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는,
겨울날의 추위가 썩힌 나뭇잎이
거름이 되어 새싹을 길러낸다.
여름 내내 푸르렀을 그 나뭇잎들도
결국에는
새하얀 눈에 덮여
싱그러움을 잊었건만...
한참 시를 써 나가던 손이 갑자기 종이 위로 주욱 미끄러졌다. 덕분에 손에 쥐고 있던 숯이 글자들을 가로질러 줄을 그어버리고 말았다.
“시노, 내가 시를 쓸 때에는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은발의 여자는 자신의 뒤를 홱 돌아보며 눈을 번뜩였다. 당장에라도 때릴 것만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툭 건든 사내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뻔뻔함과 장난기가 섞인 표정을 지어보였다.
“밀러, 네가 아무리 고상한 척 해도 우리는 결국 사냥꾼일 뿐이야. 칼질만 잘 하면 됐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글까지 쓴단 말이야?”
시노는 두 손을 어깨 위로 으쓱 하고 올려 보였다. 밀러는 시를 쓰던 종이를 아직 덜 꺼진 모닥불에 던져버리고 일어나서 시노의 이마에 꿀밤을 한껏 휘둘러 박았다. 꿀밤은 어른 머리만 한 돌이 서로 부딪히는 것 같은 제법 아픈 소리가 났다. 시노는 얼마나 아픈지 소리도 못 내고 이마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들었다 내렸다만 했다. 눈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눈물이 맺힌 얼굴이었다. 입이 계속해서 와-오-를 반복하며 씰룩거리는 걸 보니, 제대로 들어간 모양이다.
“어휴, 이 돌 대가리야. 넌 이런 소소한 로망이 없으니까 이날 이때껏 여자친구가 없는 거야.”
“으으! 칼이나 빨리 챙기셔! 네가 그 로망인지 노망인지에 빠져있는 동안 나는 목표를 찾아놨거든? 먹고 살 걱정을 해야지. 칼이면 모를까, 시가 널 먹여 살려주진 않을 걸!”
시노는 볼록 혹이 올라 온 자신의 이마를 만지작거리면서 손가락으로 짐들을 가리키며 밀러를 다그쳤다. 밀러는 자신이 베고 잤던 가방 옆에서 검을 챙겨 벨트에 걸쳤다. 몇 번 이리저리 당기며 잘 걸쳐졌는지 확인하고는 시노에게 한 마디 던졌다.
“얼간이. 칼이라고 하니까 촌스럽잖아. 검이라고 하란 말이야, 검! 우린 사냥꾼이지 도축업자가 아니니까. 겉보기에는 별 볼일 없을지도 모르지만 엘리트라고. 알았어?”
밀러는 자신이 사냥꾼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축에 속했다. 제법 많은 사냥꾼들이 그저 입에 풀칠하는데 돈이 필요하긴 한데, 가진 기술이 없으니 몸으로 때우려고 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하지만 시노는 그녀의 이런 태도를 두고 비싸게 군다며 조롱하곤 했다.
“아이고, 아가씨. 어련하시겠습니까요. 그러니까 이제 슬슬 움직이시죠. 목표는 북쪽입니다요!”
시노가 종자 흉내를 내며 과장되게 팔을 흔들더니 상체를 숙이며 북쪽을 가리켰고, 밀러는 그게 얄미웠던 것인지 그의 정강이를 홱 걷어 차고는 북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아이고, 나 죽네!”
시노는 연신 정강이를 쥐고 제자리에서 콩콩 뛰면서도 웃고 있었다.
그들의 발걸음은 어느 커다란 나무 근처에서 멈췄다. 그 커다란 나무는 어른 100명이 양 팔을 벌려 감싸야 겨우 다 감쌀 정도로 거대했다. 그리고 껍질이 거칠고 불규칙하게 튀어나와 있어서 마치 잔가지들이 부러진 것처럼 보였다. 거대한 나무이니 만큼 그 뿌리도 굉장한 기세로 주변을 향해 뻗치고 있었다. 그 뿌리들로부터 솟아난 나무들도 있는 것으로 보건대, 아마 이 일대의 숲은 이 나무 한 그루가 일궈 낸 것일 것이다.
시노는 그 나무의 꼭대기를 가리켰다.
“저기, 저 가지 위에 둥지 보이지? 어미는 아까 막 사냥에 나선 걸 확인했어. 아마 돌아오려면 시간 깨나 걸릴 거야.”
밀러는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말아 올렸다.
“대체 전통이 뭐라고 우리가 새 알까지 훔쳐야 되는 거야? 심지어 그라테르 폴리스의 전통도 아니고 다이달로스 폴리스의 전통인데...”
