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들처럼 나를 어려워할까?’
델리사는 이단의 곧게 펴진 등을 확인했다. 하늘을 찌르듯이 꼿꼿하게 세워져 있는 목도, 단정한 자세도.
이단은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아니다. 그러니 불편해하지 않을 거라고, 델리사는 사실인지 아니면 바람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그러면 너에게 허락을 구해야겠네.”
이단이 자연스럽게 말을 받으며 델리사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나는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 친구가 없어서 심심했어. 같이 구경할래?”
조금 망설여졌지만, 델리사는 기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단이 자연스럽게 델리사의 손을 잡았다. 그에게서 희미하게 박하 냄새가 났다. 코를 싸하게 찌르는, 차가운 향기. 델리사는 그 청량감이 어쩐지 이단의 다정하고 친절한 행동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둘은 시장에 널려 있는 다양한 가게를 방문했다. 길거리 음식을 사서 먹기도 했다. 델리사는 좀처럼 말이 없었지만, 이단이 부담스럽지 않도록 대화를 이끌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침묵이 흐를 때조차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그게 이단과의 첫 만남이었다.
델리사는 토요일에만 하던 외출을 대폭 늘렸다.
다른 또래 아이와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면 부모님이 싫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더 많은 책을 읽고 싶다며 둘러댔다. 도서관 안에만 있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델리사가 행한 최초의 또래다운 일탈이었다.
다논은 이 사항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이제야 생기가 도는 델리사의 설렘을 지켜주고 싶어 했다. 결국 델리사는 다논의 너그러움 아래서 가벼운 자유를 맞았다.
물론, 그렇다고 델리사의 마음까지 자유로워진 건 아니었다. 소녀는 ‘도서관에 있겠다고 부모님과 약속한 시간’에 이단과 노는 것을 죄스럽게 여겼다. 그럼에도 욕심이 나는 마음을 조절하지 못해 매번 집밖을 나섰다.
이단은 소녀의 첫 친구였다. 어쩌면 이대로 우정이 이어져 소꿉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델리사는 책을 읽으며 키웠던 작은 바람을 이단과 함께 채워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 소중한 추억들이, 부모님에게 한 거짓말 같은 나약한 모래성 위에 쌓이고 있는 것을 몹시 불안하게 여겼다.
**
얇고 차가운 빗줄기가 희뿌연 하늘을 가르며 안개처럼 흘렀다.
이단은 회색으로 추적추적 젖어가는 마을을 등지고 선 델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허리까지 오는 새까만 머리카락이 소녀의 움츠러든 어깨를 두껍게 덮고 있었다.
“델리.”
이단이 그새 입에 붙은 애칭을 속삭이며 허리를 숙였다.
“무슨 일 있어?”
생각에 잠긴 짙은 보라색 눈이 이단의 얼굴로 향했다.
“오늘은…….”
“응?”
이단이 퍽 다정하게 눈가를 휘어트리며 답을 채근했다.
분홍색과 노란색으로 물든 화려한 색감의 소년이 미소를 짓자 주위까지 잠시나마 화사해졌다. 두 손을 꽉 맞잡고 있던 델리사가 마지못해 요구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싶어.”
또래의 아이들은 대부분 책을 선호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도서관에서 놀자는 말은 부모님 앞에서 치고 박고 놀자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단은 그녀의 어처구니없는 제안에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델리도 책 좋아하는구나.”
델리사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이단도?”
“응. 좋아해.”
그가 손을 내밀었다.
“갈까?”
델리사의 얼굴에 희미한 열감이 돌았다.
소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단이 델리사의 손을 잡고 사탕가게를 나섰다. 그들은 다논이 몰고 올 증기마차를 기다렸다.
조만간 하얗게 번지는 안개비를 헤치며 검은색의 세련된 마차 하나가 증기를 뿜으며 접근해왔다. 마부나 말없이 자체의 동력으로 움직이는 증기마차가 톱니바퀴처럼 복잡한 모양의 바퀴를 굴리며 지척에 멈춰 섰다.
둘은 마차를 타고 시립도서관으로 향했다.
검은 우산을 쓴 아이들은 종이와 잉크냄새가 섞인 건물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고즈넉하게 퍼졌다. 도서관은 사람 없이 한적했다.
델리사는 어깨에 힘을 빼고 주위를 살폈다. 도서관에 오자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소녀는 벌써 3주가 넘도록 이단과 마을 곳곳을 누비며 놀고 있었지만, 적어도 한번은 약속대로 도서관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둘은 책을 고르기 위해 흩어졌다. 정확히는, 델리사가 먼저 인문학 코너로 걸음을 옮겼고 이단이 바로 옆 칸인 초능력 코너로 걸어갔다.
