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부의 민수가 들어와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와중에도 근배는 총독부 놈들의 욕을 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난영은 근배가 싫었다.
어떤 여자도 말 많은 남자 좋아하는 여자는 없다.
특히 난영이 그러했다.
‘근데 넌 현식의 체포를 어떻게 알았어?’
근배는 당황했다.
그 사이 현식이 옆자리 앉은 민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연히 현식은 민수를 알아보았다.
그의 귀국도 들었고
그를 미행도 했었고
그의 습관도 보았다
그도 현식을 보았다.
‘아니 너는?’
민수 역시 현식을 알아보았다.
많은 세월이 지났다.
그렇다고 얼굴이 변한 거 같지는 않았다.
현식은 함박웃음을 띠고 있었다.
민수는 너무나도 반가웠다.
귀국을 했고
취직도 했고
성공도 했지만
금의환양이었지만
아무도 축하해 줄 사람이 없었다.
진정한 친구
그냥 영혼 없이 떠들어대거나
이해관계에 술을 사주거나
친일파 놈들이 벌여주는 잔치 말고
민수는 반가움에 두 팔을 벌렸다.
현식이 그에 응하는 것은 당연했다.
함박웃음도 여전했다.
그래도 현식은 오바하지 않았다.
말도 적었다.
술잔만 권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게 민수에게 문제될 리는 없었다.
이제 한성 바닥에서 민수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얼굴은 몰라도
그의 이름은 다 안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고
오랜 시간 인구에 회자됐다.
아직도 그러했다.
그런 민수를 현식이 그를 소개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근배는 꽁무니를 뺀 상태였다.
현식은 난영에게 민수를 인사시키려 했다.
하지만 난영은 냉정했다.
그저 끄덕일 뿐 전혀 감흥이 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사무적이었다.
민수 같은 건 전혀 안중에 없다는 듯 현식의 귀에다 조용히 속삭일 뿐이었다.
‘지대장이 기다려’
그녀가 맞았다.
유치장을 나오고 상황도 보고하지 못했다.
현식이 민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다음에는 반드시 한잔하자면서.
민수는 그를 놓지 않으려 했다.
자신과 한잔 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게 어디에 있다는 건가?
다음에 꼭 한잔 하자며 현식이 일어섰다.
‘그럼 연락처라도’
현식이 웃었다.
자신이 찾아 가겠다고
민수가 연락처를 적어주려 했다.
아직은 명함이 없었다.
그는 시보였다.
현식이 이번에도 웃었다.
그저 고개를 저었다.
당연했다.
그의 연락처는 필요 없었다.
그렇게 현식이 사라졌다.
난영만 남겨놓은 채.
민수가 수작을 걸려고 난영에게 다가앉았다.
머리를 다시 다듬고
목소리도 다듬고
그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난영이 말을 꺼냈다.
‘한잔 할까요?’
민수는 난영의 제안에 감격했다.
아니 이게 웬일인가?
자신이 접근하려는 그녀가 먼저 접근을 해오다니.
고국에서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았다.
그녀가 웃옷을 집어 들었다.
여기에서가 아니었다.
자리를 옮기자는 것이었다.
기대가 만땅이었다.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현식의 함박웃음이 그에게 전염됐다.
난영이 화장실을 간 사이
기분 좋은 민수가 먼저 나와 골목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거기에는 영철이 민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수를 벼르고 있었다.
자신을 붙잡아서 거세하게 만든 민수에 대한 복수를
처음에는 몰라봤다.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영철이 칼을 뽑았다.
확실했다.
그였다.
이번에는 어림없다며 단단히 각오를 다진 영철이었다.
이번에는 진짜 큰 일 난 거 같았다.
그렇다고 도망갈 순 없었다.
난영과의 한잔이 기다리고 있었다.
분위기에 따라서는 1차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기대를 접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영철이 칼을 휘둘렀다.
간신히 피했다.
어찌 피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정신이 없었다.
말로 하자고 하고 싶었다.
법으로
하지만 통할 거 같지가 않았다.
사실은 말도 나오지를 않았다.
목구멍에서 말이 통과하지를 않았다.
그런데 이때
꽝!
커다란 소리였다.
모두가 동작을 멈췄다.
시선이 문으로 집중됐다.
난영이 문을 닫는 소리였다.
당연히 일부러 크게 닫았다.
그녀는 영철을 노려보지 않았다.
아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냥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아주 엄숙하게
너무나 멋있었다.
민수에겐 그녀의 새로운 매력이었다.
민수가 남자라면 난영에게 당장 빠져들 것이었다.
하지만 난영은 여자였다.
자신의 보호를 받아야 할.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민수는 어쩔 줄을 몰랐다.
분명 그녀를 보호해야 했다.
하지만 이놈은 아주 나쁜 놈 같았다.
잘못하다간 둘 다 변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건 현명한 처사가 되지 못했다.
자신은 아직도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
민수의 머리가 회전의 RPM을 높이고 있는 동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영철은 그녀가 누군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녀도 영철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액션을 먼저 취한 것은 영철이었다.
민수는 아직 결론을 내지 못한 단계였다.
영철은 잽싸게 꼬리를 내렸다.
그리고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며 사라졌다.
그리고 아주 줄행랑을 쳤다.
이상한 일이었다.
민수에게는 그랬다.
하지만 난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냥 앞장서서 길을 걸어갔다.
민수는 그저 절레절레 고개만 저어댔다.
모든 게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자신의 귀국과 동시에 마치 대기하고 있었다는 듯 신비한 체험들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광복군도 의문은 있었다.
민수를 타겟으로 했지만
과연 그를 믿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문제는 방법이 없었다.
임정과 광복군 수뇌부가 요구한 정보 수집은 장벽에 가로막혀 있었다.
더구나 창훈의 잠입 탈취가 실패한 후에는 경비가 더욱 삼엄해졌다.
재차 탈취를 시도한다는 건 무모한 자살일 뿐이었다.
민수 외엔 대안이 보이지 않았다.
누가 봐도 여자를 밝히는 민수였다.
난영이라면 그를 요리하는 건 쉬워보였다.
미나미가 매력적인 건 맞았다.
그녀가 대단한 자의 여자라는 거 말고도
그녀 자체가 미인이었다.
고급 옷으로 잔뜩 치장했으니 남성의 마음을 빼앗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는 유부녀다.
나이도 많았다.
그에 비해 난영은...
앞장서던 난영은 여인숙 골목으로 들어섰다.
민수는 너무 놀랐다.
물론 싫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너무 서두르는 건 재미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갑자기 민수의 뼛속부터 흐르는 양반의 예의범절이 흘러나왔다.
아니 그가 갈고 닦은 신문명의 신사도가 진가를 발휘했다.
민수가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조용히 난영을 타일렀다.
‘아니 우선은 한잔하고 그 다음에’
민수의 말에 난영은 반응이 없었다.
그저 앞서 안내만 할 뿐이었다.
정말 웃긴 놈이었다.
이미 실망은 할대로 했다.
더 이상 바랄 바는 없었다.
정말 쉬운 작자였다.
이런 한심한 놈을...
그녀는 어디 미리 장소를 정해둔 것 같았다.
이럴 땐 모르는 척 따라가 주는 것도 예의일 거 같았다.
마음 한구석은 기대에 부풀어 올랐다.
확실히 진도가 너무 빠른 거 같았다.
조선의 문화가 이런 것인가?
자신은 잘 몰랐다.
조선에선 경험도 없었다.
하지만 문화가 그렇다면 할 수 없었다.
조선의 문화가 그리 나쁜 거 같지도 않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훌륭한 문화일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