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에 얼마나 고생이 많은 줄 아시나요? 어린 처녀의 사생활을 일일이 다 듣고 있어야 하는 제 기분이 어떤지 아나요? 내 아무리 인간이 아닌 도깨비라곤 하나 성별로는 남성에 해당한다고요.”
“도깨비도 성욕이란 게 있나요? 그거 새로운 정보로군요.”
“아니, 그냥 불편하단 말입니다.”
오무의 불평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웃는 박인하와 달리 별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유쾌하게 넘기는 박인하와 달리 그녀를 모시는 몸종인 별의 입장에선 예민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였다. 아무리 도깨비라도 남성의 형태가 이 방에 있다는 게 알려지면 어떻게 혼이 날지 상상만해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였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박인하는 유쾌하게 여기며 말했다.
“언니는 참 걱정도 많아. 그래서야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어.”
“아가씨야말로 그렇게 낙천적이어서 어찌 이 험한 정국을 해쳐나갈 수 있겠습니까?”
별을 대신한 오무의 대꾸에 박인하는 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보다 꽤나 오래 외출해 있었더군요. 듣자하니 부친 몰래 전장에 나갔다왔다고 들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무지막지한 일을 저지르신 겁니까?”
오무의 질문에 박인하는 미소를 거두었다. 희미하게 남아는 있었지만 방금까지의 유쾌하고 장난끼 넘치는 미소가 사라진 만큼 방 안에는 희미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어.”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요?”
“있다고 한다면 확인이야. 아울러 준비를 한 거고.”
“확인? 준비?”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별을 보며 박인하는 그녀의 볼에 살짝 입술을 가져다 댄 뒤에 당황한 그녀를 두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래, 확인. 내가 과연 용이 될지, 봉이 될지, 그도 저도 안 된 이무기가 될지 그냥 그걸 확인해본 것뿐이야.”
“무, 무슨 말입니까……아니, 무슨 말이야?”
박인하가 입술을 댄 것 때문에 당황해하며 얼굴을 붉힌 별이 묻자 박인하는 살짝 위를 쳐다봤다. 박인하는 마치 먼 곳을, 아니 오래전 일을 추억하는 듯한 표정으로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있었지. 누군가가 말이야. 10년 전이었나? 한창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슬펐던 그 시절이었지. 어린 마음에 울기만 하면서 방황하던 내가 우연히 발을 디딘 곳에서 만난 인연이 있었지. 아니, 기연(奇緣)인가? 혹은 신연(神緣)이라 할지도 모르지.”
과거를 추억하며 그녀가 꺼내는 말을 들으며 별은 살짝 표정이 어두워졌다.
10년 전. 진경후 박경의 부인이자 박인하의 어머니인 무량부인께서 숨을 거두셨다. 당시에 역시 어렸던 별이었으나 그 슬픔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다. 허나 이를 어떻게 달래야할지 알 수가 없었던 그녀는 박인하의 슬픔을 덜어주고자 자신이 듣고나 아는 비밀스런 장소로 데려가곤 했다.
“언니에겐 고맙게 생각해. 덕분에 그 신비한 목소리를 마주했으니. 그리고 그 목소리는 내게 그러더군. 용이 승천할 것이라고. 그리고 내게 용의 자질이 있다고 말이야. 어쩌면 이무기이기에, 용의 일가이기에 그런지 모르나 참으로 흥미롭다고.”
“그렇군요. 그리고요?”
“그것뿐이야.”
딱 잘라 자신의 말을 끝내고 드러 눕는 박인하를 보며 오무는 어이가 없어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 오무에게 박인하는 별일 아니란 듯 말했다.
“그것만이면 충분하지 않아? 시대는 난세, 그 누가 어떻게 일어설지 모르는 혼란스런 역사의 전환점이라고. 그런 시대에 용이라면 당연히 무얼 얘기하는 것이겠어.”
“그럼 아가씨는 자신이 용에 해당하는지 알고 싶어서 전장에 나갔다왔다는 겁니까?”
어이없어 하는 오무의 질문에 박인하는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웃었다. 평소와 같은 미소를 띠며, 평소와 같은 웃음소리로 방 안을 메웠다.
“후후후, 난세라는 따스한 온기를 받으며 각지에 잠들어 있던 와룡과 봉추는 깨어나게 될 거야. 그리고 스스로의 날개를 피고, 몸을 꿈틀거리며 지상을 박차고 천공을 날아오르겠지. 허나 차지할 하늘은 하나, 태양도 하나, 당연히 널따란 자리도 하나. 거기에 누군가 앉아 있다곤 하나 고작 새끼 도마뱀도 아니 되어 보이는 꼭두각시를 겁낼 이가 누가 있겠어.”
