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와 다르게 머리가 엉성하게 묶여 있었다.
옷도 헐렁한 원피스에 편안한 카디건만 달랑 입은 채였다. 소녀는 옷깃이 스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사과를 하며 시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는 빠르게 눈을 굴려 주위를 살폈다. 다논이 없었다.
‘뭐 하는 거지?’
그녀의 부모님이 델리사를 이 시간에 혼자 돌아다니는 걸 허락했을 리 없다. 미무 가문의 부모님은 아이를 과보호하기로 유명했다.
델리사가 거리에서 즉석으로 펼쳐지는 초능력 공연을 관람하기 시작했다.
뒤집어엎은 사과박스 위에 올라간 남자가 보잘 것 없는 염동력으로 여러 개의 돌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델리사의 얼굴은 대부분 표정이 별로 없지만, 이단은 그간의 친분으로 그녀의 상태를 조금쯤 유추할 수 있었다. 소녀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델리사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저 홀로 움직이는 돌을 보기 위해 목을 위로 쭉 빼고 있었다.
이단은 초능력을 사용 중인 남자의 창백한 안색을 확인했다.
‘무리하고 있는데.’
돌도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남자는 금방이라도 그만 둘 것처럼 돌을 움직였으나, 모자에 쌓인 돈을 보고 생각이 바뀐 게 분명했다. 더 많은 돌을 든 남자가 관람객들의 머리 위로 돌을 옮기는 퍼포먼스를 시작했다.
와아―,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곧 떨어지겠어.’
이단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는 바쁜 몸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지 않으면 아지스가 주먹으로 성질을 부릴지도 몰랐다. 그러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델리사가 커다랗게 뜨인 눈으로 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장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돌이었다.
소녀의 흥분어린 눈이 한순간에 두려움으로 어물어졌다.
‘눈치 챘다.’
이단이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뱉었다. 델리사는 불안한 눈치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사람들을 헤치고 무리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그는 거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그런데 구경 중인 한 어린 여자아이의 머리 위로 큰 돌덩어리가 떨어지는 것을 그녀가 봤다.
델리사가 뛰었다.
이단은 저가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녀는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여자아이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다.
소녀는 겁이 많았다. 이단도 잘 아는 사항이었다. 그런데 행동에 망설임이 없었다. 어디서 저런 결단력이 나올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형!]
이단이 델리사에게 뛰어갔다. 기감이 예민한 그의 눈에, 델리사의 정수리로 떨어지는 돌이 포착되었다.
[내가 고양이를 구했어!]
그는 초능력을 일으켰다. 그리고 델리사가 있는 곳으로 단번에 도약했다.
“꺄아악!”
어린 여자아이가 머리를 감싸며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그런 아이를 델리사가 품에 끌어안았고, 그 위로 이단의 팔뚝이 드리워졌다.
퍽, 이단의 팔뚝에 부딪힌 돌이 바닥에 떨어졌다. 사위가 한 순간에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인지가 되지 않아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공연에 정신이 팔려 있던 탓에 화려하게 생긴 남자아이가 원래 저 자리에 있었나 없었나 까지도 분간을 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 놀란 목소리가 폭죽처럼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이오나!”
여자아이의 엄마가 놀라 달려왔다. 공연을 하던 초능력자가 박스에서 내려와 달아났다. 그 뒤를 정의감에 사로잡힌 몇몇 사람들이 쫓아갔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욕을 씨불이며 흩어졌다. 왁자지껄한 거리엔 어느새 여자아이와 어머니, 델리사, 그리고 이단만 남아 있었다.
델리사는 커다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서 이단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얘야. 너 괜찮니?”
중년의 부인이 놀란 가슴을 부여잡은 채 이단에게 다가왔다.
그는 피가 흐르는 팔뚝을 등 뒤로 숨기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부인은 한순간에 이단의 얼굴로 주의를 팔았다.
“괜찮아요. 아이는 어떤가요?”
“네 덕분에 무사하단다. 정말 고맙다.”
“아닙니다.”
“받아주겠니?”
부인이 기름기가 묻어나오는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꿀빵이란다. 코포스 주의 명물이지. 맛있게 먹으렴.”
“감사합니다.”
부인이 울고 있는 여자아이를 품에 안아 올리고 자리를 떴다. 이단은 무심한 얼굴로 뒤를 돌았다.
