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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래잡기
작가 : 다나안
작품등록일 : 2018.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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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소녀와 소년
작성일 : 18-11-16     조회 : 273     추천 : 0     분량 : 4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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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델리사는 눈을 힘껏 부릅떴다. 한번이라도 깜박이면 눈물이 구슬마냥 후두둑 떨어질 것을 예상한 조치였다.

 

 이단이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괜찮…….”

 “괜찮아?”

 

 델리사가 먼저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녀와 여전히 눈을 마주친 상태였던 이단이, 어딘가에 홀려 들어가듯 델리사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머릿속으로 언젠가 이와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스쳐가고 있었다. 그래, 아주 오래 전에…….

 

 [형!]

 

 연보라색 시선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델리사보다는 날렵한, 하지만 눈빛이 선하고 온화해서 무섭지는 않은 눈.

 

 이단은 이 기억이 언제 적 기억인지 어렵게 기억해냈다. 나무에서 떨어진 동생을 대신 받느라 무릎이 까였을 때의 일이었다. 동생은 불같이 화를 냈다.

 

 [다음엔 그러지 마!]

 “다음엔 그러지 말아요.”

 

 이단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숨을 몰아 내쉬었다.

 

 두개골이 지끈거렸다. 들끓는 구토감이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는 마른침을 삼켜 뜨겁고 씁쓸한 기운을 도로 뱃전에 욱여넣었다. 델리사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얗게 윤이 나던 소년의 얼굴이 마치 물에서 금방 건져 올린 주검마냥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이단이 경련을 일으키는 눈두덩을 오른손으로 쓸어내리듯 덮으며, 입술을 말아 올렸다.

 

 “델리, 서로 말 놓기로 했으면서 다시 존댓말 하는 거야?”

 

 델리사가 이단의 품 안에서 빠져나오며 중얼거렸다.

 

 “조금, 놀라서…… 습관대로…….”

 “다칠까봐 받아준 거였는데, 놀라게 했으면 미안해.”

 

 델리사는 원래대로 돌아온 이단의 친절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단이 다쳤다면 더 놀랐을 거야.”

 

 작고 부드러운 손이 굳은살이 박인 이단의 손을 꼭 쥐었다가 놓아주었다. 따뜻한 마시멜로에 감싸인 기분이 엄습했다. 이단은 이런 기분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가 한쪽 눈썹을 산 모양으로 휙 꺾어 올리는 사이, 델리사가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가까이 보지 않으면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미미한 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고마워.”

 

 델리사가 이제 가자는 듯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이단은 한쪽 눈썹을 든 표정 그대로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흔들었다. 의미를 알아들은 델리사가 먼저 자리를 떴다. 그녀의 아담한 품에는 우여곡절 끝에 손에 넣은 두꺼운 책이 들려 있었다.

 

 ‘겁에 질렸었던 주제에.’

 

 고개를 숙인 이단이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형!]

 “응?”

 

 이단이 작게 대답했다.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

 

 “말씀하신 사진입니다.”

 

 델리사의 어머니, 라나무 미무가 고개를 돌렸다.

 

 경호원이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황갈색 서류봉투를 넘겨주고 있었다. 봉투를 착잡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라나무가 한숨을 쉬며 받아들였다.

 

 “웬 사진이야?”

 

 가란이 집무용 책상에 고개를 박은 채 물었다.

 

 라나무는 대답 대신 피곤한 기색으로 가죽의자에 몸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미간을 찡그린 가란이 고개를 들었다.

 

 주황색 무드 등 아래로 라나무의 가라앉은 얼굴이 보였다. 얼굴에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운명자락에 매달린 불길함처럼 라나무의 뺨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사진을 확인하며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지압했다.

 

 “여보?”

 

 가란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라나무를 채근했다.

 

 “가란. 이치아트 가문의 특징이 뭐라고 했었지?”

 

 라나무가 나지막하게 질문했다. 가란이 검은색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굴렸다.

 

 “분홍색 머리라지, 아마. 특이한 색이어서 기억하고 있었거든. 무슨 일인데 그래? 델리사 일이야?”

 “델리사가 요즘 외출이 잦아서 사람을 붙였거든.”

 “다논이 있는데 뭐 하러 그랬어?”

 “다논은 누구보다 델리사를 위하는 사람이라서, 애가 떼를 쓰면 오히려 냉정하게 끊어내기 힘들 거야.”

 “델리사가 떼를 쓴다고?”

 

 가란은 아주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양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애가 아니라는 걸 알잖아.”

 “가란, 델리사는 어른스러운 척 할 뿐이지 아직 어린애야.”

 “그렇긴 하지만…….”

 “알아봤더니 도서관에 가는 게 아니라 누구를 만나 노는 모양이더라구.”

 “정말이야? 델리사에게 친구가 생겼대?”

