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 서류도 통과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서류가 통과한다면 최훈은 그 서류를 보지 못한 거겠지. 그가 내 이름이 적히고, 내 얼굴이 붙은 사진의 서류를 보자마자 얼굴을 찡그리고 찢어서 버리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울 거라 생각했다. 사람은 배우기 마련이니까. 이론적으로 보자면 그게 타당한데다 충분히 가능한 일의 범주인데도 그랬다.
하지만 어떤 연유였든 나는 서류심사를 통과했으며 면접까지 갔다. 나보다 꽤나 젊어 보이는 청년들 사이에서 긴장한건 당락의 여부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안에 최훈이 있다면 어떡하지? 표정관리를 제대로 할 자신이 없었다.
내 이름이 불리고 들어갔을 때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최훈을 마주했다. 상상이 큰 힘을 가지고 있어서였던 건지 막상 보고나니 그 전보단 나았다. 중절모를 쓰지 않았고 얇은 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아마 노안용. 알이 굵은 안경너머로 나를 바라보는 눈에 오래전 나눈 친밀감이 감돌아서 나는 그게 착각이라고 여겼다. 그는 웃거나 얼굴을 찡그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면접을 보러 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게 불쾌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면접을 끝내고 나오며 받은 교통비와 작은 USB를 들고 나는 흘러내린 땀을 훔쳤다. 주차권을 받고 집근처로 가는 도중 방향을 틀어 천변으로 갔다. 양복은 몸을 가둬둔 것처럼 갑갑했다. 셔츠 단추를 두 개 푸르고서 공원 벤치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하늘엔 뭉게구름이 동동 떠다녔고 나는 이미 열 시간 넘게 자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졸음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어느덧 멍때리기가 내 특기가 된 걸지도 몰랐다.
"내가 대체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를 둘러싼 주위는 지극히 평화로웠으나 이게 평화인지 태풍의 눈 속인지는 모를 기분이었다. 더 이상 초라해질 수 없다는 건 아르테미스에서 치호를 만나고 주인장에게 그간의 감사인사를 건네고 나온 이후부터 결심한 다짐이었다.
나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고 뭐라도 성실히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뭐라도 했다.
그로부터 이주 뒤, 합격 문자를 받았다.
최훈 밑에서 일한다는 건 내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보통 어떤 사람에겐 행운일수도 있었다. 그는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었고 부하직원에 대한 허세나 깔보는 투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사실 그건 순전히 9년 전 내 기억에 의지한 거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 사이 최훈이 어떻게 변한지 낸들 알 수 있었을까.
나는 첫 출근인사 후 그를 떠보듯, 사실은 그냥 바로 앉거나 너무 저자세로 가는 게 민망하고 싫어서, 반쯤은 비아냥거리거나 어느 정도는 여유롭게 보일 수 있도록 한마디 던졌다. 스카웃을 하시려면 그냥 평범한 방식이 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최훈은 내 말에 업무노트에 있던 시선을 잠시 옮겼고 나는 그 즉시 후회했다.
내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면주려는 건지 아닌 건지. 그는 알 수 없는 얼굴로 있다가 다시 나를 보았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려 했지만 이미 얼굴에 열이 오르고 있었다. 신창준 넌 대체 무슨 배짱으로. 되도 않는 헛소리를.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수 없는 게 한이었다. 주울 수만 있다면 당장 무릎을 꿇든 바닥을 기든 주워 모으리라.
최훈이 말했다.
"그러게. 그런 방법도 있었네."
외견은 많이 바뀌었지만, 풍기는 분위기도 상당히 달라졌지만 그는 최훈이 맞았다. 그가 더욱 비겁해져있기를 바란 내 예상은 훌륭하게 빗나갔다. 나는 자리에 앉으면서도 뻔뻔해 보일 수 있도록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방금 전까지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으면서, 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온 건지는 몰랐다. 최훈은 그런 나를 보고 웃었다. 한지를 만들기위해 닥풀과 닥섬유를 섞는 작업처럼 얼굴이 풀어지는 것 같은 웃는 모습이었다. 능글맞은 놈. 결국 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트를 찾은 건 우연이었지만 아마 그러한 의도로 몇번만 클릭하면 찾을 수 있는 흔한 사이트였다.
6년전 게시글로는 국내 포털 카페에서 자사 사이트로 새로 이전한 모양이었다. 디자인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꾸며보려는 시도가 언제 적인지 가늠되지 않게 촌스럽고 어색했다. 차라리 단색으로 통일하면 나을지도.
내가 본 그 사이트의 첫인상은 그랬다. 한 단어로 집약하자면 허접. 도저히 신뢰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그 사이트에 가입한 이유는 뭘까? 아마도 그 사이트를 제외하자면 내가 얻을 정보가 너무 한정적이라서. 아마 거의 없어서.
회원 537명에 운영진 2명. 게시글은 이천 개 정도였지만 최근 작성일을 기준으로 볼 때 마지막 게시글이 2년 전이었다. 우후죽순 쏟아지는 정보의 시대에 이정도면, 버려진 유령 사이트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세상엔 그런 사이트의 주소가 몇 개나 될까. 나는 '가입인사말에 쓰고 싶은 말(50자 이내)' 라는 항목을 보면서 생각했다. 버려지고 더 이상 아무도 보지 않는 인터넷 상의 공간. 유유히 떠다니는 그곳을 육지로 따지자면 무인도쯤 되려나?
이 사이트의 대다수 사람들은 내가 쓴 글을 모르겠지. 이런 사이트에 가입했다는 사실을 잊었을지도 모른다. 근데 잊을 수도 있을까? 운영진은? 가입이 될 건지 큰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도 정회원이 되지 않으면 공지사항 빼고 게시글은 하나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기대없이 확인버튼을 눌렀다.
사이트의 이름은 도진요. 일명 '도명제약의 진실을 요구한다' 소싯적 유행하던 문장이 어미부터 말미까지 빼곡히 들어차 있는 이름이었다. 이런 것도 시간이 흐르니 유치하고 촌스러웠다. 사람들의 절박함. 그리고 그 절박함과 경고를 제대로 담은 한 문장이 이렇게 변질될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씁쓸해졌다.
정회원이 된 건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서였다. 축하드립니다. 형식적인 문구를 보며 축하받을 일인지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찌 되었든 나는 정회원이 되었고, 묵은 글들을 읽을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초기 글들은 감정이 빼곡히 담겨있었다. 사람들의 분개함이 절제나 정제없이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몇몇 자극적인 제목의 글들은 클릭했을 때, 운영자의 권한으로 삭제 및 비공개라는 안내를 몇 번이고 발견했다.
몇 년이 지나자 게시글 수는 상대적으로 내리막길을 달리는 게 내 눈에도 여실히 보였다. 하루에도 몇 건씩 올라오던 글들은 몇일에 한 건, 몇 주에 한 건씩으로 줄어들더니 마지막 게시글이 올라온 이 년 전에는 그 달을 합해 6개월간 올라온 글이 그게 전부였다.
나는 여러 글을 곰곰이 읽거나 건너뛰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한 유저를 발견했다. 유저이름 '날다람쥐1호'. 그가 쓴 글을 보는 내내 한 가지 선명한 이미지를 지우기 힘들었다. 내가 찾던 정보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고, 수수께끼는 나름 쉽게 풀린 셈이었다.
나는 그가 이치호라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