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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래잡기
작가 : 다나안
작품등록일 : 2018.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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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소녀와 소년
작성일 : 18-11-16     조회 : 233     추천 : 0     분량 : 4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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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녀는 크게 숨을 들이 쉰 상태로 뒷걸음질 치다가 벽에 등을 기댔다. 차고 싸늘한 밤기운이 그녀의 등허리를 타고 넘어왔다.

 

 “그래도 요즘은 우리한테 관심 없으시던데.”

 “도서관에 간다나봐. 진작 그러지. 그동안 얌전히 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꺄르르, 숨죽인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그래도. 나쁜 분은 아니잖아…….”

 

 가만히 듣고 있던 여자아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반박했다. 남자아이는 발끈했다.

 

 “누가 아가씨가 나쁘대? 그냥 우리가 좀 불편하다는 거지. 아가씨는 너무 얌전하시잖아. 그렇지, 알렉스?”

 “맞아. 엄마가 얼마나 주의를 주는데. 실수하면 잘리는 수가 있다고.”

 “그럴 리 없어. 그분들은 친절하시고…….”

 “야.”

 

 남자아이가 목소리를 낮췄다.

 

 “맘에 안 들면 넌 아가씨한테 가서 놀아. 여기 있는 누구도 아가씨랑 모험하고 싶진 않으니까.”

 

 여자아이가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숙인 델리사는 옷자락을 그러쥐었다.

 

 조만간 저택을 빙 둘러 싸고 있는 철조망과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델리사는 자신이 침실로 돌아가길 원한다고 생각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고. 그러나 다리는 난간으로 걷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 안에서 움트는 이 반항심이 누굴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조심히 들어와야 해.”

 

 남자아이가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인 아이들이 선두에 선 남자아이의 뒤를 쫓아 떨기나무에 숨겨진 개구멍으로 줄지어 기어들어갔다. 아이들이 없어지자 사위가 다시 조용해졌다.

 

 저택이 물에 잠긴 고성처럼 가라앉았다. 델리사는 그 분위기를 따라 자기도 가라앉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숙인 델리사는 책상으로 돌아와 앉았다. 두꺼운 하드커버를 열고 빽빽하게 나열된 활자를 읽었다.

 

 ‘아가씨는 너무 얌전하시잖아.’

 

 책장을 넘기던 델리사의 손이 멈췄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한참을 움직이지 않다가 별안간 책에 달린 빨간색 띠를 페이지 사이에 끼우고 하드커버를 덮었다. 그리고 옷장으로 걸어가 아이보리색 카디건을 걸쳤다.

 

 침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다논이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책을 읽을 거예요.”

 “서재로 갈까요?”

 “네.”

 

 그녀는 1층으로 내려와 서재의 문을 열었다. 다논은 자연스럽게 복도에서 대기했다. 문을 닫은 델리사가 서재의 왼쪽 벽으로 가 테라스 문을 열었다. 근처 바닥에는 테라스에 나갈 때 사용하던 슬리퍼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걸 신고 테라스로 나와 낮은 계단을 두 칸 내려갔다.

 

 그러자 밖이었다. 단순하고 쉬웠다. 그러나 여태 하지 않았다. 부모님에게 혼나고 싶지 않았고, 다논 없이 밖을 나서는 것도 무서웠다.

 

 일자로 다물린 소녀의 입술이 더욱 단단해졌다.

 

 그녀는 카디건을 단단히 여미고 저택을 빙 돌아 개구멍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손바닥에서 진땀이 솟구쳤다. 그녀는 참새마냥 부풀어있는 가슴팍에 손을 댔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있었다. 조금 어지러운 것도 같았다.

 

 푸르딩딩하게 식은 입술에 침을 바르고 주머니에서 고무줄을 꺼내 들었다. 허리에서 찰랑대는 검은머리를 한데 그러모아 포니테일로 높게 올려 묶었다. 손바닥의 땀 때문에 머리가 가지런하게 모이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그녀는 꼬랑지를 돌돌 말아 뒤통수에 고정시켰다.

 

 근처의 관목들을 뒤지자 가지가 유난히 엉성해 보이는 수풀이 눈에 띄었다. 아이가 젖혔던 나뭇가지를 쥐고 왼쪽으로 밀자, 잘 다듬어진 개구멍이 나타났다.

 

 안쪽은 어두웠다. 무엇이 있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기어가다 손으로 벌레를 밟아도 모를 것 같았다. 아니면 목으로 벌레가 들어올 지도 몰랐다.

 

 델리사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왜인지 눈물이 솟구쳤다.

 

 강렬하게 몰아치는 비참함이 정신을 거세게 휩쓸었다. 델리사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꼼짝 없이 서 있었다.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흘러가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다. 슬픈 감정이 방울방울 떨어져 흙바닥을 까맣게 적셔갔다. 머릿속이 멍했다.

 

 그녀는 잠깐 코를 훌쩍거리다가, 카디건을 벗어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벌레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더듬더듬 몸을 수그렸다. 손을 뻗자 따가운 이파리와 가지가 느껴졌다. 그녀는 감각에 의지해 구멍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개구멍의 좁은 터널은 몹시 짧았다. 얼마나 짧았냐면, 기어서 10초 정도 나아가자 철조망 밖이었다.

 

 선선한 바람이 눈물에 젖은 뺨을 스치지나갔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온몸이 차가웠다.

