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 며칠 동안 그곳에 갔는지 모르겠다. 카페 아르테미스-그 카페의 이름을 그때서야 나는 외웠다-로 거의 매일같이 출근하듯 나가서 낮이 지나고 해가 지도록 커피 한잔을 시킨 채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창문을 바라보다 시야가 흐려지고 졸음이 쏟아지면 그대로 팔을 괴고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때쯤 다시 잠이 깨면 화장실에 잠깐 가 세수를 하고 나왔다. 대머리 주인장은 내가 자리를 비우면 새로 커피를 내왔다. 아니에요. 나는 말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소만 짓고서 내 앞에 잔을 두고 다시 카운터로 돌아갔다. 몇 번을 그러고 나니 그러려니 했다. 더 이상 나는 말하지 않았고 그는 커피를 내왔다. 고소한 원두향을 들이마시며 나는 다시 창밖을 질리고 질릴 때까지 쳐다보았다. 내가 가만히 바라보는 그 세상이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하지만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았고 해가 졌다. 해가 지고 나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찻값을 계산하고 나왔다. 차 한 잔 값으로 카페에서 제일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아 차 두 잔을 마시며-그것도 한 잔 가격으로- 하루 종일 있다가 집에 가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고, 아무렇지 않기도 했다. 집에 가서는 최소한의 생활적인 일을 하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엔 다시 카페에 갔다.
내가 밥을 먹었던가? 멀쩡히 살아있으니 밥을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주인장과 나란히 앉아 밥을 먹은 장면을 떠올렸다. 그와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나는 밥을 먹었지만 맛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건 기억뿐이었지만 아마 나는 밥을 먹었을 것이다.
나는 오래도록 나의 과거에 대해 생각했다. 그때 내가 두고 온게 무엇이었는지 생각했다. 수진을 많이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를 떠올리지는 않았다. 수진을 생각하면, 내 나이가 된 내 또래의 이수진이라는 여성이 떠올랐다. 누군가와 결혼을 했을, 혹은 아이와 함께 걸어오는 그녀. 웃을 때 눈가에 주름이 지기 시작한, 수수한 얼굴로 이제 아줌마 다됐지? 라며 수줍게 웃는 그녀.
나는 그런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나 뿐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그랬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생각했다. 생을 이어온 그녀가 어떻게든 이 세상 속에 남아 살아가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내가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다는 황당한 표현을 진흙처럼 얇게 펼쳐놓고, 그녀를 오래도록 지켜보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수진이 없는 세상이 이미 존재하고, 그 세상이 그로부터 9년이나 흘렀다는 사실은 내겐 너무 가혹했다. 최훈은, 그녀를 생각할까? 나보다도 그녀를 더 생각해야할 건 그였다. 그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잠들 때까지 그녀를 생각해야했다. 물리적인 그녀가 없다면 정신적인 그녀를 불러내 이 세상에 남아있게 해야 할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건 최훈이었다. 최훈이 아니라면 내가 해야 했다. 나는 정말이지 나쁜 놈이었다. 누군가 나를 욕해주면 좋겠다고, 나는 속으로 나를 욕했다.
그리고 다시 기억이 색을 입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건 내 앞에 누군가가 나타나서였다.
"뭐해?"
평이한 말투로 치호는 내게 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반면 나는 수염이 드문드문 나고 있었고 머리도 제대로 빗지 않아 푸석푸석했다. 뻑뻑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는데, 치호의 눈에 비친 내가 보이 는듯 했다. 다크써클이 한아름 내려온 초췌한 얼굴. 굳은 입매에 둥그스름한 뭔가를 올려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비웃지도 그냥 웃지도 찡그리지도 화를 내지도 못했다. 내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져있단 걸 그제야 알았다. 치호는 놀란 얼굴이 아니고 그냥 평소 같은 얼굴로 내 앞에 앉아있었다. 대머리 주인장이 커피를 내왔고 그는 감사하다고 말했다. 대머리 주인장의 따스한 눈길이 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아 지금까지 그는 나를 저런 얼굴로 봤구나. 그래서 나를 뭐라고 하지 않은 것이었어. 나는 고개를 들어 그에게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으나 그 역시 역부족이었다.
"너, 웬일..?"
내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을 때 치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교복차림이었다. 바깥은 낮이었다.
"너 학교는..?"