시노는 손가락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봐, 밀러. 그냥 새가 아니라구. 이 새로 말할 것 같으면 모든 몬스터를 통틀어 태양에 가장 가깝게 나는 새란 말이야. 게다가 다 크면 어마어마하게 덩치가 커서 사람도 태울 수 있지. 물론 길들인다는 가정 하에 말이야. 그라테르 폴리스에는 이 덩치를 길들이는 노하우가 없지만 다이달로스 폴리스는 가지고 있지. 물론 영주 가문의 비전이니까 그들만의 것이지만. 온통 검정색 깃털로 덮여 있으니까 금색 갑주를 입혀 놓으면 얼마나 멋진지!”
밀러는 열변을 토하는 시노의 입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누가 보면 너 다이달로스 폴리스 출신인 줄 알겠다? 그리고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다이달로스 폴리스의 일이니까 우리 그라테르 폴리스에서 굳이 신경 쓸 일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이지. 새끼를 부모에게서 빼앗아서 기른다고? 하! 몬스터니까 망정이지, 이게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거였으면 납치야. 납치, 알아?”
밀러는 기도 안 찬다는 듯이 숨을 뱉었다. 시노는 그녀의 어깨에 팔꿈치를 올리며 살짝 기대끼더니 짝다리를 짚으며 말했다.
“그건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요컨대, 이거란 말씀이야!”
시노는 손가락으로 동그랗게 말아서 동전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속물스러움이 한껏 묻어나는 표정으로 밀러를 삐딱하게 쳐다보며 미소지었다. 시노의 손 모양을 본 밀러가 그의 뒤통수를 치려고 손을 올리려고 하자, 시노는 발바닥에서 불이 나도록 나무를 향해 뛰었다.
“저런 금전만능주의자 같으니라고...”
밀러는 의욕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발걸음으로 시노의 뒤를 따라 나무를 향해 총총 뛰었다. 밀러가 나무 앞에 도착했을 때, 시노는 이미 저만치 나무 위를 오르고 있었다. 그는 양 손에 단검을 쥔 채로 거칠게 자라난 껍질의 틈새에 단검을 끼워가며 그것을 손잡이 삼아 오르고 있었다. 안전장치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위태로워보였지만, 생각보다는 안정적으로 오르고 있었다. 시노와 밀러가 목표로 하는 나뭇가지는 그나마 지면과는 가까운 편이어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시노는 금세 둥지가 매달려 있는 가지에 도착했다. 나무 만큼이나 가지도 꽤 컸지만 둥글기 때문에 가지 위를 조심조심 기어서 둥지로 향했다. 바람이 불어 그의 몸을 흔들 때면 밀러가 나무 아래에서 못 보겠다는 듯 자신의 눈을 가리며 안절부절 못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시노는 이상하리만치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시노가 가지의 갈라진 부분에 도착하자, 마치 뒤집어진 바가지처럼 생긴 둥지 안이 들여다 보였다. 둥지 안에는 검은 깃털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고, 그 안에는 알이 1개 있었다. 알은 흰색에 검은 점박이 무늬가 있었는데, 크기가 상당했다.어지간한 어른 몸통만 한 알이었다.
땅에서 둥지를 올려다보고 있던 밀러는 둥지 안쪽에서 팔이 뻗어 나와 OK사인을 만들어 보이는 것을 보고 주변에서 나뭇잎과 풀들을 주워 모았다. 그렇게 한참을 모아 둥지 아래에 푹신한 쿠션을 만들었다. 쿠션이 완성되자, 밀러는 호주머니에서 새끼손가락만한 피리를 꺼내서 불었다.
피리 소리를 듣고 시노가 둥지에서 얼굴을 한 번 내밀어 나무 아래를 확인하더니, 둥지 안의 알을 그 밖으로 힘겹게 밀어내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무거운지 등으로 밀었다가, 어깨로 밀었다가, 가슴으로 밀어 올렸다. 이윽고 알이 둥지 모서리에 걸쳐졌다. 시노는 한 번 더 아래를 확인한 다음, 알을 땅의 쿠션에 안착할 수 있게 자리를 잡고 밀었다.
쿠션에서 나뭇가지와 풀잎들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숲에 울렸다. 시노는 혹시 싶은 마음에 둥지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나무의 주변 공터와 나뭇잎의 틈새로 보이는 하늘에는 깊게 들이키면 가슴이 뻥 뚫리는 청명한 가을 바람만이 가득했다.
밀러는 쿠션에 떨어진 알을 굴려서 쿠션 밖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쿠션으로부터 거리를 둔 다음, 다시 한 번 피리를 불었다. 그러자 시노가 둥지 아래를 향해 한 번 내다보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내렸다. 그리고 쿠션에 떨어지자마자 그는 어딘가 부러진 것 마냥 비명을 질렀다.
“으악!”
그러자 밀러가 허둥지둥 뛰어와서는 놀란 토끼 눈으로 시노를 이리저리 훑어 보며 더듬거렸다.
“뭐야, 왜 그래! 어디 다쳤어?”
그 말을 듣자, 방금까지 울상을 짓고 있던 시노가 맑은 날의 해바라기 마냥 활짝 표정을 펴더니 껄껄거리며 숨이 넘어갈 듯 웃었다. 밀러는 그의 표정을 보고는 쿠션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꺼내 그의 얼굴에 던졌다.