델리사는 여전히 뻣뻣하게 굳어서 이단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그가 어둡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집으로 돌아가.”
델리사는 눈꺼풀을 여러 번 깜박이다가, 이단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웃지 않는 이단은 무섭게 생겼다. 델리사는 그걸 처음 알았다.
“나는…….”
“밤은 위험해.”
이단이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굉장히 피곤한 기색이어서,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이 도로 안으로 말려들었다.
그녀는 이단의 팔뚝에 흐르는 피를 보았다. 아파보였다. 그런데 그는 다친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익숙한 일인 것처럼.
‘이상해.’
반사적으로 생각한 델리사가 미간을 찡그리는데, 이단이 성가신 얼굴로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안에는 돌에 맞아 찢어진 살가죽뿐만 아니라, 노랗고 파란 멍들이 곰팡이마냥 듬성듬성 피어 있었다. 델리사가 입을 꾹 다물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안 가고 뭐해?”
이단이 짜증이 잔뜩 난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델리사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그 상처는 뭐야? 혹시 안 좋은 일을 당하고 있니?
소녀는 일그러진 얼굴로 집에 돌아갔다.
**
“오늘도 도서관에 가니, 델리사?”
깜짝 놀란 소녀가 어깨를 들썩였다. 고개를 돌리니 어머니 라나무 미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거실에 서 있었다.
그녀는 다논의 눈치를 살피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라나무는 추궁하지 않았다. 다만 무릎을 꿇고 앉아 델리사를 따뜻하게 끌어안았다. 어머니에게서 진한 라벤더 향이 풍겨왔다.
델리사는 경직된 몸이 부드럽게 풀리는 것을 느꼈다.
“미안해, 딸아.”
델리사는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안겨 있어서 어머니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유 모를 슬픔이 시야 언저리에 안개처럼 퍼지고 있었다.
감정을 억누르느라 목 끝이 당겨오자 델리사는 괜한 침을 삼켰다. 라나무가 소녀의 자그마한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도서관에서 노는 건 즐거우니?”
그렇다고 해야 하는데,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가시가 걸린 것처럼 까끌거렸다. 라나무가 포옹을 풀며 싱긋 웃었다.
그녀의 보라색 눈이 소녀를 다정하게 살폈다. 라나무와 델리사는 판으로 찍은 것처럼 닮은 상이었다.
“괜찮아, 델리사.”
라나무가 속삭였다.
“재미있게 놀고 오렴.”
델리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논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 기분이 이상했다.
델리사는 잠시 저택을 말끄러미 올려다보다가, 다논이 준비한 증기마차에 탑승했다.
“어제는 미안했어, 델리.”
약속 장소엔 이단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델리사를 보자마자 사과부터 했다. 그녀는 그가 무엇을 사과하고 있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눈을 했다.
“어제 사납게 얘기한 거 말이야. 놀랐지?”
그는 필히 델리사가 자신의 사나운 모습에 깜짝 놀랐으리라 예상한 것 같았다.
그러나 소녀는 이단의 태도에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이단이 자기 대신 다친 것에 놀란 것뿐이었다.
“이단은 딱히, 내게 사납게 얘기한 것 같지 않았어.”
델리사가 조근조근 대답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이단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오히려 평소에 친절하게 대해주느라 힘들잖아. 이단이 편한 대로 이야기해도 돼.”
델리사는 친절하고 천연덕스러운 모습이 이단에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새로운 모습은 흥미로웠지만 그뿐이었다.
게다가 그는 간혹 표정이 없어지곤 했다. 델리사는 눈썰미가 아주 좋았다. 이단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그가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있는 사이, 델리사가 변함없이 평온한 얼굴로 크로스백을 뒤졌다. 작은 손에 하얀색 통에 담긴 연고가 들려 나왔다.
소녀는 차갑게 식은 이단의 손을 잡고 언덕에 있는 고목나무의 둥치로 걸어갔다.
솨아아, 바람이 불며 나뭇잎이 부대끼는 소리가 들렸다. 델리사가 고개를 들어 이단을 쳐다보았다. 그의 분홍색 머리가 역방향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바람에 풍성하게 흐드러지는 벚꽃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이단도 바람에 날리는 델리사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보고 있었다. 그는 작은 밤이 펼쳐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둘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