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은 민수의 첫 출근이었다.
자리에 앉기도 전이었다.
민수는 총독부 별관 지하로 안내되었다.
귀국과 동시에 경험한 모든 일들이 신기한 체험의 연속이기는 했다.
열차안의 풍경
난영과의 만남
한청년의 연행
총독부의 환영
명월관의 잔치
양아치와 대치
성추행범 검거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이날의 경험과는 비교될 수 없었다.
그가 안내되어 들어간 심문실에는 영철이 잡혀 있었다.
어제의 그 양아치였다.
자신과 대치하며 칼을 뽑던
아녀자를 겁탈하려던 바로 그.
양손과 양발이 벌어진 채로 묶여있었다.
그의 자세나 표정으로 보아 한두 번 잡혀온 게 아닌 거 같았다.
모든 절차도 다 알고 있다는 듯
하지만 그는 몰랐다.
일반 경찰서와 다르다는 걸
그리고 경무국장의 성향을
민수가 들어서자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범석과 현호 그리고 다른 직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어둠의 한 구석에서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간신히 윤곽만 짐작할 수 있는 정도였다.
국장이었다.
민수가 들어오자 마치 모든 절차가 마무리 되었다는 듯 분위기가 숙연했다.
어둠 속의 국장이 담뱃불을 비벼 껐다.
그리고 들리는 둔탁한 소리.
탁! 탁! 탁!
국장이 지휘봉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세 번 두드렸다.
민수는 일종의 습관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신호였다.
이를 본 범석이 마치 작전을 개시하라는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하들을 향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신호로 부하직원이 영철의 바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민수는 뭐가 뭔지 감을 잡지 못했다.
하지만 형사계의 현호는 사태가 어찌 진행되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나서서 국장에게 항의를 했다.
‘고등계가 나설 일이 아니잖습니까?’
국장은 같지도 않다는 듯 범석에게 진행을 하라며 손짓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겠다고 결심하던 현호는 소리를 높였다.
‘저희 형사계의 관할입니다.’
바지를 벗기던 직원들이 모두 동작을 멈췄다.
모두가 놀랐지만 특히 민수에게는 충격적이기 까지 했다.
일본 사회에서는 이런 항명을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감히 어떻게 일개 직원이 국장의 지시를
그것도 여긴 경무국이 아닌가?
가장 규율이 잘 잡히고 질서가 바로 서야하는 곳.
미개한 조선인의 개화에 몸으로 앞장 서야하는 곳.
민수만 그리 생각하는 것은 아닌 거 같았다.
찬물을 끼얹은 썰렁한 분위기가 지하실을 휘감았다.
국장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언가 벌어질 것만 같은 긴장감에 숨이 멋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국장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자네가 자를 텐가?’
현호에게 국장이 단도를 내밀었다.
부드러운 국장의 말에 현호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완전히 얼어붙은 자는 그 말고도 또 있었다.
동네 양아치도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그리고는 완전히 겁에 질렸다.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뭐?’
‘잘라?’
‘어디를?’
길고 긴 침묵이 심문실에 흘렀다.
두려움과 함께
공포에 질린 영철이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그가 지른 소리는 같은 단어의 반복이었다.
할 수없이 범석이 나섰다.
그는 영철에게 부드럽게 타일렀다.
‘조용해! 금방 알게 돼.’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영철의 발작을 불러왔다.
발작과 동시에 절규가 지하실 전체를 흔들었다.
처절한 절규였다.
그의 연기는 훌륭했다.
그가 정말 불쌍해 보였다.
사실 연기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는 진지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동네 양아치가 개과천선을 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정말 효과적인 시스템이었다.
그는 진짜 착하게 살겠다고 각오하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러한 각오와 다짐은 통계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특히 성범죄의 재범률은 높다.
성범죄자가 입으로 뭐라고 떠들든 아무런 의미가 없는 메아리일 뿐이었다.
내용 여하를 떠나서 소음의 일종이었다.
어떤 성범죄자도 걸리질 않아 그럴 뿐이다.
성범죄를 저지른 자가 개과천선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백에 하나?
혹은 천에 하나?
문제는 지하실의 모든 구성원이 그리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수많은 사례들을 보아왔다.
사건들을 경험했다.
훈방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훈방 대상자는 영철처럼 착하게 살겠다고 절규하는 자들이었다.
당연히 연기력도 뒷받침 되어야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재발이 발각되든 아니든
그들의 재범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최소한으로 말해도 언제 또 재발될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시간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 리스크는 결국 여인들의 몫이었다.
