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에게는 한 가지 습관이 있었다.
그는 총독부에서 퇴근만 하면 바로 조선호텔로 향했다.
사령관의 처와 내연의 관계였던 것이다.
하시모토가 먼저 조선으로 부임하고
일본에서 짐 정리를 하던 미나미는 조선어를 배우려했다.
마침 동경제대 학생 중에 유망한 엘리트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조선어 공부에 몰입했다.
모든 영역에서의 조선어 공부에
미나미가 먼저 조선으로 가야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재회했다.
그리고 다시 조선어 공부에 몰입했다.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이러한 그들을 습관처럼 그를 미행하던 자가 있었다.
형사계의 현호는 이를 엿보면서 항상 침을 흘리고 있었다.
입맛을 다시곤 했다.
물론 그를 미행하는 자들은 현호만이 아니었다.
정체모를 자들 역시 민수의 뒤를 밟으며 생활패턴을 캐고 있었다.
마치 시곗바늘 같이 정확한 민수의 조선호텔 행에 그들은 시계를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확인되면 임무는 완성이었다.
이제는 돌아가 보고서를 작성할 차례였다.
하지만 오늘의 지대원은 자리를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그녀의 눈빛에서 경멸과 원망의 불길이 타올랐다.
개만도 못한 놈이었다.
더러운 놈이었다.
남자라는 동물이 어떻다는 것을 모르는 처지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어떤 여성보다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아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또 있었다.
어느 새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인물이었다.
이미 모든 게 과거인 자였다.
다 잊기로 한 놈이었다.
오히려 세상이 바뀌면 자신의 손으로 처단하려던 새끼였다.
그런데?
웬 눈물?
현식은 멀리 떨어져 난영을 지켜봤다.
민수의 미행 임무가 어려운 임무는 아니다.
위험하지도 않다.
하지만 항상 지대원의 작전에는 뒤에서 보조하며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어 있었다.
더구나 난영처럼 중요한 요원에게는
모두가 퇴근하고 민수는 처음으로 당직이라는 걸 해보게 되었다.
말이 당직이지 그저 자리를 지키는 거였다.
모두가 퇴근하면 당직실에서 청사를 지키는 거였다.
총독부에서는 도박을 엄격히 금했다.
조선인들의 가장 많은 범죄가 바로 도박죄였다.
하지만 총독부 청사에서조차 그 문제의 도박은 근절되지 않았다.
근절 될 수 없었다.
민수는 이런 모습이 보기 싫었다.
하지마라는 도박을 왜 하는 건지.
고스톱이 절정에 이르자
모두가 빠져들었다.
그럴수록 민수는 따분했다.
처음에는 지켜보았지만 대체 저게 무슨 재미인가?
따분해질수록 미나미가 보고 싶어졌다.
민수는 용기를 냈다.
당직 중임에도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고스톱에 빠져들던 부하들은 두 말도 않고 그러시라고 했다.
아무 걱정 말고 일 보고 오시라고.
물론 민수가 자리를 비우자 그들은 뒤에서 수근 거렸다.
이제 그의 사생활을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민수는 당직임에도 호텔로 향했다.
오늘도 이를 확인한 정체모를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분위기가 수상했다.
그저 지켜만 보는 게 아니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 정체모를 자들의 수가 하나 둘 늘어났다.
그리고 모의를 하더니 곧 결론에 다다랐다.
결의를 마쳤다.
이들은 바로 막중한 임무를 띠고 국내로 잠입해 있던 광복군 1지대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민수가 자리를 비우는 틈을 타서 총독부 청사 침입을 시도했다.
민수가 자리를 비우자 고스톱은 더욱 열기를 더해갔다.
열정적으로 빠져들기 시작하는 직원들.
도박 삼매경에 빠진 그들은 누가 가는지 오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지대원들이 총독부 앞으로 모였다.
그리고 지대장 학규가 건물 안의 어딘가를 가리켰다.
3층에 자리한 주둔군 사령관실이었다.
하지만 광복군이라 해서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고 있는 1지대원이라 해서
모두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대원들 가운데 누군가가 남몰래 슬쩍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작전을 수행 중에
그것도 최고도의 기밀에 속하는 작전
일부러 대원들에게도 기습적으로 실시하는 작전에 고의로 이탈을 한 것이다.