 

 가란의 들뜬 목소리를 들은 라나무가 눈을 가늘게 치떴다.

 

 “당신 지금 설마 신난 거야? 델리사가 위험할 수도 있단 말이야.”

 “라나무, 여긴 범죄율이 가장 낮은 곳이잖아. 바빌리스니 아스썸이니 거즐이니, 범죄조직과는 옛날부터 연이 없는 곳이고…….”

 

 가란이 라나무의 손에 들려 있는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뭘 보고 있는 거야?”

 “당신이 말하는 ‘델리사의 친구’ 말이야. 머리가 분홍색이야.”

 “뭐?”

 

 가란은 충격을 받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조만간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여보. 이치아트 가문은 아울란티스 동쪽 끝에 거주하고 있어. 우리랑은 완전히 정반대 지역이야. 우연히 머리가 분홍색인 거겠지.”

 “이치아트의 서신이 일주일째 도착하지 않고 있잖아.”

 “간혹 있는 일이었잖아? 거리가 거리다 보니…….”

 “하지만 분홍색 머리는 흔하지 않아.”

 

 미약한 현기증을 느낀 가란이 뒷목을 주무르며 의자 등받이에 뒤통수를 기댔다.

 

 “델리사에게 미리 모든 걸 밝혔어야 했을까? 우리가 잘못한 걸까, 가란?”

 

 라나무가 불안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돋보기안경을 벗은 가란이 마른세수를 하며 대답했다.

 

 “애가 어렸잖아, 여보. 18살에 밝히려고 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고…….”

 “그건 델리사가 우리 품 안에서 무탈하게 자랐을 때 얘기잖아. 아무래도 안 되겠어. 델리사의 뒤를 봐줄 사람이 필요해. 공학총관사의 협회장 정도면 안전하겠지.”

 

 가란이 빨갛게 충혈된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그 자는 기계에 미친 사람이야!”

 “당신은 그를 모르잖아. 걘 내 오랜 소꿉친구야. 괴짜여서 그렇지 착해.”

 

 라나무는 이제 좀 안심이 되는 듯 사진을 서류봉투에 정리해 넣었다.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가란이 책상 위의 스탠드를 끄며 눈두덩을 문질렀다.

 

 **

 

 ‘옷이 너무 커.’

 

 전신거울 앞에 선 델리사가 고개를 숙여 옷을 살폈다. 그녀의 체구에 비해 잠옷의 품이 넓어서 예쁘게 잘라 디자인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았다.

 

 미간을 미미하게 좁힌 소녀는 뒤를 돌아 침대로 걸어갔다. 델리사의 방은 지나치게 컸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지낼 그녀를 위해 답답하지 않도록 인테리어 된 방이었다.

 

 얼마나 넓은지 책이 빽빽하게 꽂힌 책장과 유리 진열장, 그리고 화장대를 지나쳐 걸어야 침대가 나왔다. 침실 말고도 델리사 전용 방이 두 개나 더 있었다.

 

 그녀는 발바닥에 감기는 양모카펫을 느끼며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오른쪽으로 네다섯 바퀴는 구를 수 있을 것 같이 넓은 매트가 그녀를 반겼다. 침대가 너무 커서 방 안에 또 다른 작은 방이 있는 것 같았다.

 

 델리사는 침대 헤드보드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사위가 조용했다. 미무 가문의 저택은 사용인들이 거주하는 별관을 제외하고 언제나 물에 잠긴 고성처럼 조용했다.

 

 그녀는 묵직한 고요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오른쪽으로는 활짝 열린 테라스로 미지근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곧 여름이었다.

 

 델리사는 해가 저물어가는 어둑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벌레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투명한 흰색 커튼이 바람이 불 때마다 느릿하게 흔들렸다.

 

 그 장면을 쳐다보던 델리사가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7시였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벽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책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맨 윗줄부터 아랫줄까지 제목을 읽으며 책을 고르다가, 제일 두꺼워 보이는 책을 골라 테라스로 걸어갔다.

 

 테라스에는 간이 책상과 쿠션이 빵빵하게 들어간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의자를 빼고 앉으려는데, 돌연 테라스 아래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진짜야? 여기?”

 

 델리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남자아이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살금살금 걸어 테라스 아래로 고개를 내밀었다. 방의 불빛에 비친 어슴푸레한 인영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확인하니 사용인의 자녀들 다섯 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콧잔등에 주근깨가 퍼진 말썽꾸러기 남자아이가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며 눈을 부라렸다.

 

 “야, 조용히 해. 이 위는 아가씨 침실이란 말이야.”

 

 아이가 의기양양한 기세로 턱을 치켜들었다.

 

 “아가씨랑 불편하게 놀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하고 있어.”

 “으, 싫어. 체할 것 같단 말이야.”

 

 난간을 붙들고 있던 델리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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