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호의 정보원은 길 건너의 사무실을 가리켰다.
‘확실해?’
그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했다.
현호가 성민에게 지시하자 동원된 동네 깡패들이 각목과 낫을 들고 사무실을 들이닥쳤다.
닥치는 대로 부시고 둘러엎고.
습격을 당한 일당들은 정신을 차릴 겨를이 없었다.
이성보단 본능이 앞 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럴 땐 하나가 도망가면 모두가 도망간다.
현호는 그들이 도망가도록 놔주었다.
아니 오히려 도주하는 것을 사주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목만은 놔줄 수가 없었다.
그의 도주만은 방관할 수가 없었다.
두목을 꿇어앉히고는 물건을 뒤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현금과 패물들.
그리고 가장 은밀히 숨겨진 금고.
현호가 두목의 얼굴에 칼을 들이댔다.
그가 접한 갈등은 아주 잠시였다.
결론은 하나 밖에 없었다.
그는 바로 금고를 열었다.
드디어 온갖 진귀한 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의 단계에서 그런 건 안 중요했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현호의 시선을 끄는 건 오직 하나였다.
현호가 그토록 찾던 총독의 보물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근배가 드디어 칼을 갖다 대자 민수는 입을 악물었다.
구차한 모습만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비록 민족반역자일 수는 있어도 치사하고 비열한 놈은 아니란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냥 그러고 싶었다.
본능이었다.
아니 모든 걸 포기했다.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절제절명의 순간.
하지만 구원은 전혀 의외의 곳에서 열렸다.
똑똑똑
노크 소리
이곳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원들 중에서도 극소수였다.
학규와 난영 구속 중인 창훈과 현식 그리고 근배.
그리고 한 둘?
그 외에는 없다.
그렇다면?
모두의 얼굴에 긴장감이 돌았다.
난영이 표정을 잡고는 누구냐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들어온 사람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정작 놀란 사람은 광복군들이 아니었다.
진정 놀란 사람은 바로 민수였다.
반면 1지대장 학규는 조금도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표정이었다.
근배만은 놀라움이 컸는지 조용히 얼굴을 가리고 꽁무니를 뺐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광복군의 아지트로 들어온 범석의 표정이었다.
그의 표정과 태도는 마치 자기 집에 들어온 거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터진 범석의 입.
‘둘이 잠간 이야기 좀 하겠네.’
난영이 두말도 않고 자리를 비워주었다.
학규 역시 범석의 등을 쳐주고는 문을 닫고 나가주었다.
그 어느 누구라도 범석이 광복군의 첩자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놀랐군.’
범석은 당연하다는 듯 민수의 묶인 줄을 풀어주었다.
‘때가 되어 반대의 경우가 된다 하더라도 상황은 마찬가지일 거야’
민수는 대꾸할 힘조차 없었다.
줄이 풀어지자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때가 되면 진짜 친일파들이 가장 열렬한 반일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 행세를 하게 될 거란 말이지.’
논리적으로 보면 말이 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민수의 뇌리 속에 방어기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무언가 뒤가 구린 작자들일수록 더 날뛰기 마련이었다.
진짜 반일세력들은 일본제국주의 앞에서 더 충성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들의 정체를 숨겨야만 했다.
바로 이 앞에 범석이란 놈이 태연하게 술병을 찾고 있었다.
맞았다.
만일 때가 되면 켕기는 놈일수록 더욱더 민족주의자 행세를 하려할 것이다.
친일파를 때려죽이자고 앞장을 설 것이다.
방어기재였다.
정신분석이었다.
과학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한가한 이야기를 나눌 분위기가 아니었다.
드디어 범석이 구석에서 술병과 술잔을 찾았다.
그리고 술잔을 건넸다.
민수는 원 샷으로 들이키고 다시 술잔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네가 나를 고발하게.’
무슨 뜻인지 이해 못한 민수는 범석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첩자를 잡았다고 말이야.’
술에 또 술을 퍼 넣었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질 않았다.
‘내가 첩자인 것과 위장이 탄로 나는 것은 시간문제야. 차라리 니가 날 고발하는 게 나아.’
그건 그럴 것이다.
물론 내가 이들 편이라는 전제하에.