 

 그녀는 뻑뻑해서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펴서 일어났다. 무릎이 후들거렸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책으로만 읽었던 강렬한 흥분감에 눈앞이 맑았다.

 

 그녀는 자신이 해냈다는 게 믿기지 않아 흙으로 엉망이 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입 꼬리가 삐죽 위로 치솟았다. 숨이 트이는 넓은 공터가 델리사를 압도했다. 두려움과 걱정, 불안이 휘발되어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감동적인 자유였다.

 

 자유.

 

 그녀의 옆엔 다논도 없었고 그녀를 걱정스럽게 생각하는 부모님도 없었다. 그 기분이 예상과 달랐다.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상쾌했다.

 

 델리사는 낮은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그녀는 밤의 브리 시장을 본 적이 없었다. 불빛으로 번쩍거리는 거리가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델리사는 도로 카디건을 입고 단추를 채웠다. 그러자 평범하게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처럼 보였다. 그녀는 옷소매로 눈물자국을 지우며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짙은 보랏빛 눈망울에 노랗고 하얀 불빛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

 

 “뭘 숨겨 놨길래 경호원이 이렇게 많냐. 이게 다 초능력자라고?”

 

 껌을 씹던 남자가 종이를 대충 훑으며 혀를 찼다. 그의 발 주변으로 주먹만 한 회색 쥐가 잽싸게 지나갔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골목길 깊숙한 곳에 몇몇 거지들이 박스로 몸을 둘러싼 채 웅크리고 있었다.

 

 몰래 누구를 만나기엔 적절하지 않았지만, 크게 신경 쓸 것도 없었다. 소도시 칸트폴은 이렇다 할 범죄조직이 없었다. 한 마디로 눈치 볼 게 없다는 얘기였다.

 

 종이를 구겨 쥔 남자, 아지스가 꺼림칙한 눈으로 이단을 살폈다. 소년은 돌바닥에 깔린 박스에 대충 주저앉아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기분 나쁜 놈.’

 

 바닥에 가래침을 뱉은 남자가 발로 이단의 종아리를 툭툭 쳤다. 맞는 대로 매가리 없이 흔들리던 이단이 뒤늦게 시선을 들었다. 고요한 눈이었다.

 

 잠시 턱에 힘을 준 아지스가 손에 들린 종이로 이단의 눈과 이마 주위를 성의 없이 치기 시작했다.

 

 “너는 인마.”

 

 툭.

 

 “눈 좀 깔고 다니라고.”

 

 툭.

 

 “했냐, 안했냐.”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분홍색 머리를 한 움큼 틀어쥔 아지스가 머리를 뒤로 잡아당겼다. 이단의 몸이 기우뚱 넘어가 축축한 벽돌에 닿았다.

 

 소년이 무표정한 얼굴로 땅을 바라보았다.

 

 “그래, 진작 그럴 것이지.”

 

 아지스가 솥뚜껑만한 손바닥으로 이단의 뒤통수를 후렸다.

 

 “여기 짜져있지 말고 나가서 돈이나 털어와.”

 “…….”

 “칸트폴까지 출장 와서 일하고 있는데, 먹기라도 잘 먹어야 하지 않겠냐. 그렇지?”

 

 이단이 계속 아무 반응도 하지 않자 아지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 새끼는 귀가 없나, 입이 없나. 도련니임, 제가 보이긴 하세요? 예?”

 “…….”

 “씨발 입이 있으면 말을 해봐요. 반반한 얼굴로 아가씨만 후리면 되는 게 아니에요. 알아듣겠으면 대답해요, 병신아? 알겠죠?”

 “……예.”

 

 이단이 기계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지스가 뭐하고 섰냐며 턱을 까딱였다.

 

 소년이 잔말 없이 뒤돌아 환한 불빛이 쏟아지는 브리 시장의 거리로 나섰다.이단에게 사람들의 주머니를 터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무예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 아이였다. 어떤 무기도 손에 들어오기만 하면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았다. 뼈도 강골이었으며, 체력도 좋았다. 그의 스승님은 그를 타고난 무예체질이라며 칭찬했다.

 

 그 모든 건 이제 옛날 얘기가 되었지만, 이단은 그 능력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소매치기 같은 건 조금의 눈치와 민첩성이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그는 무감한 얼굴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물건에 손을 댔다. 간혹 누군가 수상함을 눈치 채려고 하면, 화려한 외모에 꽃 같은 미소를 띠어서 의도적으로 주의를 돌렸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이용할 줄 알았다. 그걸로 고명하신 미무 가문의 아가씨도 꼬여냈지 않은가.

 

 ‘아니.’

 

 그러나 이단은 곧 자신의 생각을 정정했다.

 

 ‘델리사는, 얼굴을 보고 접근했다가 보단…….’

 

 소녀는 이단의 행동거지를 예의주시하곤 했다. 표현이 없어 좀처럼 속이 가늠이 되지 않는 탓에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허리에 찬 호주머니가 묵직해질 때 쯤, 이단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피곤했다. 지친 몸을 누이고 아무 생각 없이 잠에 빠져 있고 싶었다. 오랫동안, 더 이상 피곤해지지 않을 날까지…….

 

 “죄송합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아는 목소리였다.

 

 이단이 정면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델리사임이 분명한 얼굴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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