“그 꼭두각시가 누구인지 말은 안겠사오나 다른 이의 귀에 들어가면 심히 위험해질 일이라 여겨지는군요.”
박인하의 말에 어이없어 하면서, 한편으로는 흥미로워하는 오무였다. 반면 무슨 말인지 잘 이해를 못하는 별은 그냥 제자리에 서서 머뭇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용의 형상을 한 이가 나왔지. 여기에 지지 않고자 지상으로 박차고 오르는 녀석들도 있어. 허나 이중 진짜 용은 누구일까? 그리고 진정 저 하늘에 오를 이는? 후후후, 여기서 나는 무얼 해야 할까? 자, 오무?”
“모른다고만 얘기하죠. 허나 엄연히 친분이 있는 인간인 당신이 꺾여 땅바닥에 떨어져 썩어문드러지는 장면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평범히 살아가는 걸 추천하고 싶지만 시대는 그걸 그대에게 원치 않나 보군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오무는 박인하라는 소녀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겉모습은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귀한 집 어린 여식에 불가하다. 허나 그 안에 담긴 생각과 뜻은 참으로 기이하다할 만 했다. 누군가는 그녀가 과한 욕심을, 허상에 불가한 몽상을 꾸고 있다고 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그녀가 원대한 꿈을 가진 원석으로 볼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저로선 재미는 가질 수 있겠군요. 그렇다고 피바다를 보고픈 건 아닙니다만.”
“기대는 해봐, 지혜로운 도깨비님.”
“제가 지혜로운 지는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기대는 해보도록 하죠.”
그렇게 말을 마치고 다시 잠에 들어가려는 오무는 순간 깜빡 잊었던 게 있기에 멈추어 박인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준비를 했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준비란 건 또 뭡니까?”
“용이 깨어날 무대.”
오무의 질문에 즉각 대답을 한 박인하에게 다시 오무는 물었다.
“무대라니요? 당신이 전장에 나간 건 당신이 용인지 확인하고자 나갔다고 했죠. 허면 도대체 무슨 무대를 또 준비했다는 겁니까?”
오무의 물음에 이번에는 웃음으로 답하는 박인하였다.
“지혜롭다는 건 취소해야겠어, 후후. 고작 그런 전투는 용이 등장할 판이 아니야. 더 큰 게 필요해. 무엇보다 이 중경에 용이 될 후보는 나 혼자가 아니야. 그 기질은 누구에게나 있어. 그보다 내가 과연 용이라고 봐? 과연 그럴까? 아님 무엇이 있을까?”
살짝 위험한 느낌으로 웃음과 말을 늘어놓는 박인하의 기세에 눌려 오무와 별은 별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
“후후후후, 궁금해? 나도 궁금해. 있잖아, 오무. 당신은 어때?”
“그걸 제가…….”
“궁금하면 기다리자고. 당신도 기대는 한다고 했지? 그렇다면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는 거야.”
“그걸 모르진 않습니다만……. 뭐, 됐습니다. 오늘은 이만 하죠. 게다가 졸리기도 하고요. 본래 한밤에 깨어있어야 하는데 괜히 낮에 깨어있느라 너무 졸리거든요.”
“후후후, 잘 자.”
박인하의 인사를 들으며 오무는 본래의 형태인 가면으로 돌아가 방 한 구석에 조용히 자리해 잠에 빠졌다. 그리고 별 역시 이만 나가고자 했지만 자신의 침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바라보는 박인하의 시선에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전 이만 가봐야 해서……. 일을 해야…….”
“언니의 주인은 나야. 아, 물론 아버지가 주인이긴 하지만 언닌 내 몸종이잖아? 그러니 누구 말을 들어야 할까?”
묘하게 강압적인 그 말에 별은 다시 딱딱한 자세로 침대에 드러누울 수밖에 없었다. 박인하는 자신의 옆에 누운 별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대어 속삭였다.
“그동안 무슨 일 없었어? 부유수 댁 장남이 오고 간 거 말고.”
박인하의 숨결에 귀가 간지러운 걸 간신히 참으며 별이 대답했다.
“아, 저, 저기……, 그,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아, 없었어.”
“그래……? 시시해.”
별의 대답에 박인하는 실망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기운이 빠져서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박인하가 걱정되어 별은 슬쩍 그녀를 보았다. 어느새 잠에 빠진 박인하는 잠고대를 하고 있었다.
“무대는 준비했어……. 이제 남은 건…….”
그 무대란 것이 무엇일지 궁금한 별이었지만 동시에 불길한 예감이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