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리사가 태어났을 때, 그녀의 아버지 가란 미무와 어머니 라나무 미무는 아이의 몸에 새겨진 특이한 모양의 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흔히 있는 몽고반점이라 여겼을 뿐이다.
그러나 델리사가 1살이 되던 어느 추운 겨울날, 수상한 손님이 집을 방문하면서 그 당연한 믿음은 깨지고 말았다.
그는 ‘특별한 아이’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사명을 지키기 위해 ‘깨어났노라’며, 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부부는 신화 같은 이야기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이야기의 살아있는 증거가 델리사였다.
부부는 사명을 다한 손님이 영면을 맞이한 다음 해에 주거지를 옮겼다. 연방 국가 아울란티스의 서쪽에 위치한 코포스 주에서도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칸트폴에 자리를 잡았다. 칸트폴은 코포스 주에서 치안이 가장 좋은 소도시였다.
델리사의 교육은 대부분 가정교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아이는 절대 혼자 밖에 나가선 안됐으며, 언제 어디서나 경호원과 함께했다. 델리사의 친구는 사용인의 자녀들뿐이었지만 그마저 ‘델리사 아가씨’라는 신분의 벽 때문에 완전히 어울려 놀지 못했다.
또래와 섞이지 못하고 겉돌던 델리사는 자연스럽게 조용해졌다. 표정엔 거의 변화가 없었고 말도 없었으며, 겁이 많았다. 가란과 라나무도 그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책 속의 풍부한 경험이라도 델리사에게 제공하고자 했다.
부부는 매주 엄선된 책을 한 권씩 골라 읽어주고, 델리사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식으로 또래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사랑하는 이야기, 복수하는 이야기, 희생하는 이야기, 용기를 내는 이야기, 슬픈 이야기…….
델리사는 눈을 감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깊고 다채로운 감성과 가만히 생각하는 기술을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가족은 극장에도 갔다. 많은 경호원을 대동하긴 했지만, 한번은 슬럼가에 봉사도 하러 갔다.
보호를 위해 대부분의 것을 포기했음에도, 부부는 아이의 정상적인 성장을 위해 하루 이틀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델리사는 부부의 현명함을 이어받아 영민하게 자라났다.
“아가씨?”
“다논 아저씨.”
가란과 라나무의 정성과 사랑을 쏟아 부어 일구어낸 델리사는…….
다논은 소녀의 손에 들린 남색 손수건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선명한 보랏빛 눈망울을 다논에게 똑바로 고정한 채, 아주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박이고 있었다.
“다논 아저씨 오늘이 생일이죠?”
“그래.”
“선물이에요.”
그들은 칸트폴의 유일한 번화가, 브리 시장에 와 있었다. 외출을 제한받는 델리사에게 허락되는 몇 안되는 장소였다.
웬일로 물건에 관심을 보이는가 했더니, 생일 선물을 고르느라 그랬던 모양이다.
델리사는 다논의 반응을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거나, 별다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다만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거리로 고개를 돌렸다. 일직선으로 동강 잘린 까만 앞머리 밑으로, 첨예하게 빛나는 인형 같은 눈망울이 지나다니는 사람의 흔적을 뒤좇았다.
여느 때처럼, 움직이지 않는 마네킹처럼 조용히.
“고맙구나.”
다논이 웃는, 그러나 안쓰러운 감정을 채 숨기지 못한 얼굴로 감사인사를 전했다. 그러나 델리사는 다논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시종일관 잠잠한 델리사의 얼굴에 일말의 호기심이 깃들고 있었다.
다논은 델리사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확인했다. 아, 또 그 아이였다.
화려하게 생긴 사내애.
배우가 잘 어울릴 것 같은 남자아이였다. 머리카락은 이 근방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옅은 벚꽃 색이었다. 곱슬기가 있는지, 큰 굴곡으로 굽이치는 분홍색 머리카락이 솜사탕처럼 가볍게 부풀어 있었다.
눈은 속이 투명한 노란색이었다. 레몬처럼 연한 노랑이라 가운데에 자리 잡은 검은 동공이 어딘가 오싹한 느낌이 들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소년은 어느 순간부터 이곳, 브리 시장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워낙 화려한 외모인지라 칸트폴 토박이들은 아이가 모습을 드러낼 때면 미래가 기대되는 남자애라며 입방을 찧었다.
델리사는 구태여 말을 덧붙이진 않았지만, 관심이 가는 듯 장난감가게의 처마 밑에 서서 소년을 오랫동안 지켜보곤 했다.
집에서나 밖에서나, 흐르는 것들을 그저 무심히 지켜보기만 하던 델리사가. 이례적인 흥미와 아이 같은 호기심을 지니고서.