죄 없는 여인들
그의 다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도 직감한 것 같았다.
그는 전략을 바꿨다.
다시 강도를 높이기로 했다.
그리고 다짐이나 각오보다는 맹세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온갖 맹세를 해대기 시작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주변의 모든 사람을 다 끌어댔다.
그러한 발작에 직원들은 아주 익숙해 보였다.
모든 직원들은 그의 발작이 지칠 때까지 그저 한 발짝 물러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
마치 낚시에 물린 고기가 지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들에게 있어서 그의 발작은 그저 흔히 있는 절차일 뿐이었다.
다신 안 그러겠다고 맹세를 해대는 것은 좋았다.
하늘에 대고 맹세하고
태양에 대고 맹세하고
나중에는 어머니까지 끌어들였다.
분명 거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나중에는 아주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분명 그는 이성을 잃었다.
그 절박함이 이성을 잃게 만들었거나
그는 맹세에 천황 폐하까지 끌어들이고 말았다.
‘천황폐하의 목숨을 걸고 맹세해!’
분명 그 거는 안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감히 그 분을 끌어들이다니.
범석의 안색이 완전히 변해버렸다.
그의 부하들도 선을 넘은 것을 알았다.
범석은 그저 끄덕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심문실 내의 누구라도 그게 어서 속히 시행하라는 지시로 보였을 것이다.
영철에게도 그리 보였다.
그는 범석의 고개를 보자마자 경련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더욱 더 처절한 절규를 쏟아냈다.
‘저얼대 저얼대 안 그런다고!’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직원들은 영철을 완전히 제압했다.
손가락 하나 스스로 움직이지 못했다.
범석이 칼을 들었다.
곧이어 이어지는 고통의 처절한 신음소리.
찢어지는 비명이 총독부 청사 전체를 울렸다.
분위기는 숙연했다.
일처리는 능숙했다.
직원들은 침착했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다.
민수에겐 그리 보였다.
민수는 이 흥미로운 광경을 끝까지 지켜봤다.
그리고 국장은 그러한 민수를 샅샅이 지켜봤다.
국장은 민수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충격을 받았나?’
그리고 민수의 반응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아닙니다.’
‘그래?’
‘범죄자를 강하게 처벌할수록 결국 그것이 선량한 시민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국장은 분명 그의 답변이 마음에 들었다.
그의 질문은 점점 짓궂어 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조선인이 아닌가?’
‘그게 조선인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지인이든 반도인이든 범죄자는 처벌받아야 하고 특히 성범죄자들은 냉혹한 처벌을 받아 마땅하지 않습니까?’
국장에게 민수의 대답은 의외였을 것이다.
그는 매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기특하다는 듯 민수를 칭찬했다.
‘제대로 배웠군.’
‘특히 성범죄자들은 절대 교화가 되지 않습니다.’
국장이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 역시 자네 말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네.’
하지만 이 말에 이의라도 있듯 현호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자넨 인권이니 법절차니 하는 것은 배우지 못한 건가?’
‘사적인 처벌로 말하면 조선시대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판을 쳤고 총독부의 이러한 사적 처벌은 결국 백성을 보호하려함이 아니겠습니까?’
국장은 완전히 민수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현호를 꾸짖었다.
‘너는 그 따위 사고를 가지고 있기에 모든 일처리가 그 모양 그 꼴이야?’
현호는 찌그러졌다.
국장이 그를 대하는 건 조금 심했다.
민수에겐 그리 보였다.
더군다나 국장은 거기에서 현호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사건을 입에 담았다.
총독 사택 절도 사건에 대해서였다.
어떤 간 큰 인간들이 총독의 사택을 턴 것이다.
돈이나 패물이 없어진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당연히 돈이나 패물도 많았을 것이다.
돌아다니는 말들은 엄청나게 과장 되었지만
그 액수는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천황 폐하의 하사품인 보검이 없어진 것이었다.
총독은 길길이 날 뛰었다.
형사계는 휘하 경찰서의 인원을 총동원 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오리무중이었다.
현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국장이 자리에서 나가버렸다.
직원들도 하나 둘 모두 자리를 비웠다.
그 사이 의사와 간호원들이 의료도구를 가지고 들어왔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한 현호는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화가 난 그는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민수는 그를 위로하려 했다.
하지만 섣부른 위로가 위로가 될 상황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