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인 말이었다.
실제로 그는 감명을 받았다.
다만 민수는 예전의 민수가 아니었다.
그의 마음속엔 다른 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예전의 민수가 아닌 민수는 고민에 빠졌다.
생각에 잠겨 호텔을 나오는 동안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날아다녔다.
생각들이 머릿속을 날아다니는 동안
정작 난영이 그토록 찾던 현식은 정작 호텔 앞에 있었다.
민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토록 기다리던 민수는 그를 보고도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쳐 버렸다.
현식이 그를 붙잡고야 비로소 그를 알아봤다.
‘아니 니가 여길 어떻게?’
현식은 술잔이 나오기도 전에 하소연을 시작했다.
‘내가 무슨 첩자야?’
그는 진짜 억울했다.
하지만 진짜 놀란 것은 민수였다.
그는 현식의 그 한마디에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광복군 내의 첩자 색출작전에 대한 공작은 사실 민수의 작품이었다.
어제 국장실에서 민수는 좋은 기회를 잡았다.
자신의 고등경찰로서의 능력과 자질에 대한 평가를 어필할.
‘만일 조직 내에 저희 사람이 있다면’
범석에 대한 국장의 태도를 보고 첩자 침투를 확신한 민수는
그 첩자가 자리를 잡고 자신의 정적을 제거할 공작 방안을 제안했다.
당연히 그 공작 방안은 근배가 학규를 만나 제안한 그 공작이었다.
그리고 그 제안에 엉뚱한 자가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자신의 유일한 절친 현식이.
이제 근배가 총독부 내의 우리 사람인 것은 틀림없었다.
그 라인이 현호의 라인인 것도 분명해졌다.
그가 첩자색출공작에서 선수를 친 것이었다.
현식 역시 근배에 대한 의혹을 지우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근배의 수상함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문제는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도주까지 한 상황이 아닌가?
민수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 사람을 보호한다는 것이 친구를 잡는 꼴이 되고 말다니.
그들이 술을 나누는 곳은 조선호텔 건너편이었다.
그리고 민수와 현식의 건너편 테이블에는 현호가 앉아 있었다.
당연히 그는 이들을 볼 수 없는 구조였다.
아니 다른 곳을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늘도 나쁜 짓을 한 건 한 현호는
그래서 모든 것이 흡족한 현호는
그저 만족한 표정 가득이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오늘 있던 자신의 포식을 음미하면서
그 때 그의 부하가 나타나 그에게 귓속말을 했다.
현호가 있는 술을 다 들이키고 부하를 따라 급히 나갔다.
화가 난 게 분명했다.
그런 현호의 악행을 현식도 알고 있었다.
민수도 현호의 실체에 의문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업무 특성상 광복군 내에 첩자를 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막상 현식 앞에서 훌륭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민수는 이해했다.
‘아주 나쁜 놈이야’
나쁜 놈이란 단어처럼 애매하고 다중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현호를 가리킬 때 그러했다.
민수는 끄덕였다.
아니 끄덕여줬다.
현식이 말한 나쁜 놈과 민수가 끄덕인 나쁜 놈은 다른 놈이었다.
‘저 친구 밑에서 술을 따르는 친구가 성민이란 친구야.’
민수가 현식이 가리키는 그들을 쳐다봤다.
민수도 성민을 알았다.
같은 직원이다 보니 서로가 다 아는 사이였다.
그는 현식의 친구이기도 했다.
현식도 보기보다 발이 넓었다.
그리고 세상은 좁았다.
한편 당연하기도 했다.
같은 민족 내에서 친일과 반일이 있었지만 둘은 얽히고설켰다.
그 둘의 구분이 정말 가능할까?
‘그자의 상관이라는 자가 어떤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알아?’
그자가 어떤 짓을 하고 다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짓을 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절친을 자신이 궁지로 아니 사지로 내몰았다.
민수는 한숨을 내쉬고 현식을 위로했다.
‘걱정마 다 잘 될 거야’
하지만 그의 위로가 현식에게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모든 대원들이 날 찾아.’
모든 이라는 단어가 민수를 자극시켰다.
그리고 사태를 전혀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갔다.
‘모든?’
‘그렇다니까?’
‘ 명단이 있어?’
‘당연하지. 지대장한테 그게 없으면 어떻게?’
당연했다.
지대장만큼은 모든 대원을 알고 있을 것이다.
대원은 대장을 모를지라도 대장이 대원을 모를 수는 없을 것이다.
현호는 화가 났다.
저기 멀리 나타난 근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다가가 귀 방망이를 날렸다.
근배는 단 한 대에 나가떨어졌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현호는 쓰러진 그에게 발길질을 시작했다.
인정사정이라고는 없었다.
현호에게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처사였다.
이자가 뒈지는 건 신경도 쓰지 않는다.
문제는 자신까지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다.
이것만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길거리에서 조금 들어간 곳으로 그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현호는 근배의 무릎을 꿇렸다.
이 병신이 현식이를 놓치다니!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어찌 되는 건지 이 병신은 알고나 있는 걸까?
현호의 힐난에 근배는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빨리 잡겠다는 다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물론 진심이었다.
그를 잡지 않으면 근배가 먼저 위태로워진다.
현식이 바보가 아닌 한 자신의 누명을 벗으려 동분서주하고 있을 것이다.
근배의 모략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근배가 타겟이 될 것이다.
진짜 다급한 건 누구보다 근배 자신이었다.
한편 난영은 현식을 찾아 서울 시내를 헤매며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우연히 현호와 근배의 만남을 목격했다.
현호는 무릎 꿇은 근배를 연신 쪼아댔다.
반면 근배는 너무도 고분고분하였다.
분명 그건 순사에게 잡힌 광복군의 모습이 아니었다.
수상해도 너무나 수상했다.
대체 왜 근배가 형사를?
그 때 난영의 머릿속에 지난 사건이 떠올랐다.
근배가 현식의 체포를 알고 항의하던 사건.
그래서 현식이 석방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대체 어떻게 현식의 체포를 알았던 걸까?
현호는 현식을 빨리 처리하라고 근배를 다그쳤다.
아니면 너와 나 둘 다 죽는 거라고.
그들 간에는 다그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멀리서 지켜보는 난영에게 이것은 그저 협박이었다.
근배는 일어서서 90도로 절을 하고 사라졌다.
이로서 그들 간의 관계는 명확해졌다.
근배가 사라지자 현호의 부하 성민이 절도범 하나를 끌고 왔다.
그리고 그에게서 빼앗은 장물들을 쏟아놓았다.
현금다발과 반지 목걸이 등이 쏟아져 내렸다.
현호는 장물들을 감상했다.
얼마나 가치가 있고 얼마를 받을 수 있을지.
그는 이 분야에 박식했다.
머리회전도 빨랐다.
얼마의 가치가 있는지 견적이 대번 나왔다.
짭짤한 수익이었다.
그 동안 성민은 절도범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완전히 쓰러질 때까지.
절도범이 쓰러지자 현호가 다가갔다.
절도범의 얼굴을 구둣발로 짓이겼다.
그리고 그 절도범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오늘만 봐준다. 또 걸리면 알지?’
현호가 짓이긴 구둣발을 치우자 절도범이 도망가려 했다.
그러나 성민이 그를 다시 붙잡았다.
그리고 귀싸대기를 날렸다.
절도범은 영문을 몰랐다.
‘다시 가 봐!’
그제서야 절도범이 현호에게 90도 인사를 했다.
불이 나게 사라졌다.
현호는 그의 인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서 장물들을 챙겨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