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알지 못하는 나래와 주랑은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걱정이 들었다. 평소와 다르게 지친 얼굴로 그냥 쉬라는 말만 한 주인의 모습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은 것인지. 참으로 걱정이네.”
나래의 걱정에 주랑도 역시 유수방을 보며 동조하며 말했다.
“정말이군. 요즘 들어 무슨 문제라도 생긴 모양이야.”
“워낙 난세이다 보니 그럴 만 하겠지만 말이지.”
한숨과 함께 걱정스런 마음을 나누던 두 사람은 자신들이 호위해야 하는 대상에 대해 급히 떠올리며 찾았다.
“그러고보니 아씨는…….”
“아씨라면 집에 먼저 가신다고 하면서 천천히 오시라고 하셨습니다.”
근처에서 일하는 하인의 말을 듣고 유수부를 나가보니 이미 마차는 없었다. 아마도 집으로 향했을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이번에 외출한 일도 있고 해서 나래는 걱정이 컸다.
“일단은……, 갈까요? 집으로 말입니다.”
“그러지…….”
도대체 언제쯤 나오지 않을까 하는 한숨을 내쉬며 나래는 주랑과 함께 박경의 집으로 향했다.
한편, 나래와 주랑을 놔두고 먼저 집으로 향한 박인하는 다행히도 무사히 집에 도착하여 하인들의 환대를 받았다. 공로를 세운 것에 대한 기쁨보다는 무사히 돌아왔다는 데에 대한 기쁨이 하인들 얼굴에는 가득했다.
박인하가 태어난 이후부터 바쁜 박경 대신 돌봐온 하인들 입장에선 친부인 박경만큼이나 걱정이 가득했던 만큼 무사히 돌아오면서 큰 공까지 세운 박인하에게 정말 기쁜 마음으로 맞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박인하를 어린 시절부터 돌봐온 박인하의 유모인 다래는 눈물까지 흘리며 박인하를 맞이해주었다.
“아씨, 저, 정말 괜찮, 으신가요? 어디 다치신 데는? 그보다 배는 안 고프세요?”
“너무 걱정하십니다.”
다른 하인들에게 진정하란 말까지 들으면서 다래는 박인하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며 울먹이며 몸 걱정부터 했다.
“후후후, 괜찮답니다.”
“저, 정말이, 인가요? 아씨, 설마 어디 다치시고 수, 숨기시는 거, 건 아니신지…….”
“자자, 진정하게. 자 아씨, 가서 쉬시지요. 우선 아씨부터 쉬시게 하자고.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목욕부터 하시겠나요?”
“음, 웬지 이건 선택지가 하나 더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네요.”
“예?”
“아닙니다. 지금은 우선 제 방에 가서 푹 쉬고 싶네요. 목욕도, 식사도 나중에 하고 싶답니다. 생각이 든다면 얘기하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자 다들 아씨 좀 편히 쉬게 해주게나. 아씨,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말씀 하십시오. 별이야, 아씨를 따라가 곁에서 뫼시거라.”
이 집의 집사인 동유는 박인하와 동갑내기인 한 소녀에게 그리 명령했다. 별이라는 이름의 어린 소녀는 쭈뼛거리며 말없이 박인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박인하는 별에게 씽긋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앞서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향하는 도중 다래가 이것저것 물으며 연신 걱정하는 모습을 보인 것외에는 특별한 일없이 방에 도착한 박인하는 별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 아무리 재미가 있어도 내 집, 내 방만한 곳은 없나 보네.”
“고생하셨습니다, 아씨.”
방 안에 들어서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으며 기지개를 피는 박인하에게 별이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박인하는 재미있다는 듯 쿡쿡 웃으며 말했다.
“고생은 무슨. 그보다 나랑 단 둘이 있을 때는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안 그래, 언니?”
언니라 불린 별이 어째야 할지 몰라서 쭈뼛거리고 있자 박인하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평소 다른 사람들 앞에서야 세간의 시선이라는 게 있으니 어쩔 수 없다지만 단 둘이 있을 때는 편하게 하자고 어릴 때 약속했잖아? 설마 금세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언니?”
숨결이 닿을 거리까지 얼굴을 가까이 댄 박인하의 눈에 연신 쭈뼛거리던 별이 말을 꺼냈다.
“나, 나중에 집사님이나 다래님께 들키기라도 하면…….”