이 대원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와 만나 접선을 했다.
그의 의도는 명확한 것이다.
이 배신자는 지대원들의 모의 사실을 알려준 것이었다.
이를 모르는 대원들은 자신들의 동료가 청사에 침투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성공적인 임무 수행을 기원하면서
복면을 한 창훈은 청사 진입했다.
정문을 지나 고스톱에 정신없는 당직실 앞을 기었다.
당직실을 통과한 후 2층 그리고 3층으로 올라갔다.
총독부 청사의 밖에서 이를 지켜보는 대원들은 마른 침을 삼켰다.
3층의 방 하나에 흐릿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표인 사령관실이었다.
주둔군사령부는 용산에 있었다.
하지만 총독은 청사 안에도 자리를 마련해 줬다.
상호 간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초조하게 이를 바라보는 대원들.
본인이 침투한 것보다 더 긴장이 됐다.
본인이라면 상황이라도 알 것이다.
진행이 되고 있는지
어디까지 왔는지
얼마나 걸리는지
혹은 최악의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게 무엇인지는 알 것이다.
기다리는 이들
바라만 보는 이들
기도 밖에는 달리 할 수가 없는 이들에게는 이런 눈에 보이는 상황이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정지된 것만 같았다.
그래도 모든 상황에 끝은 있는 법.
마침 흐릿한 불빛이 꺼졌다.
마침 임무를 완성한 것인가?
상황은 종료된 것인가?
대원들이 기대의 눈빛을 교환했다.
어서 속히 나오기만을 바랄 단계였다.
기다리는 대원들의 손에 땀이 흘렀다.
분명히 잘 된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아니 반드시 그런 것만 같았다.
모두가 그렇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러한 그들의 기대도 잠시.
기대는 실망으로 급변했다.
곧이어 환하게 켜지는 사령관실 내부의 불빛.
그리고 총독부 청사 3층 전체에 불이 켜졌다.
더 나아가 총독부 청사 전체에 불이 들어오고 급기야는 청사 외부의 등들도 모두 불이 켜졌다.
그리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청사를 포위하는 경찰과 군인들.
사태는 명확했다.
대원들은 조용히 그리고 빨리 자리를 빠져나왔다.
민수는 상황을 알 리가 없었다.
아니 알 수가 없었다.
그의 귀국은 확실히 드라마틱했다.
하지만 드라마의 절정이 오래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제 그의 흥미를 끄는 일은
그가 관심을 가지는 일은 오직 하나였다.
그 흥미와 관심은 업무 시간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퇴근 후의 일정일 뿐이었다.
오늘이 바로 그랬다.
아니 오늘이 조금 심했다.
전혀 상황을 모르고 희희낙락 청사로 돌아오는 민수.
신기하다는 듯 경찰과 군인들을 쳐다보았다.
경찰과 군인들이 청사를 에워싸는 건 본 일이 없었다.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처음에는 사건인 줄도 몰랐다.
오늘도 그냥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날벼락이었다.
국장의 날벼락이었다.
‘정식 임명도 되지 않은 시보 주제에 벌써 사고를 치다니!’
국장은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제야 민수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자신이 당직 중에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의 무단이탈을 기다려 범죄를 계획했다.
괴한이 침입한 것이다.
‘감히 어떤 놈이 총독부 청사를?’
하지만 중요한 건 어떤 놈이 아니었다.
정작 중요한 건 왜였다.
대체 왜?
지하의 심문실에서는 현호가 착한 경찰 역을 맡으며 침입자 창훈을 달래고 있었다.
많이 써 먹은 방법인지 현호의 연기는 능숙했다.
그리고 그의 레파토리는 항상 반복되다 못해 지겨울 정도였다.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조선인인데 왜 그 심정을 모르겠나?’
‘그런데 대체 왜 여기에는 들어온 거냐?’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고 책임자는 누구냐?’
하지만 그의 친절은 씨도 먹히지 않았다.
창훈은 입도 떼지 않았다.
현호가 달래면 달랠수록 창훈의 증오만 키울 뿐이었다.
그의 친절이 거절된 것이 분명했다.
지켜보던 범석이 천천히 일어났다.