그래서였다.
“아가씨.”
델리사를 부추겼던 건.
“저 아이에게 관심이 가십니까?”
**
델리사는 당황했다.
‘저 애에게 관심이 있었나?’
알 수 없었다. 간혹 고개를 돌린 소년과 우연히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너무 오래 쳐다봤다는 후회를 한 게 전부였다.
뭐라고 얘기를 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박이고 있으니 문득 다논이 손을 잡고 끌어당기며,
“가시죠.”
했다.
다논은 한 번도 이런 식으로 행동한 적이 없었다. 델리사는 당황한 채 다논의 손에 이끌려 인파 속에 파묻혔다.
소녀는 언제나 인적이 가장 드문 곳에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기만 하는 방관자였다. 그 속에 직접 섞여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옷깃을 스치는 살결, 귓전에서 와글와글 터지는 웃음소리, 사람 냄새…… 각양각색의 자극이 머릿속으로 짜릿하게 흘러들어왔다. 정신이 없는데도 그게 싫지 않았다.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은 항상 이런 느낌을 받을까?’
다논이 걸음을 멈추었다. 델리사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남자아이가 지척이었다.
거짓말처럼 몸이 굳었다.
다논이 괜찮으니 어서 말을 걸어보라며 푸근한 시선을 던졌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델리사는 겁이 많았다. 그것이 사람이든 기계든 동물이든 가리지 않았다. 처음 보는 이성 또래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은 굉장한 모험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돌아가려고 했다. 델리사는 소년을 멀리서 구경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굳이 말을 섞고 어울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눈에서 별이 튀는 것 같이 잘 생긴 외모, 화려한 색깔, 부드러운 표정. 마치 책을 보는 것처럼 눈이 즐거운.
‘지금도 충분한데, 왜 굳이 말을 걸어야 해?’
물론 궁금한 점은 있었다.
소년의 행동거지에서는 은연중에 풍겨 나오는 고아한 품격이 있었다. 기품 있는 걸음걸이는 델리사의 배경과 비슷한 냄새를 흘렸다.
너도 그러니?
혹시 부모님이 돈을 많이 버시니? 어렸을 때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았니? 너도 가정교육을 받았니? 나처럼 친구 사귀는 게 어렵니?
차마 입 밖으로 쏟아지지 못한 수많은 질문들이 가슴 안에서 맴돌았다. 그래도 괜찮다. 책을 읽고 궁금한 점이 생기면 부모님과 대화를 나눈 것처럼, 이 궁금증도 그런 식으로 해결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그게 자연스러웠다.
소녀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책 속의 인물들에 대해 혼자 고민해보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었다.
“어, 안녕?”
그런데 소년이 먼저 말을 걸었다.
“토요일마다 블로스 장난감 가게 앞에 서있었던 여자애, 맞지?”
이야기가 진행될 기색이 보이자 다논이 뒤로 조금 물러섰다.
델리사는 섬세하게 세공된 밀랍인형마냥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고개를 모로 기울인 소년이 어깨를 으쓱이며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이단이라고 해. 성은 딱히 없어.”
델리사는 이단의 말투와 어조, 각이 잡힌 몸짓을 눈여겨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이단의 손은 따뜻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조금 차가웠다. 굳은살 때문이었다.
운동을 취미로 하는 정도로는 만들 수 없는 근육이었다. 마치 여러 덩어리로 뭉쳐진 근육이 딱딱한 가죽을 뒤집어 쓴 채 델리사의 손으로 포개지는 느낌이었다.
델리사는 조금 놀랐지만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자신의 잠잠한 얼굴이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순간이었다.
“너는 이름이 뭐야?”
멀리서 어렴풋하게 봤던 노란색 눈이 델리사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이단의 눈망울은 마치 레몬즙이 풀어진 물처럼 맑고 투명했다. 자세히 보니 눈매의 끄트머리에 두 개의 눈물점이 박혀있었다.
소년이 녹은 버터마냥 부드럽고 친절한 미소를 덧그렸다.
델리사는 저 웃음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명화에 나오는 아기천사가 꼭 저런 웃음을 짓곤 했다.
델리사는 시선을 살짝 비껴 땅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델리사…….”
“그래, 델리사. 괜찮다면 나랑 같이 시장 구경할래? 아, 물론 뒤에 계신 아버님이 허락해 주신다면 말이야.”
“경호원…….”
“응?”
“아버님이 아니야. 경호원이야.”
이단의 눈이 조금 동그래졌다.
델리사는 소년의 놀란 표정을 보자마자 사실대로 말한 것을 후회했다. 저택의 아이들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