“뭐, 어때? 나랑 언니의 일인데. 우리 둘이서 입만 다물면 안 들키잖아? 아, 들킬 수도 있나? 아무렴 어때. 안 그래, 언니? 후후후후후.”
“하, 하지만…….”
어찌해야하며 곤란해 하는 별을 박인하는 코앞에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피하고자 뒷걸음치려는 별을 박인하는 계속 따라갔고, 어느새 도망칠 수 없이 문에 몰아붙여졌다. 별은 누군가 듣는 사람이 없나 귀를 기울이다가 말을 꺼냈다.
“……아, 알았어. 요. 인하, 야…….”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서 하는 거야?”
그럼에도 만족했다는 듯 떨어지면서 박인하는 자신의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아, 일단 옷이라도 편하게 갈아입으심이 어떠신가, 요, 아씨……아니, 인하야.”
“후후후, 됐어. 이래도 편하니 상관없어. 언니도 그렇게 서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서 같이 드러눕자.”
침대의 옆자리를 툭툭 치며 자신을 부르는 박인하의 행동에 역시 우물쭈물 거리며 서있는 별이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기에 박인하의 말대로 했다.
박인하의 명령에 따른 거라 할 수 있지만 엄연히 몸종 따위가 주인의 침대에 같이 누워있다는 게 들켰다간 불벼락이 내려질 게 뻔하기에 별은 푹신한 침대에 누웠음에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침대에 다가가 박인하의 옆자리에 어색하게 누운 별을 보며 박인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나네. 옛날에도 종종 그랬잖아.”
그 말대로 별은 박인하와 어린 시절부터 같이 지내왔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는 바빠서 가족의 정을 깊이 받지 못한 박인하로선 함께 놀아줄 상대가 필요했는데, 나이대가 비슷한 별이 딱 이었다. 그 때문에 불경하다는 혼이 날 정도로 별은 박인하와 어울려 놀았다. 그런 세월 때문인지 박인하는 자신의 몸종으로 다른 하인들이 아닌 별만을 고집하며 곁에 두었고, 이렇게 단 둘이 있을 때는 언니라 부르며 어울리고자 했다.
별 입장에선 어울린다기보다는 자신을 두고 박인하가 장난치는 것으로밖에 안 느껴졌지만.
“저기…….”
“왜?”
“부유수네 자제들께서 아……네, 가 몰래 나갔을 때 잠시 찾아 왔었어…요……. 아니, 왔었어.”
박인하에게 어울리다보니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헷갈려 버벅이는 별을 두고 박인하는 재미있다는 듯 쿡쿡 웃었다.
“그 둘이라……. 장남 분이라면 아까 부유수께서 날 환영하던 차에 눈인사 정돈 했지. 그보다 무슨 이유? 어차피 알고는 있지만 일단 표면적으로 무슨 이유로 찾아왔는지 궁금하네?”
“아……어……, 분명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했었……나?”
“후후후, 무표정한 얼굴로 말이지?”
“예……아, 응.”
“그 사람답네, 후후후후.”
재미있어 하는 박인하의 웃음소리가 방 안을 채우는 와중에 인기척이 들려와 별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놀란 별의 시선 안에는 방 한 구석에 서있는 한 남성의 모습이 들어왔다.
“너무 놀리지 마시오. 한 남자의 순정을 그리 무시해선 옳은 일이라 할 수 없소.”
“허나 재밌는 일이라 할 수 있답니다, 후후후.”
인기척을 느꼈음에도 여전히 침대 위에 드러누워 웃고 있는 박인하의 말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남자를 보고 별은 잠시 얼어 있다가 간신히 정신 차리고 인사를 드렸다.
“아, 깨어있었나요, 오무.”
“저야 항상 깨어 있습니다. 언제나 이 방에서 깨어 있답니다.”
오무라 불린 남자는 예의바른 태도로 별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아직 시집도 안 간 소녀의 방에 함부로 들어와 놓고, 그 소녀의 말을 일일이 듣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보네요, 오무.”
“나라는 존재는 본디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 도깨비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오래 쓴 물건에서 태어나는 법이기에 잠을 자고자 할 때는 물건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법입니다. 하여 내 본체에 해당하는 물건을 다른 곳에 치우면 그만인데 멋대로 자기 방에다가 둔 건 아가씨가 아닌지요.”
오무의 불평 아닌 불평을 들으면서 박인하는 재밌어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