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훈은 뭔가의 원혼만 살아나 육체를 잠식하고 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적어도 내 눈에 그는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않은 듯한, 어설프게 생의 끈을 쥐고 있는 물질이 어느 정도 구체화 된 모습처럼 보였다. 그에 대한 내 감정이 다분히 여과되어서 그런 거라고 짐작 했으나 사람 같지 않다는 느낌을 떨치기 힘들었다.
한때는 이 남자의 행방을 생각했다. 살아있으니 나이를 먹겠지. 뭉글뭉글한 웃음을 지으며, 세상에 무해한 얼굴로 나와 수진을 타락으로 이끈 남자.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지만 아마 변했을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은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눈앞의 이는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그 희멀건 감각을 지니고 있던 남자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너도 껍데기만 온 거니? 그런 질문은 꺼내지 않았지만 목 끝까지 차올랐다.
나를 바라보는 최훈은 안경은 쓰고 있지 않았다. 뿔테 안경의 최훈이 아니란 것만으로도 낯설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명함을 건네받아 읽었을 때는 상황상 아니라고는 알고 있어도 솔직히 어이없어 웃을 뻔했다. 어디서 이딴 이름을? 하지만 차마 묻지 못했다. 공기는 엄숙했고 나도 나름대로 긴장했으며 최훈은 잠시 건물 안을 훑터 보았을 뿐이었다.
"반갑습니다."
그는 먼저 한 악수보다 늦은 인사를 건네며 손을 놓았다. 나는 당황하고 화가 났지만 어쩐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는 최훈 앞에서 작아졌다. 나는 그 앞에서 당당할 수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평생 그럴 것이다. 그런 확신이 나를 잠식할수록 점점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어서 자리를 뜨고 싶었다.
최훈은 나를 알아본 것이 분명했다. 그의 입술에 얇게 비릿한 미소가 감도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내가 명함을 건네자 받아들고는 한참을 응시했다. 옆에 있던 직원이 뭐 이상한점이라도? 라고 물었을 때가 되어서야 아닐세, 하며 명함을 넣었다. 주머니에 들어가는 찰나 내 이름이 적힌 종이가 볼품없이 구겨지는 걸 내가 모를 리 없었다.
"인테리어가 어떤가요?" 최훈이 물었다.
"..괜찮네요." 내가 말했다.
"괜찮은 정도인가?" 그의 중절모가 살짝 옆으로 기울어졌다.
"네." 내 머릿속에서 땀이 길을 내고 흘렀다. 불쾌했다.
그는 내 말에 별로 만족하는 투도, 기분나빠하는 투도 아닌 채로 어정쩡하게 있다가 말했다.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죠. 오늘은 날이 짓궂네요."
최훈은 직원을 데리고 나갔다. 나와 강대리도 나갔다. 그들은 짧게 목례하고 자리를 떴다. 빗줄기는 아직도 세차게 존재를 어필하는 중이었다. 넋이 나간 내가 가만히 허공을 응시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강대리가 조심스레 나를 건들고, 복귀하자고 했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 올라탔다.
사무실에서 짐을 챙겨 퇴근을 하고 집에 도착해 겉옷을 벗고 나서야 나는 녹음기가 아직 켜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꾸욱. 길게 한번 누르자 빨간 빛이 점멸하며 녹음을 마치고 기계는 잠들었다.
나도 이렇게 스위치를 끄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부장한테 불려갔다. 거기서 내가 들은 말을 정확히 기억할 수 없다. 결론은 하나였다. 회사를 나가라는 것. 단순하기 그지없는 말을 빙빙 돌려 이유와 항목을 달았다. 그건 사슬처럼 엮어서 내 목에 감겼다. 최훈은 돌아서서 자신의 회사로 가자마자 계약을 파기했다. 이유를 물었을 때 담당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고, 담당자를 바꾼다고 해도 한사코 거부했다. 계약파기 비용을 고스란히 받아든채 회사는 뒷걸음질 쳐서 DM을 빠져나왔다. 최훈이 마지막으로 한 한마디가 오늘을 좌우했다고 전해들었을 뿐이다.
"그 담당자 자르시죠. 업계에 소문나기 싫으면."
나는 그 말을 하는 최훈을 상상할 수 없었다. 얼굴 표정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최훈은 그런 말을 했다. 그리고 나는 사직서를 내라는 말에 아무런 항변도 못하고 조용히 자리로 나와 봉투를 꺼냈다. 글씨를 쓰고 사직서를 내미니 부장은 커흠커흠 헛기침을 하며 이만 퇴근해도 좋다고 했다. 나는 꿈꾸는 듯한 몽롱한 감각으로 간단히 짐을 챙겼다. 옆에서 내 팔을 붙들고, 이내는 흔들며 과장니임 이라고 늘어지는 말로 외치는 강대리에게 잠깐 웃어주었던가? 모르겠다.
박스를 들고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려다 계단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며 나는 오래전 내가 느낀 감정의 연장선에 서 있음을 알았다. 그때부터 사실 여기까지 오게 될 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아니라면 난 아직 그곳에 있는 그 상태인건 아닐까.
바깥은 바람이 후드덕후드덕 불고 있었다. 머리칼이 날렸지만 손이 자유롭지 않아 시야가 가려지고 불편했다. 그 순간 상자를 저 멀리로 던져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노조도 없고 복지도 변변찮은 회사였지만 이런 식으로 퇴출당할 줄은 몰랐다. 어느 날엔가 내 발로 나가거나 아니면 적당한 시기를 짐작하고 나가거나. 나는 그 뒤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 그런 때에 내가 사회 밖으로 나갈 줄 알았다. 이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상자 하나만 들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도 모르는 상태로 걸어 나올 줄은 몰랐다.
마땅히 집으로 가야했지만 나는 상자를 자동차 뒷자석에 두고, 운전석에 앉아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 내 앞으로 다른 어떤 차가 있었고 내 뒤로도 내 차가 아닌 다른 차가 있었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이 회사의 직원이고 아직 사무실에 있을 터였다. 나만이 회사 밖으로 나와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앉아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채로 정지해있었다. 어디로. 대체 어디로.
그때 머릿속에 스치는 곳이 하나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원두향이 코끝을 스칠듯 하다 사라졌다. 환상 같은 향기가 떠오른 순간 나는 시동을 걸고 그곳으로 향했다. 지독한 갈증이 목구멍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