게 사무실 문을 열고 뛰쳐나갔지만 이미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가 누구인지 알아낼 길이 없었다. 수진과 최훈에게도 인상착의를 들어가며 설명했지만 알지 못했다.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이틀간은 열이 뻗쳤지만 이내 그것도 잊었다. 며칠 뒤 최훈은 나와 수진을 모아두고 말했다.
"오늘부터 우리에게 새 일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