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는 갑자기 그 조선의 문화체험이 몹시 기대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골목을 돌자마자 그의 기대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너무도 허무했다.
광복군들이 몽둥이를 들고 그를 기다렸던 것이다.
민수는 저항을 해보려 했다.
하지만 자신은 문관이지 무관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저항을 포기했다.
순순히 그들에게 끌려갔다.
그는 난영을 쳐다봤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술집 문을 열고 고개를 숙이던 그녀의 자태는 아니었다.
잔뜩 폼을 잡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던
너무도 멋있고 매력적이던
지금은 그저 풀죽은 여인이었다.
잘못을 아는 건지
선택에 자신이 없는 건지
그런 자신에게 실망한 건지
그녀의 심리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떨궜다.
난영의 유인에 걸려 끌려온 지하실.
거기에는 그보다 먼저 끌려온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몰랐다.
하지만 그가 누군지는 알았다.
그는 총독부 경무국의 순사였다.
법석의 부하 직원
바로 영철의 거세에 직접 가담했던 자였다.
민수를 그의 옆에 묶었다.
부하 직원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민수는 기겁했다.
어찌 이런 일이?
어찌 감히 천황폐하의 충실한 부하에게 이런 짓을?
어찌 이런 천인공노할 일을?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진짜 놀라운 일은 이제 시작이었다.
지금까진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자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난영은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 옆에 근배가 보였다.
현식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사람이 두 명 더 있었다.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근배가 칼을 갈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였다.
민수가 들어오기 전부터
다만 이제 들리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설마?
온갖 나쁜 시나리오들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설마?
최악의 시나리오가 머리를 스쳐갔다.
설마?
그러는 동안 근배가 칼갈이를 마친 거 같았다.
소리가 멈추더니 칼끝을 조사했다.
끝을 만져보던 그가 미소 지었다.
만족스런 모습이었다.
만족스럽다니 다행이었다.
그가 생각하던 최악의 시나리오만 아니라면
하지만 아니었다.
그건 분명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도저히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다.
인간으로 상상도 못할 짓이었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근배가 서있던 두 명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두 명이 직원의 바지를 벗겼다.
‘안 돼!’
저항은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묶인 그가 어쩔 방법은 없었다.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민수의 시선이 난영을 향했다.
그녀는 민수의 시선을 철저히 외면했다.
동료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분명했다.
그녀에게 기대할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민수가 근배를 상대로 소리를 질렀다.
‘안 돼!’
근배의 비웃음이 지하를 가득 채웠다.
‘왜?’
그가 영철을 해한 것은 조선인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체벌은 반일운동과는 거리 멀었다.
그는 단순히 성범죄자를 처벌했을 뿐이었다.
근배는 다시 비웃었다.
말싸움을 할 필요는 없었다.
자신은 임무 수행 중이었다.
이것은 거대한 임무의 일부분이었다.
민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근배도 말조심에 대한 주의를 들었다.
그도 그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 건방진 놈을 떠들도록 둘 수는 없었다.
근배가 다가왔다.
그리고 칼을 들었다.
민수의 얼굴에 대었다.
안 되는 일이었다.
자신은 조선 최대의 킹 카였다.
이런 킹 카의 얼굴에 칼을 대다니
죽으면 죽었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죽이라고 하고 싶었다.
물론 말이 목구멍을 넘지는 못했다.
대신 말이 근배의 목구멍을 넘었다.
‘조금만 기다려’
‘니 차례는 다음이야’
뭐?
왜?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정말 나는 구경 밖에 안 했는데?
수많은 항변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역시 목구멍을 넘지는 못했다.
민수의 시선이 다시 난영을 향했다.
그녀도 그를 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난영의 눈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난영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민수도 다 알았다.
저 눈빛이 분명 존경의 눈빛은 아니라는 걸
사랑의 눈빛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그녀에게 기대할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그녀의 눈빛에 대한 평가를 마무리 할 즈음
어마어마한 비명 소리가 지하실을 뒤흔들고 있었다.
근배가 직원에게 칼을 댄 것이었다.
처절한 외침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민수의 정신이 번뜩 들었다.
진짜 장난이 아니었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진행되고 있었다.
직원은 쉬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고통의 신음이었다.
그의 비명이
그의 절규가
고통의 신음이
민수의 마음을
민수의 가슴을 후벼 파고 있었다.
송곳으로 찌르고 있었다.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손과 발이 떨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기대할 건 없었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시선은 그녀를 향했다.
민수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병원으로 데려가야 해’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근배는 손의 피를 닦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대로 두면 죽어!’
근배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리고 같지 않다는 듯 손에 묻은 피를 구석구석 닦아냈다.
‘이 미개한 조센징들아!’
갑자기 지하실이 조용해졌다.
고요했다.
반응은 획기적이었다.
엄청난 반응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일을 저지르고야 사태를 깨닫는 경우가 있다.
민수의 경우가 그러했다.
지금까지 듣는 둥 마는 둥하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순식간이었다.
뜨거운 반응이었다.
당연히 눈빛의 질은 좋지 않았다.
‘사람이 죽는다고?’
거기까지는 기세가 좋았다.
기백이 넘쳤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목소리는 점점 쪼그라들었다.
근배 놈의 살기등등한 눈빛 때문이었다.
‘살인을 하면 나쁘잖아?’
그의 고개도 땅으로 떨구었다.
‘살인죄는 형이 무거워’
신음은 끝나지 않았다.
흐르는 피도 멈추지 않았다.
끔찍한 현장이었다.
대체 뭐하는 자들인가?
생각이 있는 건가?
당연히 이들도 생각이 있었다.
총독부와 다른 것이 있었다면
총독부는 의사를 부른 반면
이들은 근본적으로 고통을 없애주었다.
근배가 다시 칼을 쥐었다.
그리고 거세한 윗부분에 칼을 찔렀다.
복부의 정통이었다.
이번에는 피가 흐르지 않았다.
피가 튀었다.
콸콸 넘치고 있었다.
부하 직원의 피가 넘쳐 민수의 발을 적셨다.
근배는 자랑스럽게 외쳤다.
일파 놈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 보라며.
주변을 돌아보며 자신의 손의 피를 다시 닦았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두가 알아줬으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두 사람은 근배의 등을 두드렸다.
하지만 난영은 시선을 외면했다.
그러더니 민수를 향했다.
그를 노려보았다.
그를 쏘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