다논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길게 늘어선 책장 바깥쪽에 자리를 잡고 섰다.
‘둘이 벌써 그렇게 친해졌나?’
다논이 의뭉스럽게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했다. 아가씨는 책과 함께 할 때 다른 이가 얼쩡거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괜찮을까.’
그는 이단의 몸에 밴 예의와 친절하고 정중한 어투, 그리고 다정한 눈을 떠올렸다. 그러나 소년의 시선은 어딘가 섬칫한 구석이 있었다. 웃고 있어 순해 보일 뿐이지, 눈매도 도저히 온화해 보인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섭고 날카로웠다. 무기질적으로 깜박이는 눈은 간혹 아무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곤 했다.
‘괜찮겠지.’
그러나 이단은 14살의 어린 남자아이다. 심성도 나무랄 데 없이 착했다.
그는 찜찜한 마음을 구석에 접어두고, 바로 옆 코너에 있을 이단으로부터 주의를 완전히 돌렸다.
**
이단은 초능력과 관련된 책을 아무거나 뽑아 들었다.
그리고 델리사가 있는 인문학 코너로 걸음을 옮겼다. 빽빽하게 늘어선 책장을 따라 모서리를 도니 사다리에 오르고 있는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가 보였다.
그는 제목도 보지 않고 고른 얇은 두께의 책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사각지대에 몸을 적당히 숨긴 채 소녀를 응시했다.
델리사의 경호원이라는, 초능력 보유 경호원은 복도 끄트머리의 책장 모서리에 목석처럼 서있었다. 이단이 알기로 그의 초능력은 자신이 지정한 상대의 근처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있는 능력이었다.
한 마디로 경호원이 이단을 적으로 간주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으.”
델리사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이단의 옅은 노란색 눈알이 델리사에게로 느릿하게 굴러갔다.
델리사는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사다리 위에서 잔뜩 얼어있었다. 자세히 보니 사다리의 다리를 지탱하는 고무받침대 하나가 빠져있었다. 손을 위로 뻗어 책을 꺼내야하는데, 겁이 많은 그녀는 안쓰럽게도 흔들리는 사다리 위에서 버티는 게 고작인 모양이었다.
이단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간을 보는 사람처럼 검지로 책등을 톡, 톡 두드렸다.
속을 알 수 없는 시선이 델리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었다. 아름다운 눈망울이 인위적으로 만든 화려한 인형처럼 감정 없이 깜박거렸다.
‘사다리가 그렇게 크게 흔들리는 편은 아니야…….’
한편, 자신의 균형 감각이 얼마나 형편없는 수준인지 꿈에도 모르는 델리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생각했다.
‘이런 일로 다논을 부르고 싶진 않아.’
일자로 굳게 다물린 소녀의 입술이 고집스럽게 비틀렸다.
그녀는 망설임 끝에 손을 뻗었다. 식은땀으로 미끈거리는 손이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로 덜덜 떨렸다. 검지를 바짝 치켜세우자 손톱 끝에 책의 모서리가 만져졌다. 그것을 긁어내듯이 뽑아내자 책이 반쯤 달려 나왔다.
델리사는 스스로에게 잘했다고 칭찬했다. 비록 그 끝이 두려움에 굳어버린 발이 미끄러져 추락하는 끝으로 이어졌을지라도 말이다.
너무 놀라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델리사는 질끈 눈을 감았다.
허리에 미약한 충격이 전해졌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치곤 아프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단단한 무언가가 허리를 강하게 옭아매고 있었다. 그녀를 안정적으로 붙든 팔뚝이 놀라운 힘으로 델리사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두 다리가 땅에 똑바로 설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이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다논뿐이다.
그런데 델리사의 콧잔등으로 청량한 박하향이 맴돌고 있었다. 델리사는 그 이질적인 향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향이었다.
눈을 뜨자 가볍게 흐트러진 벚꽃 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괴력의 소유자는 이단이었다. 예민하고 영민한 델리사의 머릿속으로 순간적인 괴리감이 스며들었다.
찰나의 일이라, 델리사는 이때 본인이 이 사건을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조차 눈치 채지 못했다.
이단이 상냥한 얼굴에 걱정의 기색을 덧칠한 채 델리사를 내려다보았다. 델리사는 어딘가 기묘한 얼굴로, 커다란 눈망울에 굵은 눈물을 매달고 있었다. 이단의 입 꼬리가 저도 모르게 조금 굳었다.
그는 당황스러운 눈치로, 천연덕스럽게 말을 잇는 평소와 다르게 잠깐 어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