나쁜 경찰 범석이 임무를 수행할 차례였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평범한 나쁜 경찰이 아니었다.
고문에 거의 한계가 없던 시절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고등계의 나쁜 경찰이었다.
창훈은 조선인이었다.
그것도 감히 대역죄를 범한
총독부에 잠입해 군의 작전 서류를 빼내려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범석이 임무를 수행하려 준비하는 동안
옆방에서 지켜보던 부하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를 끌고 나갔다.
그리고 복도 끝으로 끌고 갔다.
공포의 1호실 팻말이 보였다.
창훈 역시 1호실의 이야기는 들은 것이 분명하다.
팻말만 보고도 공포에 떨었다.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창훈도 역시 저항해 보았다.
저항이 아무 의미 없다는 것도 모를 리 없었다.
그가 저항한다고 임무 수행에 변경이 있을 리는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본능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서 말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혹은 이성이 뭐라고 한다 해서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범석은 이렇게 끌려가는 창훈을 끝까지 지켜봤다.
그러는 사이 고등계 형사들이 저항하는 창훈을 끌고 1호실로 들어갔다.
민수는 그들을 따라 1호실로 향했다.
그러한 민수를 현호가 말렸다.
구태여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며.
하지만 민수는 고개를 저었다.
공포나 두려움 혹은 불쾌감도 있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호기심을 누를 수는 없었다.
무엇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었다.
자신이 수행해야 할 임무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다.
자신이 어떤 부서에서
어떤 임무를 맡던지 간에
총독부의 모든 업무는
대일본제국의 모든 임무는
그가 반드시 알아야 하고 또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1호실의 고문 기구들은 끔찍한 것들이었다.
보기에만도 공포심을 일으켰다.
난생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민수도 몸이 경직되었다.
민수는 이미 거세 장면도 목격했다.
하지만 이자에게 가하는 고문을 성폭력범에게 가하는 처벌과 비교를 할 수는 없었다.
별다른 절차는 없었다.
창훈은 이미 협조를 거절했다.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했다.
거기에 더 이상의 회유와 질문은 시간 낭비였다.
적어도 범석은 그리 생각했다.
지하실을 울리는 비명소리.
처절한 절규.
온 몸이 일으키는 경련.
인간으로 차마 할 수 없는 짓이었다.
1호실에 대한 명성은 조금도 틀린 것이 없었다.
실제 살아나간 사람이 얼마나 되었는지
얼마나 죽었는지
혹은 얼마나 불구가 됐는지
이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건 그저 숫자였다.
일단 여기에 들어온 순간
이미 1호실에 발을 디딘 이상
창훈은 이미 죽은 것이다.
이미 사형을 받은 것이다.
재판은 없었다.
선고 없는 처형이었다.
아무리 그가 살아나간들
아무리 그가 불구 신세를 면한들
그가 어찌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참관만 하던 민수도 엄청나게 놀랐다.
그는 철저히 참관자의 입장에서 보기만 했다.
그럼에도 그는 완전히 충격을 받았다.
당사자의 입장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자신이 이 고문대에 앉아 있다는 것은
여기에 누워 있다는 것은
그럼에도 민수는 묵묵히 고문을 지켜봤다.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세세하게 살펴봤다.
자신의 생각이 들키지 않으려 표정관리에 극도의 신경을 썼다.
자신의 충격이 크면 클수록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그러한 민수를 살피던 국장이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물었다.
‘어떤가?’
같이 있던 현호도 온 몸이 얼어붙었다.
하지만 국장의 질문에는 옆에 있는 민수를 쳐다보며 그를 비웃었다.
그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리를 뜨려했다.
자신의 임무는 마쳤다는 듯 1호실을 나가려했다.
하지만 국장의 질문에 대한 민수 답변은 놀라운 것이었다.
현호 뿐 아니라 주변의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문고리를 잡고 자리를 뜨려던 현호가 민수를 돌아보았다.
‘저도 고등결찰이 되고 싶습니다.’
국장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고문을 지휘하던 범석이 고개를 돌렸다.
국장과 범석이 눈빛을 마주쳤다.
범상치 않은 텔레파시가 오고갔다.
1호실은 정말 다이나믹한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