“까물지 마.”
그녀가 뒤로 홱 돌아섰지만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것을 시노는 볼 수 있었다.
“들것, 들것을 만들자! 이 무거운 걸 혼자 들고 갈 순 없지.”
시노는 괜스레 분위기를 어설피 환기시키며 숲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시노는 굵은 나뭇가지 두 개와 긴 넝쿨 여러 개를 가져와서 이리저리 묶고 엮어서 두 사람이 함께 들 수 있을 법한 들것을 만들었다. 그는 그것을 바닥에 놓고 넝쿨로 짠 그물 위에 알을 굴려 넣었다.
“하하! 자, 이제 들고 가기만 하면 의뢰는 완료네! 빨리 끝내고 한 잔 하러 가자구!”
시노가 호쾌하게 웃으며 들것의 앞쪽을 들자, 밀러는 시노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젠 여자한테 그런 걸 들라고? 네가 그러니까 이때껏 여자친구가 없는 거야.”
밀러는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낀 채 혼자 야영지를 향해 걸어가 버렸다. 시노는 그녀를 잡을 듯이 손을 뻗었다가 이내 들것을 돌아봤다. 애꿎은 한숨만 나왔다. 그는 들것을 앞쪽에서 들고 그것을 끌며 무거운 발걸음을 힘겹게 내딛으며 그녀의 뒤를 좇아 성큼성큼 달렸다.
“같이 가!”
시노가 끙끙거리면서 얼기설기 엮은 들것 손잡이를 허리에 딱 붙이고 다섯 걸음을 채 나아가기도 전에 하늘에서 규칙적인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소리에 맞춰 주변에 있는 작은 나무의 잎사귀들이 흔들거렸다. 시노가 아는 한, 이카로스의 알을 훔칠 때 이런 규칙적인 바람은 불길한 징조를 뜻하는 것이었다.
“밀러!”
시노는 황급히 밀러를 불렀다. 하지만 다급한 그의 부름에도 그녀는 아랑곳 않고 걸어나갔다. 멀어지는 그녀와는 달리 바람소리는 점점 그에게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불안함에 가득 찬 시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매몰차게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또 속아줄 줄 알고?”
밀러는 콧바람을 씩씩거리며 앞만 보고 걸어갔다. 하지만 그 때, 그녀의 등 뒤에서 육중한 크기의 무언가가 강력한 풍압을 만들어 내며 바닥에 착지하는 것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풍압 때문에 어깨 뒤로 잘 정돈되어 있던 그녀의 머리칼이 바람과 함께 헝클어지며 어깨 앞으로 나부꼈다. 머리를 정돈할 새도 없이 황급히 뒤를 돌아봄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알을 끌던 시노와 대치중인 이카로스였다.
황급색 부리와 눈동자, 대부분의 검은 깃털에 드문드문 흰색 깃털이 섞여 미려하게 정돈된 모습 하며, 네 다리의 발 끝마다 돋아난 발톱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고귀함을 떠올리게 했다. 눈 앞의 이카로스는 덩치만 해도 코끼리만한 것이, 그 거대한 몸을 바람에 띄우는 데 쓰는 날개를 위협적으로 펄럭이며 주변의 나뭇잎과 먼지들을 죄다 날려버릴 듯이 바람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저항하기란 사람의 몸으로는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양 팔을 올려 얼굴을 강타하는 흙먼지와 나뭇가지가 섞인 바람을 막고만 있어도 풍압 때문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시노!”
밀러는 자신의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아들며 수레 손잡이는 진즉 바닥에 놓아 버린 시노에게 합류했다.
“너, 아무리 내가 양치기 소년이라지만 한 번 쯤은 믿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시노는 이 와중에도 섭섭한 소리만 늘어놓았다. 밀러는 자신의 블라우스 칼라에 달고 있던 브로치에서 천 조각을 떼어내며 말했다.
“네가 자꾸 신용을 잃을 만 한 일을 저지르니까 그렇지! 아무튼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이번 임무는 잘못했다간 뼈도 못 추릴지도 몰라. 집중해!”
밀러가 자신의 검에 천 조각을 문지르자 검신을 따라 정전기가 일며 간간히 푸른 번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시노는 그것을 힐끔 쳐다보고 자신의 검을 뽑아들며 이카로스를 노려보았다.
“아무렴. 이 맛에 사냥꾼을 하는 거지. 남자라면 이런 도박을 즐길 줄 알아야하지 않겠어?”
밀러가 이카로스에게 겨누고 있는 검에 시노가 자신의 검을 가볍게 퉁겼다. 그러자 시노의 검에서 용광로의 쇳물과도 같은 열기가 쏟아져 나오며 검 날이 푸르게 바뀌었다.
“그럼 가볼까!”
두 사람은 이카로스에게 달라 들며 기합을 내 질렀고, 고요했던 숲에는 두 사람의 기합이 파문을 만들어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