"어떤 아저씨가 여기 널브러져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안 올수가 있어야지."
그는 갓 나온 커피를 호호 불더니 한 모금 마셨다. 맛있네. 그 말을 듣자 커피의 맛이 생각났다. 맛있지. 바로 몇 분전까지 나도 마신 커피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말을 이었다.
"녹음기 아직 안준 거 알지?"
"아.." 나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녹음기. 그런 것도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 여기에만 있을 거야?"
그가 내게 물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줄 몰랐다는 사람처럼 눈알을 빠르게 굴렸다. 뭐가 어때서. 여기 커피는 저렴하고, 시간을 보내기도 좋다. 주인장은 나를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고, 나는 그녀를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 이상 해야 될 뭔가를 알지 못하겠다.
"신윤주."
양 손가락을 꽉꽉 누르던 내 손동작이 멈췄다. 받아들일 시간을 주듯이 치호는 잠시 침묵했다.
내게 윤주가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단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 세상에 그녀가 있었다. 작은 몸뚱아리를 받아들며 느꼈던 환희를 기억했다. 손가락하나하나 발가락 하나하나에 손톱까지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며, 까만 눈동자와 코끝에 달린 콧구멍과 입술 속에 빨간 혀까지 다 있다고. 아내와 같이 얘기하며 자지러지고 행복하게 웃던 내 모습이 기억났다. 거짓이 아니고, 조작된 게 아니고 현실이었다. 떠올리자면 눈시울부터 붉여질 끔찍하게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삶이 아무리 구렁텅이로 빠져도 나는, 그걸 기억했어야 했다. 이치호가 말해주기 전에.
충분한 시간이 지난 후 치호가 말했다. 나는 들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제야 눈빛이 좀 살아났네 당신."
건방진 말투였다. 눈 밑 광대뼈 부근에 근육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내 얼굴에 표정이 돌아오고 있음을 생생히 느꼈다.
그가 제안한 걸 처음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는 반문했고 또 반문했으며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백수가 된 내가 대니스 밑으로 들어가라는 게 그의 제안사항이었다. 대니스최가 현재 최훈의 이름이었다. 치호는 그의 이전 이름을 알지 못했다. 어떻게 와 어떤 방법으로 라는 질문을 제쳐두고 나는 왜 그래야하는지 몰랐다. 그가 말했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거야?"
당한다.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최훈은 내가 생리적으로 거부하는 인간이었다. 나는 그를 피한다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당하지 않기 위해 그의 아래 직원으로, 그 옛날처럼 비슷한 관계가 된다는 건 당하지 않는 게 아닌 당하러 가는 일이었다. 선뜻 이해되지 않는게 당연했다.
하지만 한 편으로, 당하고만 있을거 냐는 그의 말은 내 마음에 작은 파동을 일으켰다. 그의 말투가 워낙 분개하지 않은데다 당할 거면 말고, 라는 뉘앙스까지 포함하고 있는 탓도 있었지만 나는 항상 당하고 도망갔다. 내가 잘못한 일이 많았고 최훈은 나를 질책하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숙였고, 하지만 최훈은 그걸로는 부족하다며 내 직장을 없애버렸다. 정말 내가 당하기만 해야 하는 인간인가? 아르테미스에 있던 시간동안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치호가 물었을 때, 지금껏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크게 와 닿는 게 있었다.
나도 최훈에게 당당히 맞서고 싶었다는 것.
그녀는 없다. 그녀는 없어져버렸다. 내가 더 이상 무섭고 떨어야할 이유가 역설적이게도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내가 알겠다고 말하는 동시에 치호는 DM의 채용공고를 내게 내밀었다. 어떻게와 어떤 방법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준비되어 있던 셈이었다. 최훈이 일하는 부서에 원서를 넣어보라고, 마감일은 오늘이라고 했다. 그 뒷장엔 자소서와 이력이 쓰여 있었다. 내 이름으로 되어있는 그 글들이 아주 생소하면서도 익숙했다. 결국 그건 내 이야기가 맞았으니까. 나는 그를 쳐다봤다. 너는 누구냐고 묻고 싶었으나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들어가기는 할 것이다. 최훈 밑으로 가서 다시 시작해볼 것이다.
그 전에 이치호라는 열아홉 살 소년에 대해 더 알아야겠다.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다닐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