‘왜?’
‘광복군의 입장에선 당연히 고등경찰 안에 우리 편이 필요하고.’
하지만 민수가 묻는 것은 그게 아니다.
‘대체 왜?’
이런 것들의 첩자냐는 말까지는 절제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그도 원 샷을 해봤다.
그리고 민수에게도 술잔을 채워줬다.
이야기가 길어진다는 뜻이다.
‘이 박사와 김구 선생이 맥아더를 만났네.’
민수도 꼴깍 술을 넘긴다.
‘일본 본토 대신 조선반도에 상륙을 요청했어. 여기엔 2개 사단 밖에 없고 우리 민족은 미군을 지지할 테니 본토보다 훨씬 쉬운 전쟁이지. 일본에는 치명타를 줄 수 있고.’
‘그들이 수락했나요?’
‘전제는 있어.’
‘군사정보?’
민수가 말을 거는 동안 주변을 둘러봤다.
‘바로 그거야. 상륙을 하려면 반드시 필요하고 우리의 실력과 의지도 시험해 보고.’
범석이 다시 민수의 술잔을 채운다.
그 때 민수의 눈에는 근배에게 빼앗긴 명단이 보였다.
‘잘 안 됐군요.’
범석이 끄덕였다.
‘그런데 그들이 상륙하면 뭐가 달라지죠?’
민수는 다시 한 번 명단을 쳐다봤다.
‘미국은 우리를 식민지로 취급 안 해?’
범석은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민수가 자신의 편에 서길 간절히 원하는 것이었다.
그가 새로운 술병을 가지러 간 사이에 민수는 근배에게 빼앗긴 명단을 몰래 품에 넣는데 성공했다.
‘뭐야? 갑자기 순진해 지신 거에요?’
‘누구나 그렇게 말해요. 일본 놈들은 안 그랬나?’
‘하지만 우리 실력이 안 되면 어차피 결과는 똑같아요.’
‘맞아. 그러니 실력을 키워야 하고 미국이 도와줄 거야.’
민수가 고개를 저었다.
‘순진한 소리. 일본은 돕질 않아 우리가 이 모양 이 꼴인가?’
‘미국은 달라. 이들보다 훨씬 낫다구.’
‘아니 누가 나은지를 어떻게 안다는 거죠?’
범석이 민수를 빤히 쳐다본다.
‘그리고 그걸 누가 결정해요?’
범석은 더 이상의 논쟁이 무의미하다고 느낀 것일까?
논쟁을 중지하고 잔을 부딪쳤다.
그리고 일어나 민수의 손을 잡고 일으켜 주었다.
민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범석이 문을 열고 민수를 밀어냈다.
‘결정을 해야 돼!’
문 앞에는 학규와 난영 그리고 근배가 서있었다.
특히 근배는 그를 풀어주는 것을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근배는 항의를 하려 나서보았지만 학규가 옆에서 고개를 저었다.
불만은 가득했지만 함부로 항명을 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도 지금의 분위기가 얼마나 엄중한지 정도는 파악이 됐다.
그에 비해 난영의 표정은 난해하기 그지없었다.
민수는 여전히 망설였다.
그런 민수에게 학규는 가도 좋다는 뜻으로 골목길을 가리켜 주었다.
무언가 어색한 민수의 발걸음.
그가 골목을 돌아 사라지자 불만에 가득한 근배가 따라 나섰다.
하지만 학규가 이를 막았다.
‘그를 건드리면 안 돼!’
근배가 알았다며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칼을 챙겨 나왔다.
그리고 민수와 반대방향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세 사람만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자 비로소 학규가 걱정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가 불면 모든 게 끝장이야.’
‘하지만 그가 아니면 누구도 정보를 뺄 수 없어.’
범석이 술을 입에다 털어 넣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들의 존재이유도 없고.’
이때 아지트를 뒤지다가 사색이 된 난영이 부르짖었다.
‘명단이 없어요.’
서로 놀란 표정의 학규와 범석 그리고 절망감에 주저앉는 난영.
학규는 민수를 잡으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범석이 그를 잡았다.
학규는 다시 주저앉았다.
난영이 옆에서 흐느끼기 시작했다.